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에 관한 추억을 나열하기 위해 쓴다 - 성석제
나는 기형도가 살아있는 동안, 가장 빛나고 푸른, 아니 이 말은 틀렸다, 오만과 독선의 이빨로 서로를 물어 뜯을 수 있는 대학시절을 함께 보냈다. 쉽게 말해 목욕탕에 함께 갈 수 있는 사이였다. 그래서 내가 제정신으로 여기 늘어놓을 수 있는 추억담은 아주 적다. 하얀 키보드와 바다색 모니터 화면을 앞에 두고 손을 꺾으며 내가 떠올리는 것은 기형도의 수동타자기다.
우리는 대학 시절,학교 신문에서 공모하는 무슨 문학상을 받아 타자기와 세계문학전집을 들여놓은 공통된 경험이 있다. 기형도는 나보다 먼저 상금을 타서 수동타자기와 세계문학전집을 들여놓고 배부른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너도 상금 받으면 먼저 책하고 타자기부터 사. 눈 딱 감고."
글쎄, 나는 상을 받기도 전, 상금은 내 것이나 다름없다면서 술값으로 미리 다 써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해에 내가 받은 상금은 그가 그 전해에 받은 것의 반이었다. 가작에 해당하는 상금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충고를 잊지는 않았다. 청계천에서 그가 산 반 값으로 같은 세계문학전집을 샀고 그가 산 수동타자기의 값으로 중고 전동타자기를 샀고, 어쨌든 그 타자기와 문학전집의 덕으로 나는 다음해 그보다 조금 상금이 많은 무슨 상을 받아 술값으로 마음놓고 다 써버렸다.
그때는 상금이 내 것이나 다름없다는 흰소리 따위는 하지 않고 조용히. 그와 나 둘중에 누가 장사를 잘 했는지는 아직 잘 모르고 있다. 이런 것이 내가 썼으면 싶은 추억담이다. 당연히 부정확하고 주관적인 데다 시시콜콜하다.
이에 따라 나는 기형도와 가까웠고 아직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에 관한 추억을 나누어달라고 부탁했다. 누나, 기애도 씨는 유년 시절과 집안 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게으른 나를 위해 글로 옮기느라 몸살이 나고 말았다. 민망할 따름이다. 고등학교 동창인 이상현 정대호 에게 감사한다. 직장생활에 대해서는 신문사 후배였던 박해연이 정리해 주었다. 그 역시 글을 쓰는 동안 몸살을 앓았다고 엄살을 떨며 겁을 주었다. 대학 시절 이후의 벗들, 동료들에게도 감사한다.
사실 기형도를 추억할 수 있는 사람, 그런 권리가 충분한 사람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가 참여했던 동인(同人)들, 선후배,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를 읽은 독자들에게도 권리가 있다. 그를 만났던 모든이에게 추억담을 들어야 하고 기록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세상에 는 참 아름다운 이름이 많다고 했다. 물빛의 수색(水色),강의 서쪽, 또는 서쪽으로 흐르는 강인 서강(西江)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 것은 그였다. 사람의 이름이 지명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어떤 이름에는 살 아 있어도 그럼 힘이 느껴진다고 했다. 이 애, 세월은 가고 이름은 남았다. 추억은 경멸할 만한 것이다. 그것에 먹히는 한은. 가볍게 내리는 비처럼 머리를 두드려 깨우는 추 억은 아름답다.우리가 함께 살아있는 동안 .
60년 2월 16일(음력)기형도, 양력으로는 3월13일,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 392번지에서 출생. 3남 4녀 중 막내.그의 주민등록번호는 600216으로 시작된다. 아버지 기우민 씨의 고향은 연평도 에서 건너다보이는 황해도 벽성군 가우면 국봉리였는데(어머니 장옥순 씨의 고향은 옹진군)6.25를 만나 당시 황해도 피난민의 주 이동로인 연평도로 건너왔다. 아버지가 인천을 거쳐 뭍으로 가지 않은 것은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던 면사무소에서 근무해 전쟁이 끝난 후 대부분의 피난민이섬을 떠난 것과는 달리 이곳에 정착했다. 이에 따라 형제 7남매 중아래로 4남매의 고향은 연평이 되었다.
64년 9월, 일가족이 연평을 떠 나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로 이사. 이사 오기 전 아버지 우민 씨는 민주당원으로 활동했는데 영종도 간척 사업에 몰두했다가 정부보조금 단절과 여러 가지 압력으로 실패하고 모든 것을 포기, 시흥으로 왔다가 자리를 잡고 가족을 불렀다. 장성한 3남매는 출가하고 어린 4남매는 3년쯤을 지금 마을회관이 된 곳에서 살았다.
67년 시흥국민학교에 입학. 안양천 뚝방을 걸어 시흥대교를 지나 지금의 시흥 본동에 있는 학교까지 가는 길은 2킬로미터 정도였는데 당시 시흥과 소하리 일대의 주민들 중 많은 사람이 기아자동차와 대한전선을 다녀 길에는 회색 또는 카키색 작업복이 넘쳤다.
그 길은 안개가 자주 끼었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와"(안개)등교를 했다.영등포로 중학을 다니는 누이를 제외한 3남매가 같은 학교에 다녔는데 성씨가 흔한 게 아니어서라도 유명한 존재들이었다.공부 외에 그림과 음악에도 재주를 보여 임명장과 상장으로 라면박스를 채울 만큼 많은 상을 받았다.
아무와도 싸움을 못하고 늘 책받침에다 그림을 그려달라고 조르는 여자 아이들이 있어서 놀림감이 되곤 했는데 이때마다 나선 것이 성격이 활달한 두 살 위인 누이 순도였다. 나는 그가 죽을 때까지 누구와도 얼굴을 붉히고 싸우는 것을 상상한 적이 없다.
방학이면 아이들은 일꾼과 똑같이 일을 시킬 정도로 엄격한 아버지는 여름 저녁 남폿불 밑에서 열무단을 묶으며 풍자가 섞인 이야기를 끝없이 들려주는 탁월한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유교에 가까웠던 아버지는 고사성어와 역사를 중심으로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68년 봄 아버지가 평생 처음 직접 지은 집에서 가족이 살게된다.
건축비 25만 원으로 지은 이 집은 방 세 개에 마루를 들였고 부엌이 둘,큼직한 다락 하나가 있었다.화초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취향에 따라 은행나무가 세 그루, 미루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고 답싸리 울타리에 철따라 장미,나무딸기,해당화,해바라기,겹채송화가 마당 가득 피곤 했다.
녹색 기와를 얹어 당시로서는 최고로 지었다는 이집을 두고 4남매는 L.M.몽고메리가 짓고 신지식이 옮긴 동화[빨강머리 앤]에 나오는 집 '그린 게이블즈'라고 부르며 좋아했다. 부엌 위 다락방은 아버지와 손위 형들이 모아들인 책으로 가득했는데 기형도는 다섯 살에 한글을 깨쳐 누이들과 함께 마음에 맞는 책을 들고 호박씨나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지냈다. 남매들은 쪽수가 비슷한 책을 찾아 누가 빨리 읽는지,바꾸어서 내용 알아맞추기 따위의 놀이로 '흔해빠진 독서'를 했는데 꼼꼼한 책 간수,밑줄 긋기,책 모아들이기 등의 버릇은 이때부터 싹텄다.
이 집은 그의 여러 시에 나타나듯 외풍이 심한 [바람의 집]이자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으로 [바람은 그대 쪽으로] 부는 들판이 보였으며 종내는 [빈집]-----이사를 가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씀-----이 된다.
