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코가 한창 위세를 떨치던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까지 크로스오버 음악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주로 클래식 명곡에 현대식 리듬과 비트를 가미해서 편곡한 음악들이었는데, 이런 음악들이 20년이 지난 요즘 퓨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빛을 보고 있다.
크로스오버란 무엇인가?
'크로스오버'의 정확한 뜻은 서로 성격이 다른 장르끼리 합쳐서 새로운 문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현실적으로는 음악 분야에서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를 지칭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왜 음악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행위에 대해 별도의 용어까지 만들었을까?
예전에는 음악 장르 사이의 경계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고급예술에 속하는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는 한번 넘어서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 10여 년 전에는 우리나라에서 클래식 음악가가 대중 음악인과 함께 활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음악 경력을 포기하는 자살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 1976년도 10월, Walter Murphy & The Big Apple Band가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을 편곡한
<A Fifth Of Beethoven>을 발표, 빌보드 팝부문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큰 화제가 되었다.
음악가들은 왜 크로스오버를 시도할까?
제일 큰 이유는 대중들의 귀에 익숙한 곡을 편곡해서 들고 나옴으로써 후광 효과 (Halo Effect)를 얻으려는 것이다. 아무리 음악에 문외한이라도 그 유명한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을 한번쯤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크로스오버를 시도하는 많은 음악인들이 노리는 효과가 바로 이것이다. 악성 베토벤이 작곡한 지구촌 최고의 히트곡에 한번 업혀 가보자는 것이다.
다음은 록이나 재즈 음악가 가운데 정통 클래식 전공자가 꽤 많다는 사실이다. 지금이야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나이젤 케네디 (Nigel Kennedy) 처럼 비발디의 사계부터 펑크록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음악인도 있지만, 6, 70년대는 서구에도 클래식 음악인들 사이에서 재즈나 록 음악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결국 클래식에서 록이나 재즈로 전향한 이들은 평론가들의 호평을 이끌어내면서 대중성도 획득할 수 있는 방편으로 크로스오버를 선택했다.
* 재즈 연주회에서 협연을 하고 있는 나이젤 케네디. 정통 클래식부터 재즈, 펑크록까지
전방위로 넘나드는 진정한 클래식계의 이단아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이유는 사람은 익숙한 것에 호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음악도 당연히 단 한번이라도 들어본 멜로디를 선호하게 되어 있다. 설혹 베토벤의 <운명>을 잘 모르더라도 어렴풋이 한번이라도 들어본 기억이 잠재되어 있다면, 그 음악에 호감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대중음악에서 표절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많은 가수들이 가수 생명을 걸고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유가 귀에 익숙한 멜로디에 대중들은 친밀감을 느끼고, 이런 곡이 히트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게 합법적인 공간으로 나온 것이 샘플링이다.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가수들이 널리 알려진 익숙한 곡들을 샘플링해서 쓰고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원더걸스의 텔미도 80년대 히트곡 'Two of Hearts'에서 샘플링한 곡이다.
* 원더걸스가 <텔미>에서 샘플링해서 문자 그대로 대박이 났던 Stacey Q의 <Two of Hearts>.
샘플링을 날로 먹는 짓으로 아는 사람도 많은데, 적절한 음악을 적절하게 가져다 적절하게
변용하고 적용해서 히트시킨다는 게 절대 간단한 일은 아니다.
크로스오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퓨전
크로스오버가 장르끼리 다리 걸치기 성격이 강하다면, ‘퓨전 (Fusion)'은 이질적 장르가 비빔밥처럼 뒤섞인 것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재즈 음악가 마일스 데이비스 (Miles Davis)가 1970년 발표한 <Bitches Brew> 앨범을 재즈와 록이 뒤섞인 퓨전 음악의 시초로 본다. 이후 퓨전은 좀더 의미가 확산되면서 이제는 이질적 장르나 문화적 요소가 결합되어 새로운 감각과 분위기를 형성하는 모든 것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 공식적으로 최초의 퓨전앨범으로 인정받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Bitches Brew>.
크로스오버가 다른 장르끼리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퓨전은 이질적인 요소가 융합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초밥 정식에 김치를 밑반찬으로 곁들이면 크로스오버지만, 김치를 넣어서 만든 김치 스파게티는 퓨전이다.
크로스오버와 퓨전 음악도 처음에는 클래식과 재즈, 록의 결합 정도에서 이제는 아프리카 토속음악부터 국악, 제3세계 음악까지 폭넓은 이종교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크로스오버와 퓨전은 이제 주류 대중문화를 형성하는 주요 코드가 되었다.
* 네덜란드가 낳은 클래식 록 그룹 Ekseption의 Ekseption Plays Bach (1976) 앨범 가운데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Toccata (from Toccata And Fugue In D-minor For Pipe Organ).
왜 크로스오버와 퓨전이 대세가 되었는가?
전세계가 일일생활권이 될 만큼 가까워진 교통수단의 발달이 첫째 요인이며, 둘째는 인터넷의 확산 때문이다. 전세계인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자기 문화에 대한 폐쇄성이나 다른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급격히 희석되었고, 인터넷의 영향으로 장르 이동에 대한 거부감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특히 사이버 공간에서 마우스 클릭만으로 가볍게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데 익숙해진 사용자들은 장르 사이를 넘나드는 데에 대해서 심리적 부담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시공간적 거리라는 물리적 장벽이 극복되면서 심리적 거리감까지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이다.
* 사이버 스페이스를 통해 물리적 거리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해소되자 다양한
분야에서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이전 시대까지 음악이란 타고난 재능에다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서 배운 고도화된 기술 (기보법이나 편곡, 악기연주 등)이 결합되어서 만들어지는 장인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음악적 감각만 충분하다면 PC 한대만 가지고도 혼자서 작곡과 편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산업이라는 측면에서 음악도 퓨전의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출처: http://essayblog.tistory.com/55 [에세이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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