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 초상화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본명은 초희(楚姬)[1]로, 호는 난설헌(蘭雪軒)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생애
1563년 명종 18년 강릉 초당 생가에서 당대의 석학인 초당 허엽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1570년 선조 3년, 8세 때 '광한전백옥루 상량문'을 지었다.
1577년 선조 10년, 15세 때 안동김씨 가문의 김성립에게 출가를 하게 된다.
1580년 선조 13년, 18세 때 아버지 허엽이 상주에서 객사했다.
1580년 선조 15년, 20세 때 전 해 1579년 딸을 잃고나서 또한 아들 희윤을 잃는다. 곡자를 자식을 잃은 슬픔을 애닳게 그린 시이다.
1583년 선조 16년, 21세 때 둘째 오빠 허봉이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이이를 탄핵했다가 귀양을 가게 된다.
1588년 선조 21년, 26세 때 둘째 오빠 허봉이 금강산에서 객사한다.
1589년 선조 22년,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경기도 광주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묻히게 된다.
1589년 선조 22년, 남편 김성립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남양홍씨와 재혼한다.
1590년 선조 23년, 동생 허균이 친정에 있던 난설헌의 시를 모아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고 유성룡에게 서문을 받았다.
1592년 선조 25년, 남편 김성립이 임진왜란에 참가하여 전사한다.
1598년 선조 31년, 허균이 정유재란 때 원정나온 명나라 오명제에게 난설헌의 시 200여편을 전해주어 이 시가 명나라에서 편찬한 《조선시선》, 《열조시선》 등에 실렸다 .
1606년 선조 39년, 허균이 명나라 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전해주어 《난설헌집》이 명나라에서 간행되었다.
1607년 선조 40년, 4월 허균이 《난설헌집》을 목판본으로 출판하였다.
1711년 일본에서 분다이야 지로베이에 의해 《난설헌집》간행.[2]
현재 허난설헌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산 언덕 안동김씨 묘역에 있다. 1986년 5월 7일 경기도 기념물 제 90호로 지정되었다.
작품 - 그림
《앙간비금도》
《묵조도》
작품 - 난설헌시(蘭雪軒詩)
오언고시에는 소년행(少年行), 감우사수(感遇四首), 곡자(哭子), 견흥팔수(遣興八首), 기하곡(寄荷谷) 등 총 15수의 시가 있다.
칠언고시는 총 여덟 편으로 동선요(洞仙謠), 양지붕선화가(梁指鳳仙花歌), 망선요(望仙謠), 상현요(湘絃謠), 사시사사수(四時詞四首)
오언율시는 총 여덟 편으로 출새곡이수(出塞曲二首), 효이의산체 이수(效李義山體二首), 효심아지체 이수(效沈亞之體 二首), 기녀반(寄女伴), 송하곡적갑산(送荷谷謫甲山) 등이 있다.
칠언율시는 총 13편으로 춘일유회(春日有懷), 차중씨견성암운 이수( 次仲氏見星庵韻 二首), 숙자수궁증여관(宿慈壽宮贈女冠), 몽작(夢作), 차중씨고원망고대운 사수(次仲氏高原望高臺韻 四首), 송궁인입도(送宮人入道), 제심맹조중연풍우도(題沈孟釣中溟風雨圖), 황제유사천단(皇帝有事天壇), 차손내한북리운(次孫內翰北里韻) 등이 있다.