69년 아버지 쓰러지다. 정초 세배 온 동네 사람들과 모처럼 들어온 양주를 컵으로 마시던 아버지가 중풍으로 눕게 된다. 가장이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위험한 家系. 1969])쓰러지는 바람에 얼마 없던 전답은 아버지 약값으로 남의 손에 넘어간다. 어머니 장옥순 씨가 생계 일선에 나서고 누이들은 신문 배달 등으로 가계를 도왔는데 아직 어린 기형도는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우는"([위험한 家系.1969]) 내성적인 생활을 해나간다. 아버지는 그 후 타계할 때(91. 8. 19.)까지 23년을 그의 여러 시에 나타나듯 [늙은 사람], [노인들],[너무 큰 등받이 의자], [병]의 모습으로 살았다.
73년 3월 신림중학교 입학. 3년 내내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
75년 5월 16일 바로 위 누이인 순도가 죽음.
어린 날의 친구이자 보호자였던 누이의 죽음에 의한 충격으로 교회를 나가지 않다. 가 해자가 같은 교인이었던 까닭이다. 형제들은 교회를 나가지 않거나 무채색 옷을 입음으로써, 방황으로 각각 그 슬픔을 삭였다.
76년 2월 신림중학교 졸업(1회). 졸업생 대표.
76년 3월 중앙고등학교 입학.
안양에서 삼청동, 중앙고등학교 후문 근처까지 가는 104번 버스를 타고 통학. 삼청동 종점은 인근의 공원을 찾아온 연인들과 낡은 적산가옥을 포함한 고옥들이 많았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은 걸어서 20여 분쯤 걸렸는데 지루하고 어두운 길을 노래하며 걷는 버릇이 생겼다. 문학 서클에는 들지 않았으나 글에 재주가 있어 교내 백일장 등에서 여러 상을 받았다.
77년 교내 중창단인 '목동' 2기의 바리톤으로 활동 시작. '목동' 2기의 바리톤 자리가 비었을 때 기형도가 물망에 올랐다. 그는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내 목소리는 정통보다는 뽕 짝에 가깝다"고 사양하는 듯했으나 일단 입회한 뒤로는 교회, 문학의 밤, 축제, 결혼식 등에 누구보다 바쁘게 돌아다녔다. 베이스 김용기, 멜로디 정대호, 테너 이상현 등이 한 동아리였는데 레퍼토리는 영화 주제가 [에덴의 동쪽], 슈만이 헤세의 시에 곡을 붙인 [2인의 척탄 병], [애니 로리], [카튼 필즈], 찬송가[신자되기 원합니다] 등등.
기형도는 정규 레퍼토리 외에도 송창식, 조용필의 흉내를 잘냈 다.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기타로 노래와 작곡도 했는데 조카를 위한 자장가를 녹음해놓을 정도였다. 그의 별명은 '기타 삼촌'이었다. 집에 온 누이들, 매형과 함께 2부, 3부로 목청껏 노래하는 것은 우리 집엔 흔한 일이었다. 국사 성적으로 고민하는 나와 함께 학교 앞 분식집에서 집에 갈 때까지 두어 시간 동안 그는 국사의 전부를 이야기해준 적이 있다.
모임에서도 항상 대화를 주도했다. 한번은 다른 중창팀에서 자신들의 레퍼토리를 '목동'에서 쓴다고 항의, 분위기가 험악하였을 때 형도가 나서서 차분히 설득해서 그냥 넘어간 적이 있다. 논리에 강하고 토론에 적극적이었다. 신대철의 시 [처형 3]을 가사로 작곡을 한 적이 있고, 군대가기 정의 이별 분위기를 표현한 자작곡 등을 남길 정도로 노래에 심취했다. 그 이별가는 군대 가는 선후배를 환송하는 자리에서 자주 불렀다.
79년 2월 중앙고등학교 졸업.
79년 3월 연세대 정법대 정법계열 입학.
교내 문학 모임인 연세문학회 입회.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시합평회에 [연습] 등을 내보이다. 79학번 동기로는 같은 정법계열의 권 진희, 문과대학의 원재길, 배효룡, 이영준, 태경호, 신과대학의 변병 탁 등이 있었다. 1년 선배로는 국문과의 오봉희, 조성록, 유희문, 영 문과의 이성겸이 있었다. 2년 선배로는 철학과의 이계환, 영문과의 성원근이 자주 드나들었다. 3년 선배로는 경제학과의 이근우, 그 위 선배로는 정창헌(국문과)이 있었다. 자신의 시를 두고 하는 이야기에 민감했고 수줍음이 많았다. 기억력이 비상해 한번 만난 사람이면 첫 만남의 옷 빛깔을 기억해내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가디건이라고 부르는 앞단추가 내리달린 실로 짠 웃옷을 입고 다녔다. [...] 적당하게 마른 체구였다. 짙은 눈썹과 얇은 쌍꺼풀, 기다라면서 눈동자를 찌를 것처럼 안으로 둥글게 말려나오는 속눈썹, 자주 면도를 해야 하는 각진 턱을 가지고 있어서 [...] 눈빛은 맑고 티가 없이 깨끗했으며, 때때로 쓸쓸해 보였다.
문학회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합평회를 가졌다. 소설, 또는 시 두세 편을 낭독하고 비평하는 형식이었는데 시나 소설을 쓴 사람은 '비평의 시간' 동안 변명이나 설명을 할 수 없었다. '침묵의 의무'에 대한 대가는 그 비평이 끝난 다음, '작가의 변'으로 벌충되었다. 당연히 비평은 엄혹하고 긴장되었으며 당사자는 소년들이 속없이 던진 돌에 맞는 개구리처럼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기형도는 이런 방식에 꽤 쉽게 적응했고 토론에도 강했다.
아르바이트를 계속했고 성적이 뛰어나 장학금을 받았다. 모임과 돌아가며 친구 집에서 자는 데는 이골이 난 벗들 덕분에 외박이 잦았다. 막상 야트막한 산에서 백미터쯤 떨어진 밭 위의, 돼지와 외풍 많은 그의 집에서 함께 자는 일은 드물어서 1년에 그의 방은 네사람 이상이 자려면 서로 발을 겹쳐야 했는데 다리가 긴 사람들이 구박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어머니는 참, 숭늉을 대접에 담아 많이도 주셨다.
권진희와 나는 바둑을 두고 기형도는 관전을 하다가 심심하면 책을 읽거나 기타를 쳤다. 누구의 집에서든가, 밤이 이슥해서 우리는 시 대신 서로를 두고 합평회를 했는데 그게 상당히 아파서 한동안은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한 적이 있었다.
6월, 당시 교련 과목 과정에 따라 문무대에 입소,군사훈련을 받았다. 휴식 식간에 "노래가 끝날 때까지 계속 쉬겠다"는 조교의 주문에 따라 다른 사람을 쉬게 하기 위하여 양희은의 작은연못 같은 노래는 4절까지, 수십곡을 불렀다. 훈련 후 문학회 회원과 대천으로 여행. 선배인 조성룡이 "친구가 대천 앞바다인 원산도에서 해변 상점을 열고 있으니 가면 모두 공짜"라고 해서 사시는 했지만 친구를 만나지 못해 기아선상에 허덕였다. 어느 밤에 술에 취한 누가 바다에 뛰어들겠다,돌아오지 않겠다고 주장하면서 해변을 달렸고 기형도는 그 사람의 사지 가운데 하나를 붙드는 일을 담당했다.
