난초
난 ㅡ 박목월
난을 가꾸는 뜻 ㅡ 정섭
난을 그리면서 ㅡ 이일화
난을 치다 ㅡ 김명리
난초 ㅡ 여동록. 이병기
아름다운 난초 ㅡ 정약용
추사 김정희 ㅡ 한승원
난 박목월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 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그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난을 가꾸는 뜻 정섭
구 원 넓이 난초 가꾼 강변 텃밭
팔 원만 그리고 다 마치지 못하였네
세상만사 만족스러운 때 언제 있었더냐
나머지 가꾸는 일은 뒤에 오는 사람의 몫
난을 그리면서 이일화(명나라)
얄미워라 다소곳하면서 고집 센 난초
나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꽃을 피웠네
코끝에 그 향기 살포시 스치기에
맘먹고 향 찾으니 향 뽑지 않네
난을 치다 김명리
지난 세밑 춘천에서 얻어온 한란
밤사이 옥신각신 꽃봉오리를 열었다
꽃봉오리의 낭랑한 내부로부터
급작스레 모닥불 지핀 듯 불티들이 난다
밤의 전신에 불붙는 난향
삐긋이 열리는 향기의 열명길 열명 ㅡ 저승길
저 팅 비어 움푹한 반그늘에
나 짐짓 수줍게 난을 치려는 뜻은
서둘러 벗어나고 싶은 이 겨울
생의 매서운 북서풍 탓만은 아닐 것이다
상심한 사람의 마음 볕 또한
제 안의 부력으로 한 잎 또 한 잎 자라나는 것
은하의 모래톱이 때로는 지척인듯 맑고
덧칠한 묵선 위로도 벌 나비 들끓고
달의 그림자가 검은 고양이처럼
순식간에 태양 위로 획 지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제49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에서
난초 여동록(명나라)
손수 난초 두세 촉 가꾸었는데
날씨 화창해지자 차례로 꽃을 피우네
한참을 앉아 있노라니 방 안에 향 있음을 모르겠더니
창문 열어놓자 이따금 나비가 날아드네
난초 이병기
한 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 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새로 난 난초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 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침 볕이 발틈에 비쳐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 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가람 이병기(1891-1968) 전북 익산
아름다운 난초 정약용(1762-1836)
아름다운 난초가
산비탈에 돋았네
참 아름다운 나의 벗
덕을 지녀 반듯하여라
다른 벗도 좋아하지마는
그대 생각을 정말 많이 한다오
아름다운 난초가
산비탈에 돋았네
요즘 사람들처럼
빨리 변하지 않는
그대를 잊지 못해
내 마음은 어쩔 줄 모른다오
아름다운 난초가
쑥대밭에 돋았네
시들고 무성한데
누가 손질해 줄까
그대를 잊지 못해
내 마음은 애닯다오
추사 김정희
대감, 잘 오셨습니다. 대감(흥선대원군 이하응)께서는 난초를 치셔야 합니다
먹으로 그린 소나무가 군자의 체취를 훈습한 유학자라면
먹으로 친 난은 노장의 무위를 체득한 도학자입니다
소나무에게는 당당한 줄기가 있지만
난은 스스로 줄기를 퇴화시키고 잎사귀들만 남겨놓은 존재입니다
소나무는 천만길 속의 지맥에서 솟구쳐 오른 음기와 관광한 태허의 양을 만나게 해주는 제관같은 나무입니다 쭉쭉 뻗어 자란 소나무는 너무 근엄한 군자이므로 오탁악세 속에서는 슬프게도 꺾여 화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난초는 근엄하지 않으면서도 도락을 다 머금은 신선 같은 존재이므로 꺾이지 않습니다 난초에게서 줄기를 빼앗아가고, 대신 허공에다가 이십여 일 동안 드러내놓은 채 물을 주지 않아도 죽지 않는 끈기 있는 오동통한 뿌리를 준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왕권을 억누르는 세도가들은 줄기 있는 나무에게서는 위해를 느끼지만
줄기 없는 풀인 난초를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먹물로 소나무를 그리게 되면
그 소나무의 향기가 그 사람의 헌걸찬 기상을 드러나게 하지만
먹으로 난초를 치면 그 난초의 향기가
현실세상을 경영하고자 하는 뜻이 전혀 없는 신선으로 보이게 합니다
줄기가 없고 잎사귀만 있는 난초가 끈기 있는 오동통한 뿌리와 그윽한 향기로써
대감을 은은한 안개 속에 감추어줄 것입니다
지금 대감은 뜨거운 햇살 아래 드러나지 않도록 난초처럼 은인자중해야 합니다
한 승원 <추사> 2권 253쪽에서.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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