그 외 오언절구 24수와 칠언절수 총 142구가 있다.[3]
작품 세계
동생의 재능을 알아본 오빠의 배려로 글을 배웠다. 어른이 되었을 때 가난한 집 아씨는 열심히 옷을 만들어도 그 옷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서 사회의 불공평을 비평하는 사회비평, 도교적인 가치관등 다양한 가치관을 표현,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 역사학자 이덕일은 허난설헌의 시를 임금노동자는 그가 생산하는 소유물을 갖지 못한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과 비교할 정도로 허난설헌의 재능을 극찬하였다.[4]
하지만 아버지가 병에 걸려 서울로 올라오다 상주 객관에서 죽었으며, 오빠 허봉이 정치적인 이유로 귀양 갔다가 유배가 풀린 뒤에도 서울에 돌아오지 못하고 방랑하다 금강산 근방에서 죽고, 어머니가 전라도 진산에서 여행하다가 소화불량으로 객사했으며, 아들과 딸을 일찍 잃고, 죽기 얼마 전에는 뱃속의 아기까지 잃는 등 불행한 일도 많이 겪었다. 많은 작품을 생전에 태워버렸으나, 세상을 떠난 후 동생 허균이 이전에 베껴 놓은 것과 기억에 남은 것을 모아 그녀의 시를 《난설헌집》로 펴내 지금까지 전한다.
가족 관계
아버지 허엽(許曄,1517~1580)은 호가 초당(草堂)이며, 서경덕의 문인이며 경상도관찰사를 지냈고, 동인의 영수가 된다.[5] 첫째 부인 한씨와의 사이에 두 딸과 큰 아들 성(筬)을 두고, 둘째 부인 김씨와의 사이에서, 봉과 난설헌, 균의 2남 1녀를 두었다.
어머니는 후취인 강릉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 광철(光轍)의 딸이다.
큰오빠 허성(許筬, 1548~1612)은 자는 공언(功彦)이며, 호는 악록(岳麓) 또는 산전(山前)으로 불리웠다. 1583년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를 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1590년에는 왜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결성되었는데, 이때 허성도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같이 통신사로 갔던 김성일 등의 동인은 전쟁에 대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허성은 동인임에도 불구하고 서인이었던 황윤길의 주장에 찬성을 하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난 후 1594년 이조참의로 승진되었으며, 이어 이조참판과 전라도안찰사를 거쳐, 예조판서, 병조판서,이조판서에 까지 요직을 두루 거쳤고, 1607년 선조의 유교를 받게 되어서 세인들이 고명칠신이라 칭했다. 저서로는 《악록집(岳麓集)》이 있다.[6]
둘째 오빠 허봉(許篈, 1551~1588)은 호가 하곡(荷谷)이며, 자는 미숙(美叔)이다. 유희춘의 문인으로 허난설헌의 재능에 가장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1572년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74년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자청하여 명나라에 가서 기행문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썼다. 1575년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3년 창원부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선봉이 되어 서인들과 대립하였다. 1584년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던 병조판서 율곡 이이의 직무상 과실을 들어 탄핵을 하였다가 종성에 유배되었고, 1585년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방랑생활을 하다가 38세의 나이로 금강산에서 객사하였다. 저서로는 《하곡집》등이 있다.[7]
동생 허균(許筠, 1569~1618)은 호가 교산(蛟山)이며, 동복 형제이다.
<위키백과>
난설헌 시문집
허난설헌의 생애와 작품세계
1. 허난설헌의 생애
난설헌은 고려 말의 유명한 재상인 陽川 許氏 文敬公 許珙(양천 허씨 문경공 허공)의 혈통을 이어, 선조 때의 석학인 草堂 許瞱(초당 허엽)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큰오빠인 허성과 두 언니는 허엽의 전처인 韓氏에게서 태어났으며, 허봉과 허균과 난설헌은 후처인 金氏에게서 태어났다. 그런데 김씨의 소생인 삼남매가 문학적인 감수성을 타고났으며, 남다르게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부딪히다가 모두 일찍 죽었다. 난설헌의 이름은 楚姬(초희)이고, 자는 景樊(경번), 난설헌은 그의 호이다. 여자로서 남자처럼 이름과 자와 호를 아울러 가진 것은 드문 경우이다. 경번이라는 그의 자는 중국 초나라의 樊姬(번희)를 사모하여 지은 것이다.