지하철 2호선이 생기기 전 기형도는 안양에서 중앙청을 오가는 103번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 버스는 나도 가끔 탔는데 어디선가 낯이 익은 녀석이 가방을 다리 사이에 끼고 손잡이가 집게라도 되는 양빨래처럼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알고 보니 문 무대에서 노래부르던 녀석이었다. 그래서 같이 버스에서 내린 뒤 말을 붙였다.
기형도는 자신이 문학회에 있다면서 함께 가보자고 했다. 그래서 거기 입회했는데 기형도는 그 사실에 대해 "누구를 문학회, 또는 문학에 끌어들인 착한 목자는 나다"라면서 두고두고 울궈먹었다. 또 기형도는 내게 몇 가지 쉬운 노래를 무슨 비파트를, 내게는 멜로디나 테너 파트를 맡겼다. 그것이 2인의 척탄병이며 에덴의 동산이나 트윈 폴리오의 곡들이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린 다음 시장을 거쳐 학긁광문을 통과하고 백양로를 걸어 언덕에 있는 종합관에 이르기까지 그 노래들을 불러댔다. 또는 역순으로 내려가며 노래를 불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미친놈인 양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다. 이 노래들은 물론 술자리에서도 제창되었다.
이런 순례는 그의 귀가길, 버스 정류장에서 들길을 지나 집까지 걷는 길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그가 잘 부르던 노래의 원주인은 송창식과 조용필. 가끔 조영남도 섞었고 그때그때 유행하는 노래도 불렀다. 남들이 따라 할까봐 일부러 음정을 높게 잡았다가 공연히 핏대를 세우는 고생을 자주 했다.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허리를 약간 굽힌 채, 눈을 감은 그는 시키면 주저없이 노래하고 노래하고 노래했다.
고등학교 때 절친한 친구인 조병준을 찾아 멀지 않은 서강대 캠퍼스를 자주 갔다. 조병준도 문학회 모임에 가끔 참석해서 준회원으로 간주되었다. 둘은 어쩌다 마음이 맞지 않으면 토라진 계집애들처럼 이별을 한다고 종알거렸는데 그 덕분에 가끔 있곤 하던 이별식 석상에서 냉면은 잘 얻어먹었다.
[성자를 찾아서]라는 시로 그때 우리를 감동시킨 조병준은 자신의 방에 수백 장의 음반을 소장하고 있는 '예술의 귀족'이었다. 그의 방에서 엉덩이를 맞대고 밥 딜런이나 레너드 코헨을 들으며 시시한 연애담이나 시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한 적이 많았다. 동숭동 언덕바지에 있던 그 집에서 나오는 아침이면 가까운 학림 다방에서 R.스트라우스를 듣고 나서 205번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가곤 했다.
기형도가 이름을 생략하고 '조'라고 부르던, 또는 성과 이름의 첫자를 생략하고 '준'이라고 부르던 조병준은 지금 인도에 가 있다. 그는 기형도의 생전에 가장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친구였고 따라서 글자로 만들 수 있는 기형도의 생각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10월 26일:--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 죽음. 계엄군 진주.
학교 앞에 '캠퍼스 다방'이라는 60년대식 다방이 있었다. 시간 이 날 때마다 거기 가서 뭘 끄적거리거나 거북선 담배를 피우면서 서로를 뜯어먹었다. "넌 냉소주의자야. 그뿐이야." "넌 냉소와 냉소주의와 냉소주의자를 혼동하고 있어. 넌 바보든가 바보가 되고 싶어하든가 바보 같은 놈이야." 늘 뜨개질을 하던 중년 여인이 계산대에 앉아 있었다. 그 여인은 화가 르느와르나 르느와르의 그림을 방불케 하는 데가 있었다. 형도는 가끔 그 여인을 노트에 크로키로 그렸다.
한 번인가 그 그림을 억지로 그 여인에게 보여주게 했다. 여인은 아름답다고, 자신이 가질 수 있느냐고 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더욱 자주 출입할 수 있었고 나중 후배 중에서 그 다방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용사도 생겨났다. 저녁이 되면 시장 안의 술집으로 가곤 했다. 기형도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술자리에 자주 어울리다보니 알콜의 도움이 없이도 웬만한 술꾼 정도의 주정을 부릴 줄 알게 되었다. 그 재간을 자주 보여주지는 않았다.
12월 교내 신문인 {연세춘춘}에서 제정, 시상하는 '박영준문학상'에 소설 [영하의 바람]으로 가작 입선. 교지 {연세}지에서 제정, 시상하는 백양문학상 시 부문에 [가을에]로 가작 입선.
80년 3월 정법계열에서 정치외교학과로 진학. '80년의 봄'이 시작됨.
철야농성과 교내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 당시 노래극으로 공연 된 [공장의 불빛]에 대해 호평. 교내 시위중 선두에서 태극기를 들고 행진한 적이 있었는데 한쪽 귀는 권진희가, 한쪽 귀는 내가 들었다.
미적거리는 기형도를 끌어온 것이 누구인지, 나머지 한 귀를 든 건 누군지 잘 모르겠다.
80년 5월15일을 전후하여 시내 시위에 가담. 휴교령 내림. 제주 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 선포. 광주 사태.
웬일인지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집으로 형사가 찾아와 서적 등을 수색했다고 말했다. 그가 학회일을 보았는지, 그래서 그런일이 수색했다고 말했다. 그가 학회일을 보았는지, 그래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두 분명치 않다.
80년 9월 개교.
중이염으로 통원 치료. 한쪽 귀가 잘 안 들리게 됨. 이때의 경 험을 토대로 소설 [미로]를 씀.
81년 3월 병역 관계로 휴학.
대구, 부산 등지로 여행. 나와 성석제가 동행했는데 명목은 입 대하기 전 화랑처럼 몸과 마음을 씻고 단련하기 위함. 대구의 다방을 순례하고 분산 송정리로. 그때 기형도를 마중나온 아가씨가 있었다.
그 여인은 부산까지 기차여행을 같이 했다. 거북한 중에 기형도는 그녀와의 만남을 "헤어지기 위한 첫 만남"이라고 했다. 마침 바닷가에 폭풍주의보가 내려 수영은 할 수 없었다. 슬리퍼를 신고 나선 사람들이 발을 젖지 않으려고 파도가 넘어드는 방파제 위를 펄쩍펄쩍 뛰던 기억.
부산은 형도가 가장 자주 갔던 여행지였다. 출가한 큰누이가 부 산에 살고 있어 고등학교 때도 자주 갔다.
7월 방위 소집되어 안양 인근 부대에서 근무. 안양의 문학 동인 인 '수리'에 참여, 동인지에 [사강리]등 발표. 시작에 몰두, 초기작의 대부분을 이때에 쓰고 습작을 정리하다.
82년 6월 전역.
83년 3월 3학년 1학기로 복학.
전자오락, 속칭 '뿅뿅'인 갤러그 게임에 빠졌다. 학교에서 우리 집(영등포구 신길동)까지 걸어오면서 문이 열린 전자오락실은 대부분 들어가보았다.
83년 12월 교내 신문인 {연세춘추}에서 제정, 시상하는 '윤동주 문학상'에 시 [식목제]로 당선. 신춘문예에 관심을 돌려 최종심에 오르내리다.
84년 10월 {중앙일보} 입사.
85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로 당선.
12월 어느 저녁 나와 이성겸, 그리고 다른 누군가 광화문 어딘 가의 당구장에서 당구를 치고 있었다. 그때 이성겸 씨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성겸은 기이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자는 기형도였다.
예전에 같이 당구를 한 번 친 적이 있다는 것을 유일한 단서로 인구 8백만의 도시에 단 하나뿐인 이성겸의 소재를 찾아낸 기형도는 의기소침을 가장하여 나타났다. 그는 큐를 집어들더니 난생 최초로 그의 사람찾기 능력에 경의를 표하는 나를 무시한 채 초크를 칠했다. 그리고 자기 순서도 아닌데 한 큐를 치고 말했다. "나 신춘문예에 됐어." 이 말을 이성겸이 최초로 알아듣고 신중히 해석한 뒤 일동에게 이렇게 번역했다. "축하한다." 내가 알아듣고 손을 내밀었다. "잘됐다." 지금 후회한다. "잘했다."로 해야 했을 것을.
2월: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신문사서는 수습 후 정치부로 배속.
편집부 수습을 할 때 그는 교정에 대해 배워온 것을 내게 가르치려 했다. 그가 낸 문제는 '뇌졸증'인가 '뇌졸중'인가, 또 '내출혈' 인가 '뇌출혈'인가였다.
-문예지에 [專門家],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늙은 사람],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白夜], [밤눈], [오래된 書籍], [어느 푸른 저녁]을 발표.
86년 문화부로 자리 옮김. 지속적으로 작품 발표([위험한 家系.1969], [鳥致院], [집시의 시집], [바람은 그대 쪽으로], [포도밭 묘지.1,2], [숲으로 된 성벽] 등). 문학과 출판을 담당,관련 인사와 활발한 교유
87년 여름에 짧은 유럽 여행. [나리 나리 개나리], [植木祭], [오후 4시의 희망, [여행자], [장미빛 인생]발표.
기형도는 정치부에서 중앙청 출입 기자로 활동하면서 신작시는 거의 쓰지 못하고 등단 이전에 써놓았던 작품에 손질을 해서 발표했다. 반응은 본인이 기대했던 것만큼 좋지 않았다. 그는 갓 데뷔한 무명시인 중이 하나였고, 정치부의 숨가쁜 일상에서 시를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는 좋은 신문지가보다는 좋은 시인이 되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 문화부로 옮기면서 그 희망을 비로소 실천할 수 있었다.
[오후 4시의 희망]이 시인으로서 재출발하는 시점에 나온 작품이다.{중앙일보} 편집국은 외부로 향한 벽면을 거대한 유리로 만들어놓았고, 그 위에 블라인드가 쳐져있었다. 오후 4시면 이미 초판 신문이 나온 상태라 비교적 한가한 시간이다. 문화부에서 기형도의 자리는 블라인드가 쳐진 창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그는 블라인드를 등뒤로 한 채 얼굴을 책상에 처박고 앉아 [오후 4시의 희망]을 완성했다. 그해 6월부터 그의 후배로, 문화부에서 막내기자로 일하게 된 나는 그의 왼쪽 자리에 앉았다.
기형도는 시가 완성되면 한 장씩 복사해서 나에게 읽히는 일을 낙으로 삼았던 것 같다. 내가 문화부에서 말석을 차지하자 그는 방송담당을 나에게 물려주고, 출판담당을 맡게 됐다. 당시 {중앙일보} 문화부에는 문인을 겸직한 기자들이 많았다. 정규웅 부장은 문학평론가였고, 문학담당인 양헌석 기자는 소설가였으니, 시인 기형도까지 합쳐서 문화부라기보다는 '문학부'였다.
정부장은 양헌석 씨로 하여금 소설을 전담케 하고, 기형도는 출판과 함께 시 분야도 맡겼다. 아마 소설과 시를 나누어서 담당기자를 배치한 경우는 한국의 신문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으리라. 정부장은 기형도와 나를 데리고 인사동의 카페 '이화'에서 자주 맥주를 사주었다. 정부장은 기형도의 잔의 술을 따라주면서 "기형도는 징징 짜는 버릇만 없으면, 참 좋은 놈인데"라고 환하게 웃으며 말하곤 했다. 당시 기형도의 입에서는 "아! 절망, 절망,"이라는 탄식어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절망은 밥을 먹을 때나, 커피를 마실 때나, 아침인사를 나눌 때나 언제 어디에서나 튀어나왔으므로, 불행하게도 나는 분수의 물줄기처럼 허공에 흩뿌려지는 그의 절망에 공감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좋은 시를 읽을 때나, 기막힌 미인을 거리에서 발견하면 "죽여준다.죽여줘"라고 했던 기억도 난다. 그는 진지하지 않게 그의 즉각적인 감정을 나타낼 때면 반복법을 구사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우울해하면 "해현씨, 절망?" 하면서 도마뱀이 꼬리를 버리듯 문장의 어미를 빼먹는 식으로 통통 튀면서 나를 달래려고 했다.(박해현)
그때까지만 해도 신문사에서 2백자 원고지에 세로로 기사를 썼는데, 그는 기사를 작성할 때 전혀 파지를 내지 않았다. 그가 일필휘지로 기사를 썼다는 것이 아니라, 한줄을 쓰다가 잘못되면, 다른 원고지에 깨끗하게 쓴 뒤 칼로 그 줄을 도려내서 먼저 쓰던 원고지에 풀로 붙였다. 자기가 쓴 기사는 물론이고, 일간지와 스포츠신문, 잡지 등에 실린 문학출판 관련기사들을 일일이 스크랩북에 오려 붙일 정도로, 그는 칼과 풀만 있으면 너무나 즐거워했다.(박해현)
88년 여름 대구, 전남 등지로 홀로 여행({짧은 여행의 기록}),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옮기다. [진눈깨비],[죽은구름],[추억에 대한 경 멸],[흔해빠진 독서],[노인들],[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물 속의 사막],[바람의 집-겨울 版書·1],[삼촌의 죽음-겨울 版書·4], [너무 큰 등받이 의자-겨울 版書·7], [정거장에서의 충고],[가는 비 온다],[기억할 만한 지나침],발표.
이때는 정말 기형도에게 시의 폭죽이 터지던 시대였다. 김현은 이미 그때 {중앙일보} 문학월평을 통해 기형도의 시에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때 기형도가 바로 월평을 담당하는 기자인데, 자신의 시가 크게 다뤄지자 당황했다. 천하의 비평가 김현이 그의 시를 호평한 것이야 감격스러운 일이었지만, 워낙 결벽증이 심했던 그인지라, 그 원고를 신문에 내는 것을 주저했다.
그래서 그는 김현에게 전화를 걸어서 우선 고맙습니다, 라고 한 뒤 '그러나'로 시작되는 말을 어렵게 꺼내야 했다. 그러나, 정말 그러나 김현은 "내가 기형을 잘 봐주려고 글을 썼다고 믿을 사람은 문단에 아무도 없을 거요. 정 싣기가 어렵다면 원고를 돌려주세요" 라고 말했다. 이미 지면은 그 자리가 비워진 채 원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던 그는 결국 정규웅 부장에게 구조신호를 보냈다. 정부장은 김현의 양해를 얻어 원고에서 기형도 부분을 맨 뒤로 돌리고 양을 줄이는 선에서 월평을 신문에 내보냈다. 소설가 강석경이 {가까운 골짜기}를 {중앙일보}에 연재했다.
기형도는 담당기자로서가 아니라, 문단의 후배로서 강석경의 원고들을 꼼꼼하게 읽고, 적절한 독후감을 작가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항상 신문기사에 일반 원칙에 따라 무미건조한 문체로 문학기사를 쓰는 것에 불만을 가졌고,{문학기행}을 통한 섬세한 문체에 세계를 보여준 김훈을 부러워했고, 존경했다.