1563년에 태어나 문장가였던 아버지와 오빠들 사이에서 자라나 자연스럽게 글을 배웠다. 특히 아버지가 퇴계뿐만이 아니라 화담 서경덕에게서도 글을 배웠으므로, 그의 집에는 도교에 관한 서적들도 많았으며, 난설헌은 특히 『太平廣記』(태평광기)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난설헌은 그 책들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신선 세계에 접근할 수 있었다. 화담의 제자 가운데 神仙術(신선술)을 닦았던 문인들이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난설헌이 후기에 신선세계로 눈을 돌린것은 자연스러운 변모였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자주 신선세계를 상상했으며, 여덟살 때 지었다는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은 그의 독서와 상상이 만난 뛰어난 문학작품이다.
난설헌은 14,15세쯤에 시집을 갔는데, 기록은 확실치 않다. 안동 김씨 명문이었던 金誠立(김성립)의 집안은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다. 그러나 정작 남편 김성립은 난설헌이 죽던 해에야 겨우 문과에 급제하여 정9품 홍문관 정자로 족보에 기록된 평범한 남자였다. 이러한 부부상의 차이 때문에 부부는 자연히 금슬이 좋지 않았으며, 김성립은 가정 바깥으로만 떠돌았다. 과거 준비를 한다는 핑계 때문이었지만, 들려오는 소문은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방탕하게 지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혼중의 아내가 남편을 그리워하며 지어 보낸 시가 〈방탕스러운 데에 가까우므로 시집에 싣지 않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난설헌이 살았던 시대는 비인간적인 시대였다. 그래서 그는 오지도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그의 시들은 지어졌다. 그러다가 이토록 비인간적인 현실을 떠나서, 그는 신선세계로 눈을 돌렸던 것이다.
난설헌은 말년에 후원에다 별당을 지어놓고 화판을 쓰고 선녀처럼 살면서 늘 신선세계를 꿈꾸며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꿈속에서 신선세계에 올라갔다가 자기가 죽을 꿈을 꾸었다. 난설헌이 일찍이 月星(월성)이 韻(운)을 부르며 시를 지으라 하므로 〈아리따운 연꽃 스물 일곱 송이 분홍 꽃 떨어지고 서릿발은 싸늘해라〉라는 시를 지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그 경치가 하나하나 상상되므로 「夢遊記」(몽유기)를 지었다. 그 뒤에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의 수(3X9=27로 27세를 뜻함)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하고는 유연히 눈을 감았다. 이 시는 문집에 들어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난설헌은 문학적 상상력만이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신선술도 닦아 초인적인 계시력을 지녔던 것 같다. 그의 무덤은 그보다 일찍 죽은 두 아이의 무덤과 함께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경수마을에 있으며, 그의 남편은 그와 다른 방향에 후처와 함께 묻혀 있다.
2. 허난설헌의 작품세계
동요하는 불안의식
난설헌의 시에 나타나는 의식세계는 언제나 동요한다. 물과 생명, 물과 고뇌, 물과 순수 등의 정신적인 작용에 의하여 동요가 일어난다. 특히 흔들리는 물이 상징하는 여성적인 것은 난설헌의 의식세계에서 지배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흔들리는 물은 마차나 수레와 같은 흔들림의 감각으로 영상화되기도 한다. 그리고 일상생활의 불안의식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는 깊고 오묘한 물의 정화작용과도 관계가 있다. 이것은 여행의 영상작용도 하고있다.
이러한 흔들림은 난설헌이 처하여 있는 봉건사회의 규범 속에서 소외된 규방생활의 불안의식을 반영한다. 이와 같은 불안의식은 다시 恨의 세계로 구체화하는데, 이때에 이상향에 이르기 위한 교통수단은 배나 마차보다도 동물을 이용하는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꿈과 상승 이미지
난설헌이 마지막으로 지었던 「夢遊廣桑山時(몽유광상산시)」는 난설헌이 꿈에 신선이 살고있는 광상산에 올라가 노닐면서 지은 시이다.
夢遊廣桑山時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여기서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는 난설헌의 분신이다. 떨어지는 꽃송이는 하강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난설헌의 원초적인 공포, 우울, 시름의 불안의식이 죽음의 영상화 작용을 한 것이다. 또한 하강의 이미지는 난설헌의 시에서 〈복사꽃이 진다, 오동나무 잎이 진다, 계수나무 꽃이 진다, 눈이 내린다, 비가 내린다, 구름이 날아 내린다, 이슬에 젖는다, 선녀가 내려온다〉등등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물질적 상상세계의 물과 역동적 상상세계의 공기와의 상호작용에서 빚어진 것이다. 사람은 꿈을 떠나서 살 수 없지만, 현실을 떠나서도 살 수 없다. 꿈과 현실세계는 함께 하고 있다. 난설헌의 경우에 꿈은 공간작용에 의하여 놀이의 방향에 모든 존재를 확대시킨다 . 제목만 보더라도, 난설헌의 시에서는 꿈을 다룬 시들이 많다.
눈물과 헌신의 미학
난설헌의 내면공간에 눈물의 영상은 타는 가슴, 붉은 가슴, 꽃줄기 등으로 나타나며, 헌신의 미학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헌신의 영상은 이별과 기다림의 내면공간 속에서 소리의 영상으로도 확충된다.
閨怨(규원)
비단띠 비단치마 위에서 눈물자국이 겹쳤으미
해마다 봄풀을 보며 님 오시길 그렸기 때문일세
거문고를 옆에 끼고서 강남곡을 뜯어내니
배꽃은 비에 지고 한낮에도 문이 닫혔네
가을 깊은 다락엔 달이 떠오르고 구슬 병풍은 비었는데
서리 내린 갈대밭에는 저녁 기러기가 내려앉네
마음 기울여 거문고를 타고 님은 오시지 않고
들판 연못 위에는 연꽃만 하염없이 떨어지네
규방에서 원망하며 흘리는 눈물은 더욱 열기가 되어 피보다 짙은 난설헌의 근원이 된다. 비단 치마폭에 겹겹이 얼룩진 눈물은 사모하는(이별하는)마음과 원모하는(기다리는)마음으로 나타나며, 순수한 서정으로 희생과 헌신, 절제와 참음의 영상으로 승화되어 간다.
난설헌의 〈나르시시즘〉
난설헌의 의식공간 속에는 언제나 여성 상징의 물과 꽃의 세계가 충만하고 있으며, 특히 色相詩語(색상시어)가 많이 나타난다. 이 중에서도 赤적․黃황․靑청․白백의 색상이 가장 많이 드러난다. 푸른 색상이 또한 붉은 색상보다 많이 표출된다.
푸른 용․푸른 사슴․푸른 난새․푸른 구름․푸른 달․푸른 안개․푸른 노을․푸른 무지개․푸른 은하수․푸른 이끼․푸른 동산․푸른 주머니․푸른 기와집․푸른 깃옷․푸른 대나무 등등의 색채어가 「유선사」 87수에 모두 나타나고 있으며, 그 밖의 작품에서도 많이 표출된다. 이러한 청색상은 근원적이고 보편적이며 신선하고 순수한 것으로 영상 된다.
난설헌의 나르시시즘은 동양적인 정취와 그의 여성성으로 꽃을 통하여 잘 나타나고 있다.
感遇(감우)
싱싱하게 자라난 창가의 난초
줄기와 잎새가 그리도 향그러웠건만
가을바람 한바탕 흔들고 가니
가을 찬서리에 서글프게도 떨어지네
빼어난 맵시 시들긴 했어도
맑은 향기 끝끝내 가시진 않으리라.
너를 보고 내 마음 몹시 언짢아
눈물이 흐르며 소매를 적시네
마치 고결한 난초를 자기의 분신처럼 생각하고 자기의 삶과 대응시키면서 꽃다운 젊음의 정한을 난초에 비유하였다. 그는 상실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감당할 길 없어서, 분방한 의식공간 속에다 꽃으로 펼친 것이다. 이러한 난초는 그의 이름 그대로 사대부 집안에 태어나 정결하게 살았던 그의 표상이 된다.