[겨울 版書] 연작은 그가 신춘문예에 응모하던 문학청년 시절에 써놓았던 것을 다듬는 작품들이다. 그때 그는 그 시들을 보여주면서 병든 아버지와, 비닐하우스 깔려 있는 들판 한가운데의 집에 대해서, 그의 가족사에 대해서 가끔 얘기를 했다. 그는 일요일이면 집에서 돼지들에게 예방주사를 놓을 때 돼지는 어떻게 잡아야 하고, 주사는 어느 순간에 놓아야 하는가 같은 양돈기법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가끔 우리 집에 놀러와서 어린 내 딸로부터 '형도 아찌'로 불렸지만, 나는 생전에 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없다. 내가 어쩌다 데리고 가달라고 하면, "다음에, 다음에"라고만 말했다. 나는 그를 땅에 묻은 장례식이 끝난 뒤 안양에 있는, 그가 없는, 그의 집을 가봤다.(박해현)
그는 자신이 쓴 시를 대부분 외우고 있었는데 길을 걷거나 차를 마실 때 시를 하나씩 외워 보이면서 묻곤 했다. 듣는 사람의 의견에 따라 고치는 일은 드물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시가 아주 익숙한 것으로, 심지어는 듣는 사람이 자신이 쓴 구절로 착각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신의 시에 대한 완벽한 비평가, 교정자,낭독자, 창조자였다.
이때 기형도는 시인 하재봉의 주도로 매주 인사동의 까페를 전전하면서 열리던 '시운동 청문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흥미 진진했던 국회의 5공 청문회가 남긴 파장으로 몇 사람이 모였다하면 청문회라고 명명하던 때였다.
'시운동 청문회'는 신작 시집을 낸 젊은 시인을 초대해서 '시인학교'나 '淵' '평화 만들기'등의 까페에 앉아 시인이나 시인을 좋아하는 청춘들이 청문회를 벌이던 모임이었다.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초대 시인의 시집에 대한 독후감을 밝히고, 시인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지면서, 술잔을 홀짝거리던 일종의 시인 야유회(夜遊會)였다. 참석자 중에 한 사람은 그 청문회의 발언 내용을 기록했고, 그것은 하재봉이 매달 만들어냈던 '시운동' 팜플렛에 실렸다.
89년[聖誕木-겨울 版書·3],[그집 앞],[빈집],[질투는 나의 힘], [가수는 입을 다무네],[대학 시절],[나쁘게 말하다] 발표, 가을에 시 집을 출간하기 위해 준비하다.
기형도는 문학과지성사의 편집장을 맡고 있던 평론가 임우기로부터 시집을 내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빈집] 등의 신작시를 써내는 한편 습작 시절에 썼던 시들도 고쳐서 발표했다. 그는 시만 썼던 것이 아니라, 시집의 구성에 대한 시나리오도 여러 차 례 만들었다. 어깨에 멜 수 있는 그의 검은 가방 속에 들어 있던 푸른색 노트에 항상 시의 배열도를 여러 차례 그렸다.
유고시 집 [입 속의 검은 잎]은 그가 남긴 시집 배열의 원칙을 따랐다. 시집의 목차를 펼쳐보면, 그가 신문기자로 재직중일 때 썼던 시 를 한가운데 놓고, 생에 대한 환멸로 가득 찬 [안개]가 맨 앞에, 그리고 생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는 [10월] 등의 시가 뒤쪽에 서 있다. 그가 남긴 푸른 노트에는 도입부만 써놓은 시 [내 인생의 中世]가 남아 있다. 그는 세상을 뜨기 얼마 전 나에게 첫시 집 이후의 시작(詩作) 계획을 얘기하면서, [내 인생의 中世]가 어쩌면 두번째 시집의 제목이 될지 모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 다. 그가 남긴 마지막의 초고는 이렇다.
이제는 그대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지요
너무 오래되어 어슴프레한 이야기
미루나무 숲을 통과하던 새벽을
맑은 연못에 몇 방울 푸른 잉크를 떨어뜨리고
들판에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나그네가 있었지요
생각이 많은 별들만 남아 있는 공중으로
올라가고 나무들은 얼마나 믿음직스럽던지
내 느린 걸음 때문에 몇 번이나 앞서가다 되돌아오던
착한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나그네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았지요
나는 그 당시 [중앙일보]가 새로 창간한 [중앙경제신문]에 가 있었고, 그는 나 대신 방송평을 쓰다가 편집부로 가 있었다. 그가 세상을 뜨기 전날인 3월 6일, 나는 그와 앉아서 늘 하던 버릇대로 잡담을 늘어놓지 못했다. 그를 보기는 보았으나, 블라인드가 쳐진 창 문 앞에선 내 눈에는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를 끄적거리던 그의 뒷보습만 포착됐다. 가까이 다가가서 어깨를 툭 치며 농담이라도 걸까 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그것이 나와 그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박해현)
죽기 바로 전 미국에 사는 향도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는 시집 제목을 '정거장에서의 충고' 혹은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중에서 택일하겠다고 했다. 나와는 의논중이었는데 전자를 선택하기를 희망했다.
죽기 일주일 전쯤, 어느 날이었다. 함께 당구를 치던 중 한동안 기형도가 멍하니 당구대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머리 가 아프다고 했다. 집으로 가서 함께 자는데 자기 전에 "나는 뇌졸중으로 죽을지도 몰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 고 두통약 같을 것을 먹었다.
3월 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파고다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다
-- 알콜을 포함 약물 복용의 흔적이나 외상은 없고 사인은 뇌졸중으로 추정됨.(검시 의사 소견)
3월 9일 경기도 안성 소재 천주교 수원교구 공원묘지에 묻힘.
유작 [입 속의 검은 잎], [그날], [홀린 사람] 발표되다.
4월 이영준, 박해현, 원재길, 조병준, 성석제가 모여 유작시집을 내기로 하고 고인의 발표시와 미발표시 등을 모아 몇 차례 의 모임 끝에 생전에 시집을 내기로 했던 문학과지성사에 원고를 전달.
89년 4월 '시운동' 팜플렛은 89년 4월호를 추모특집으로 꾸몄다. 여기에는 김훈을 비롯 황인숙, 원희석 등의 기형도에 대 한 추억의 글이 들어갔고, 김준오.이남호.남진우 등의 일간지의 문학월평란을 통해 기형도의 시세계를 조명한 짧은 글들을 모았 다. 여기에 기형도를 아끼고 사랑했던 언론계와 인생의 선배 김훈이 쓴 글 [기형도 詩의 한 읽기]를 소개한다.
어차피 우린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 것인 가. 내 生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부분
기형도의 데뷔작인 [안개]라는 詩 속에서는 죽음이 삶 위에 포개져 있다. 죽음은 삶 위에 오우버 랩으로 겹쳐지면서 삶을 가리 우고 삶을 불가능하게 한다. 文明 속에서의 삶이란 곧, 삶과 죽음의 뿌연 혼합물일 뿐이다. 그것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뒤 엉켜 있지만, 그뒤엉킴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그 뒤엉킴 속에서 차라리 편안하다.