난설헌의 〈콤플렉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실린 시화처럼, 그는 신혼시절에 글공부하는 남편과 줄곧 떨어져 살았다. 그래서 남편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를 세상사람들은 음탕하여 시집에 싣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이처럼 난설헌을 둘러싼 봉건적 상황이 그의 첫 번 째 콤플렉스였다. 또한 조선사회에 태어난 것에 대하여 그는 많은 고민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난설헌의 三恨이다.
첫째, 이 넓은 세상에 하필이면 조선에 태어났을까?
둘째, 하필이면 왜 여자로 태어나서 아이를 갖지 못한 서러움을 지녀야 하나?
셋째, 수많은 남자 중에서 하필이면 왜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
이것은 난설헌의 집안이 조선조 시대를 통틀어 으뜸가는 문장가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貧女吟(빈녀음)」같은 시가 능력이 있으면서 가난해서 시집도 못 가는 노처녀의 한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능력이 있어도 인정받지 못하는 조선조의 현실 속에 자기 모습을 한탄한 시이다. 게다가 금슬이 나쁜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어려서 죽어버리자, 이러한 모든 콤플렉스들이 겹쳐서 恨과 기다림의 문학으로 승화되었으며, 결국 한 여자의 힘으로는 현실을 극복하지 못할 것으로 알았기에 신선세계로 지향했던 것이다.
<출처:http://www.uriul.or.kr>
허난설헌 작품(시)
허난설헌(1563~1598)의 난초 그림과 시
난초향기
誰識幽蘭淸又香 수식유란청우향
年年歲歲自芬芳 년년세세자분방
莫言比蓮無人氣 막언비련무인기
一吐花心萬草王 일토화심만초왕
그 누가 알리요, 그윽한 난초의 푸르름과 향기
세월이 흘러도 은은한 향기 변치 않는다네
세상 사람들이 연꽃을 더 좋아한다 말하지 마오
꽃술 한번 터뜨리면 온갖 풀의 으뜸이오니.
<자료출처;고려대학교 한국화회>
哭子(곡자) - 아들을 잃고 통곡하다
去年喪愛女(거년상애여) 지난 해 사랑하는 딸을 잃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엔 아끼던 아들을 보내었네.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슬프고 슬프다, 이 광릉땅에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두 개의 무덤이 마주 서 있네.
肅肅白楊風(숙숙백양풍) 백양(白楊)나무 숲엔 쓸쓸히 바람 불고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도깨비불은 송추(松楸)에서 번쩍인다.
紙錢招汝魂(지전초여혼) 지전(紙錢)으로 너의 혼을 부르고
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 현주(玄酒)를 너의 무덤에 뿌린다.
應知兄弟魂(응지형제혼) 응당 너희 남매의 혼은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밤마다 서로 좇으며 놀리라.
縱有腹中孩(종유복중해)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다한들
安可冀長成(안가기장성) 어찌 장성하기를 바랄 수 있으리.
浪吟黃臺詞(낭음황대사) 아무렇게나 황대사(黃臺詞) 읊으며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피눈물 흘리며 소리낮춰 슬피 운다.
註
1)광릉: 경기도 광주(난설헌의 媤家)의 공동묘지.
2)백양: 백양목을 말하며 흰색의 백양목은 죽음을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3)송추: 공동묘지의 또 다른 별칭.
4)지전: 종이돈으로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원혼을 부를 때 사용한다.
5)현주: 정화수로 아이무덤에 술대신 사용한다.
6)종유: 부사로 비록이란 뜻이다.
7)안가: 부사로 어찌란 뜻이다.
8)황대사: 자식을 죽인 어미를 자책하는 노래
황대사(黃臺詞)
황대 아래 외 심으니,주렁주렁 외가 익네.