죽음과 삼투되어 있는 삶은 삶이 아니다. 그 것은 삶에 미달하는, 어떤 아메바의 무의미한 흐느적거림 같은 것이다. 안개는 인간을 과거와 절연시키고 미래를 지우고, 인간 과 인간의 사이의 관계를 지운다. "쓸쓸한 가축들처럼" 인간은 안개 속으로 삼투되어가는 "그 긴 방죽 위에 " 서 있다. 그 죽음의 안개가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희뿌연 것이 폭력에 찬 세계의 기본 구조를 가리워주기 때문이다. 안개가 이따금씩 쪼개질때, 그 틈 사이로 세계의 모습은 잠깐씩 드러난다.
안개가 걷히고 正年 가까이
工場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銃身을 겨눈다.
같은 詩行들이 보여주는 이 세계의 기초 폭력이나 또는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성역)이기 때문이다.
같은 詩行들이 보여주는, 무관하게 흩어져 있는 맑음과 쓸쓸함이 그 세계의 관계의 양식이다. 안개가 쪼개진 틈새로 들여다보이는 세계의 모습은 즉 죽음이다. 그 위에 다시 죽음의 안개가 겹친다. 인간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 세계와 인간 사이에 어떤 관계를 만들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안개가 그 인간과 세계 사이의 경계선을 지운다. 그 안개는 또 다른 죽음이다.
그러므로 기형도의 詩가 삶에 포개어진 죽음의 오우버 랩이라는 나의 애초의 문장은 죽음 위에 포개어진 또 다른 죽음이라는 문장으로 수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안개는 원초적인 죽음을 가리우는 또 다른 죽음이다. 그 또 다른 죽음이 인간에게는 '편안하다'. 왜 편안한가. 그 또 다른 죽음 속에서 인간을 이 세계의 폭력적 기본 구조와 아무런 관계를 설정하지 않고 단지 흘러다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형도의 詩에 자주 나오는 안개 구름 눈 그리고 추억 또는 정거장 같은 단어들은 죽음을 덮은 또 다른 죽음의 장치이거나 그 죽음과 죽음 사이를 흘러가는 표랑자와 내면일 것이다. 기형도의 어떤 詩들은 이 세상을 덮는 그 안개가 구름을 걷어내고 세계의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는 대체로 그 안개나 구름을 걷어내지 못한다. 그가 쓴 짧은 詩作노트에
모든 사물과 그것들이 빚어내는 구조 및 현상에 대한 탐구를 통하여 예술적 미학과 현실적 가치체계 모두에 접근하고 싶다.
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그의 詩 속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안개를 걷어내고, 세상의 기초가 폭력이든 허무든 간에 그것과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를 맺어보려는 말하자면, 죽음에 삼투되지 않은 그리고 죽음에 의하여 쫓겨나지 않는 삶을 세워보려는 소망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85년부터 시작되어서 89년에 끝나버린 그의 짧은 詩作의 생애를 더듬어보면, 그는 그 "현실적 가지체계 모두에 접근하고 싶은" 소망을 거의 이루지 못한다. 그는 오히려 그 현실적 가지체계에 대한 접근의 불가능을 말하고 있다. 기형도는 죽음이 서로 삼투하고 있는 구조를 세계의 한 본질적인 운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가 데뷔하기 이전인 1981년에 쓴 [밤눈]이라는 습작詩에서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가 가득 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밤눈]끝 연
같은 구절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그의 비극적 세계인식은 보다 일찍 형성되었던 것 같다. 그 습작詩 속에는 지상의 자리에 내려앉으려 하는, 그러나 내려앉지 못하고 바람에 불려 다니는 존재의 아우성 같은 것들이 들어 있지만, 그의 詩作이 계속됨에 따라서 그 아우성은 점차 소멸되고, 아우성이 소멸된 자리에 이 세계의 그로테스크한 풍경이 들어선다. 그가 그 세계의 비극 적 구조를 하나의 냉엄한 풍경으로 포착해냈을 때나 또는 세계의 구조로부터 떠나버린 인간의 내면풍경을 드러낼 때 기형도의 詩들은 일정한 성공을 거둔다. 나는 그가 세계의 구조를 풍경화함으로써 성공한 작품으로 [안개] 또는 [죽은 구름]을, 그리고 그것을 인간의 내면 풍경화함으로써 성공한 작품으로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들겠다.
[죽은 구름]이라는 詩의 구조는 그 詩가 풍경화하려는 세계의 구조를 닮아 있다. 그 구조를 뜯어보면
① "구름에 가득 찬 더러운 창문 밑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② 죽은 사내는 거지 사내다. 그 사내는 文明 또는 세계와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③ 구름은 창문으로부터 사라진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다."
처럼 세 토막의 얼개로 되어 있다. 거지 사내의 더러운 죽음 앞에서 詩人은 구름을 관찰하고 있다.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닌 구름"이 더러운 창문을 가득 메우고 있다. 구름은 사라진다. 구름이 창문을 떠나는 것은 슬프거나 기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이 세계의 것이 아니었다. 기형도는 그 구름의 사라짐을 통하여 거지 사내의 죽음자체를 無作시키고 있다. 나는 그 詩가 세 겹의 죽음으로 짜여져 있는 것으로 읽었다. 그 세 겹의 죽음이란 文明의 죽음, 文明과 아무런 관계가 없던 거지의 죽음, 그리고 그 두 개의 죽음을 동시에 無作시키는 구름의 죽음. 그의 詩 속에서는 죽음조차도 확실한 것이 아니다. 죽음조차도 또다시 없어져야 할 어떤 것이고, 그것은 기록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은 사라짐에 불과하다.
[정거장에서의 충고]는 저러한 세계로부터 밀려난 인간이 그 밀려난 세계의 극변방에서 기웃거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거장'까지만이 이 세계이고 '정거장'을 지나면 이 세계가 아니다.'정거장'은 인간이 세계로부터 밀려난 마지막 지점이지만, 인 간이 다시 세계 안으로 진입하려면 그 '정거장'을 경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정거장에서 인간은 오도가도 못하고 머뭇거리면 서 안쪽 세계의 무의미를 들여다보고 있다. 기형도는 그 '정거장'에서 정거장의 안쪽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그 밖으로 달아나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정거장'에 처한 삶 자체를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정거장'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이 세계 와의 관계위에 설정하지 못한다. 그 관계에 대한 그리움은 '추억이 덜 깬 개'의 몽롱하거나 치매한 의식 속에서 다만 가물거릴 뿐이다. 그의 정거장은 새로움 희망이나 삶의 근거라기보다는, 세계로의 재진입을 단념하거나 절망하는 몸짓으로 보인다. 모든 길들이 정거장으로 흘러들지만, 갈 수 있는 길이란 없다. 거기서 젊은 그는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라는 진술에 도 달한다.
1989년에 기형도는 [위험한 家系.1969]라는 비교적 긴 詩와 그리고 그의 유년 시절에 관한 몇 편의 詩를 썼다. [위험한 家系.1969]가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한 부분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그 詩 속에서, 또는 그의 다른 詩들의 곳곳에서 나타나는 '아버지'는 삶의 불가능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1969라는 연대가 제목에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기형도가 10세 무렵에 받아들였던 세계의 원형에 대한 기록인 것으로 보인다. 그 詩 속에서 아버지의 삶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는 끝없이 무너지고, 소년의 생명은 무너지는 아버지의 삶 위에 힘겹게 솟아오르려 하고 있다. 그 솟아오름은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 속에는 신선한 설레임이 들어 있다.
뚝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를 갖고 있다니.
같은 詩行 속에서 그 두려움과 설레임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성장함에 따라 그 설레임의 세계는 무너져버리고 그의 詩는 유년의 생명의 설레임을 더 이 상 진전시키지 않고 있다. 그는 죽음의 세계를 향해 곧바로 진입했던 것이다. 나의 이 글은 그의 유년의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는 결함을 갖는다. 그리고 그의 無展望한 비극적 세계관이 그의 文體와 결합되는 부 분을 역시 들여다보지 못하는 결함을 갖는다. 나는 누가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해주었으면 한다.
나는 기형도가 죽은 새벽의 심야극장-그 비인간화된 캄캄한 도시 공간을 생각하고 있다. 그가 선택한 죽음의 장소는 나를 늘 진저리치게 만든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러할 것이다. 그의 검은 눈썹과 노래 잘하던 아름다운 목청이 흙 속에서 이제 썩고 있는 모습도 지금 내 눈에 보인다. 형도야, 네가 나보다 먼저 가서 내 선배가 되었구나. 하기야 먼저 가고 나중 가는 것이 무슨 큰 대수랴. 기왕지사 그렇게 되었으니 뒤돌아보지 말고 가거라. 너의 관을 붙들고 "이놈아 거긴 왜 들어가 있니. 빨리 나오라니깐" 하고 울부짖던 너의 모친의 울음도, 그리고 너의 빈소에서 집단 최면식의 싸움판을 벌인 너의 동료 시쟁 이들의 슬픔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生死를 거듭하지 말아라.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다시는 삶을 받지 말 아라. 썩어서 空이 되거라. 네가 간 그곳은 어떠냐 ...... 누런 해가 돋고 흰 달이 뜨더냐.
89년 5월-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출간.제목은 시집 해설을 쓴 김현이 정함.
89년 11월 기형도가 다녔던 '연세문학회'에서 창립 30주년 기념 및 고(故) 기형도 시인 추모를 위하여 44회 연세문학의 밤을 가짐. 아래의 글은 문학회 후배들의 합평회를 거친 의견으로 회지에 수록된 글을 옮긴 것이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다소 성급한 결론일지 모르나, 우리는 우리에게 몇 연배 위의 문학회 선배이며 문단의 촉망받는 신진 시인이었던 故 기형도 學兄의 시편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하나의 무거운 '절망'을 일관되게 발견되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에 대한 몇몇 평가 작업들 속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현상적 동의들은 거의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되며, 다만 오히려 이제부터 문제가 되는 것 은 바로 이 '절망'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시인의 시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세계해석 방법, 즉 세계관을 드러낸다고 할 때 시인의 시를 이해하려는 독자 또한 그 시를 치열하게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바로 그것, 시인의 눈을 찾아내야만 할 것이 며 기형도 시인의 시세계에 대한 우리의 분석은 따라서 그의 시에서 드러나고 있는 '절망'의 정체와 질을 밝혀내는 것으로 모 아졌고 그 작업을 위해 우리는 행간 하나하나도 놓치지 말아야 했다.
일반적으로 한 인간이 가지게 되는 절망이란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계속적 발전을 가능케 하는 전망의 결여에서 연유 한다고 볼 수 있다.
기형도 시인의 시편들은 [위험한 家系.1969]를 비롯한 일련의 유년 체험기적 시들과 [오후 4시의 희망]과 같은 도시 소시민의 삶을 마치 스케치하듯 써내려간 시들, 또는 자기 고백류의 시들로 구분 할 수 있는데, 거의 일관되게 전망의 부재와 그에 따른 시인의 절망을 읽을 수 있었다.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의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
아버지는 흙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 구나.
-[위험한 家系 1969]부분
자립할 수 없는 나이의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나약한 부모의 모습, 특히 아버지라는 존재의 흔들림은 거의 치명적인 상실감으로 다가온다. 시인은 그 당시의 상실감을 "유리병 속의 알약이 쏟아지듯" "나는 이렇게 쉽게 뽑히는구나" 등의 표현을 통해 조금은 건조하면서도 풍부한 비극적 뉘앙스로 담아내고 있다. 이것은 최초의 전망부재이며, 기형도 시인의 유년 체험기들은 거의 모두 이러한 본질적 체험(아버지의 쓰러짐)의 전제 위에서 바라본 세계, 주로 가족, 친우관계, 마을 풍경 등이다.
기형도 시인에 있어서 유년기에 대한 시편은 이미 단순한 회상내지는 유년기에 대한 그리움의 차원은 아니다. 시 속의 현재적 삶은 유년기의 수평적 연장, 또는 시 속의 유년기가 현재의 시인의 삶의 수평적 연장일 수 있고 명백한 내용적 연관성으로 묶 여져 있는 것이다.
[鳥致院] 같은 시는 유년기 또는 고향과, 현재 또는 도시를 연관지어주는 끈과 같다고 볼 수 있다. [鳥致院]이 스케치하고 있 는 상황은 주로 객차 안의 암울한 분위기이며 분명 자기 자신까지도 포함될 '톱밥같이 쓸쓸해 보이는 청년들', 그들은 서울로 또 는 다시 조치원으로 내모는 그 무언가의 힘 앞에서 방황하고 불안해 하는 소도시 소시민들의 삶을 생선가시, 빵봉지, 톱밥 등에 비유해내고 있다. 이처럼 자기 존재의 본질을 깨달으면서 시인은 무서울 정도의 자기 존재의 미래에 대한, 예견력으로 다음의 무거운 절망의 진술을 뱉아낸다.
믿어주게
나도 몇 개의 동작을 배웠지
변화 중에도 튕겨나가지 않으려고
고무풀처럼 욕망을 단순화하고
그렇게 하나의 과정이 되어갔었네.
---[종이달] 부분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
한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 정연 한가
---[오후 4시의 희망]부분
전형적인 도시 소시민의 일상(주로 사무실이라는 공간 안에서 규정되는)을, 그 무의미한 행위들을 형상화하고 있는 [오후 4시의 희망]과 [종이달]을 통해 시인은 시인이 느끼고 있는 절망의 결론부를 토로하고 있다.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다가 " 가볍게 건드려도 모두 무너"질 듯한 소시민이 바로 전망이 부재함으로 인해 절망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기형도 시인이 갖게 된 절망의 원초적 근원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유년기의 경험에서 유래된,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결여의식이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몇몇 작품들 속에서 드러나듯 소시민적 삶의 전망의 부재로 곧바로 전화하게 된다. 그 속에서 자신의 모든 체험들을 시적으로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는 '질서정연'하고 결국 '예정된 모든 무너짐'을 아 프게 인정해 들어간다. 여기까지 왔을 때 시인의 절망을 극에 달한다. "나는 일생몫의 경험을 다했다"는 시인의 진술 은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그의 질투는 결여의식의 또 다른 면이라고도 할 수 있는 데, 그러한 질투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그에게 있어 더 큰 비극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특화된 경험으로서 결여의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을 해석하는 보편적인 의식으로까지 나아가 인간 ---- 특히 소시민 층 ----의 삶에 대한 전망을 바라보려 하였고, 결코 돌파구를 찾을 수 없는 깊은 내면적 절망감으로 결론을 얻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그의 시를 살펴보는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기형도 시인의 경험과 의식의 결과로 나타난 문학적 형상물을 대략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기형도 시인 의 '절망'이 유년기 체험을 통한 결여의식과 소시민의 전망부재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한계내 에서 그는 자신의 시세계를 충실하게 구축하였다. 그러나,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 결여의식의 형상화 자체라는 단계를 극복 하지 못하고 이제 막 현실적 삶 속에서 절망의 늪을 벗어나려는 문학적 과정에서 그가 삶을 마쳐야만 했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절망 속으로 ---- 故 기형도 학형의 작품세계], 연세문학회)
90년 1월 이영준, 박해현, 원재길, 조병준, 성석제가 모여 1주기를 앞두고 산문집을 출간하기로 하고 자료를 모아 도서출판 살림에 전달,
90년 3월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살림)출간.
3월 6일 1주기를 맞아 혜화동 시문화회관에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대한 공개 서평과 추모시 낭독, 하재봉의 추모시 낭송 퍼포먼스 등이 있었다. 아래 글은 당시 발표된 작품론 중의 하나, [유년의 죽음 혹은 공포의 형식](이영준)이다.
한 시인이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라고 말할지라도 우리는 흔히, 그 말이 '방법론적 비유'가 아닐까 생각하고, 그가 왜 인생을 증오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자 하며, 그 이유가 심각하고 고통스런 과정을 통한 것일수록, 우리는 그만큼 인생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으로 여기고 그 과정을 추적해나가는데 익숙하다.
그러나, 기형도의 경우, 그의 시집을 일관하는 '비극적 세계관'은 살아남은 자들의 변증을 거부하고 닫혀버렸다.
이 세계의 불모성에 대한 그의 환멸은 너무나 끔찍한 것이어서 '방법론적 비유'라고는 언뜻 생각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있 다.
그는 詩作 메모에서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믿는다"고 알리바이로 남겨놓았지만 시집 전체에서 그가 사용한 자연의 비유어들 ---- 안개, 구름, 바람, 나무, 풀, 잎 ----은 주로 이 세계의 긍정, 화해, 친화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 니라 부정, 공포, 죽음의 이미지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물론 우리 시대의 시에서 시적 자아와 세계 간의 不和는 거의 보편화된 의식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불평이 아니라, 죽음의 예감이 아니라 죽음의 직시라는 데 있으며 또한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는 도저한 비극적 세계인식 그 자체 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는 시적 형식에 있다.
그의 시적 형식을 일러 김현은 시집 해설에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으로 명명했거니와 그가 직시한 그 자신의 혹은, 우리 시 대의 죽음 현상은 기형도로선 빠져나오기 힘든 질곡이었는지 모른다.
초기시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가족사적 불행은 그로 하여금 이 세계와의 화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였던 것으로 보 인다. [위험한 家系.1969]는 유년 시절을 다루면서 그가 가진 세계관의 단초를 드러낸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유리병"은 [어느 푸른 저녁]에서 "공기는 푸른 유리병"으로,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은 [안 개]에서 "노랗고 딱딱한 태양"으로,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하시고 굳은 혀"는 [입 속의 검은 잎]에서 "나의 혀는 굳어갔다", [정거장에서의 충고]에서는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로 나타난다. 사실 이러한 점은 기형도의 시집을 조금만 주의깊게 읽으면 금방 드러나는 것이다.
그는 한정된 몇 개의 시적 모티브를 반복해서 사용한다. 대강 눈에 띄는 것만 간추려도 '안개' '구름' '정지' '딱딱함' '은빛' '얼음' '갇힘' '늙음' '죽음' 등은 그의 미발표작에서부터 줄기차게 반복된다. 하나의 시가 다른 시들의 합집합을 이루는 이런 반복은 우수한 시인의 경우엔 희귀한 것이 아닐까.
그의 시들은 수없이 수정되고 교체되고 교환되고 재조립된다. 그가 그리 많지 않은 시적 모티브를 집중한 곳은 바로 '죽음'이 며, "죽은 맨드라미같이 빨간 내복을 내보이는 누이"의 죽음과 중풍으로 쓰러지신, '굳은 혀'의 아버지가 지배하는 그의 유년의 기억은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휘젓고 다니는 망령이며 도망칠래야 도망칠 수 없는 견고한 城이었다.
그가 겨우 숨은 곳은 어둠이고 책이고 교회다. 그의 시에서 유례없는 평안함을 보이는 [숲으로 된 성벽]과 [집시의 시집]은 그 의 시에서 종종 내비치는, 독서와 교회에 의한 엑조티시즘이다.
유심히 보면 그가 애착을 가진 '신성한 저녁'의 '촛불'은 책의 공간이지 노란 해가 뜨는 대낮의 현실이 아니었다. 그는 창문 을 통해 세상을 보는 습관을 길렀으며 그는 언제나 갇혀 있거나 정지해 있다.
이렇게 보아오면서 짚이는 데가 있다. 아, 그는 어린애였다!
그는 그가 통과한 궁핍과 끔찍한 불행의 유년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닫힌 세계를 살다간 것이다. 그가 그토록 두려워한 바깥세상은 그에겐 죽음의 형식으로 보였지만 나에겐 그의 세계가 죽음의 형식으로 보인다.
그의 상상력은 집요하게 유년의 체험을 파고들면서 하나의 닫힌 세계를 이룩했다. 그의 동일 이미지 반복은 시기가 지날수록 중첩에 의해 강화된다. 돌연한 이미지, 갑작스런 이질적 문장의 삽입, 도치, 콤마에 의한 분리, 감정의 고조(그는 감탄사를 연 발한 드문 경우의 시인이었다)등은 터지기 직전의 공 속의 상태를 연상시킨다. 그의 유난히 예민한 감각은 그 죽음의 집의 기 록을 놓치지 않는다. 그의 화려한 수사는 무성한 검은 잎들로 보인다.
그 속에서 [안개], [어느 푸른 저녁], [정거장에서의 충고] 같은 탁월한 시를 썼지만 그의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렸던 그 황량한 기억을 떨치지 못하고 그는 갔다. 그의 그 오랜 삶에의 공포는 그를 노인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늙은이를 싫어했다.
그의 죽음 직전에 발표된 [그집 앞],[빈집],[질투는 나의 힘], [가수는 입을 다무네] 등은 그 시들이 발표된 시기 때문에 나에 게 이상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제일 마지막 작품, 군데군데 고치는 중이었고 미처 타자로 옮기지 못하고 육필 로 남은 것을 수습한 [그날]은 얼핏 '백발의 노인'이 되어버린 그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거의 같은 시기에 씌어졌고 사후에 발표된, [입 속의 검은 잎]은 광주를 염두에 둔 것이며 [흘린 사람]은 우리 시대의 제도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점을 생각 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그는 출구의 문지방을 넘다가 쓰러진 것이다.
93년 10월 이영준, 박해현, 원재길, 조병준, 성석제 등은 기형도의 5주기 전에 그의 시가 가지는 의미와 그 동안의 평가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책을 내기로 하고 몇 차례 회합 끝에 내용을 취합, 솔출판사에 자료를 전달.
94년 2월 기형도의 미발표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시, 소설, 산문 그리고 기억을 담은 책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를 솔출판사에서 내다.
이전에 작성된 기형도의 연보는 시집과 산문집에 작성된 두가지다. 기형도가 생전에 쓰던 자신의 이력은 이렇다.
"1960년 경기도 연평 출생. 연세대 정외과 졸.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기형도 [1960 ~ 1989]
■ 프로필
1960년 경기도 연평 출생, 연세대학교 정외과 졸업
1984년 중앙일보사 입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등 근무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안개' 당선
1989년 3월 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
▶ 대표작
빈 집 /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 나리 나리 개나리 / 聖 誕 木 / 병(病) / 봄날은 간다 / 안 개 / 대학 시절 / 늙은 사람/ 진눈깨비 /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 가는 비 온다 / 입 속의 검은 잎 / 포도밭 묘지2 / 그집 앞 / 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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