첫 번째 외는 좋다고 따내고 두 번째는 아직 여리다 솎아내고
세 번째는 맛이 좋다 또 따내고 네 번째는 덩굴채 걷어 가네.
種瓜黃臺下
瓜熟子離離
一摘使瓜好
再摘令瓜稀
三摘尙云可
四摘抱蔓歸
당 고종(高宗)의 아들이 여덟인데, 위로 넷은 천후(天后)의 소생이다.
맏인 홍(弘)을 태자로 삼았으나, 계후(繼后: 두 번째 왕비)가 시기하여 독살하게 되자,
둘째인 현(賢)을 태자로 세웠다.
그러나 현은 수심에 가득 차 말이 없고, 이 노래를 지어 악공에 주어 부르게 하여,
상(임금)과 후(왕비)의 깨달음을 얻으려 했으나,
그도 결국 쫓겨나 죽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몽유광상산시(夢遊廣桑山詩)
碧海浸瑤海(벽해침요해)
靑鸞倚彩鸞(청란의채란)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넘나들고
달빛은 서리위에서 차갑기만 하구나
이해와 감상
광상산은 신선들이 산다는 상상의 산으로
꿈속에서 찾아가 노닐며 쓴 시다
기하곡(寄何谷) - 오빠 하곡에게
暗窓銀燭低(암창은촉저) : 어두운 창에 은촛불 나직하고
流螢度高閣(유형탁고각) : 반딧불은 높은 누각을 날아다닌다
悄悄深夜寒(초초심야한) : 근심스런 깊은 밤은 차가워지고
蕭蕭秋落葉(소소추낙엽) : 쓸쓸히 가을 낙엽만 지네
關河音信稀(관하음신희) : 오라버니 계신 변방에서 소식 없어
端憂不可釋(단우불가석) : 근심스런 이 마음 풀 수가 없어요
遙想靑運宮(요상청운궁) : 아득히 가 계신 청운궁을 생각하니
山空蘿月白(산공나월백) : 산은 비어있고 담쟁이 덩굴에 달빛만 밝다
고객사(賈客詞) - 바다 상인의 노래
掛席隨風去(괘석수풍거) : 돛을 올리고 바람 따라 가다가
逢灘郞滯留(봉탄랑체류) : 여울 만나면 그곳에 머문다네
西江波浪惡(서강파랑오) : 서강의 풍량이 거세어지니
幾日到荊州(기일도형주) : 몇 일이 지나야 형주 땅에 닿을까
貧女吟(빈녀음) - 가난한 처녀의 노래
手把金剪刀(수파금전도) : 손에 바늘을 잡고
夜寒十指直(야한십지직) : 밤이 차가워 열 손가락 곧아온다
爲人作嫁衣(위인작가의) : 남을 위해 혼수 옷 지을 뿐
年年還獨宿(연년환독숙) : 해마다 독수공방 신세라네.
送荷谷謫甲山(송하곡적갑산) - 갑산으로 귀양가는 오라버니 하곡에게
遠謫甲山客(원적갑산객) : 멀리 갑산으로 귀양가는 나그네 우리 오빠
咸原行色忙(함원행색망) : 함경도 고원 길에 행차가 바쁘리라
臣同賈太傅(신동고태부) : 귀양가는 신하는 충신 가태부와 같다지만
主豈楚懷王(주기초회왕) : 귀양보내는 입금이야 어찌 어리석은 초회왕이랴
河水平秋岸(하수평추안) : 강물은 가을 강 언덕에 잔잔하고
關雲欲夕陽(관운욕석양) : 변방 함경도의 산 구름 석양에 물들겠지
霜楓吹雁去(상풍취안거) : 서릿발 찬 바람에 기러기 나는데
中斷不成行(중단불성행) : 중간에서 못가고 돌아 왔으면
閨情(규정) - 여자의 정
妾有黃金釵(첩유황금채) : 제에게 황금 비녀 하나 있는데
嫁時爲首飾(가시위수식) : 시집 올 때 머리에 꽂았던 것입니다
今日贈君行(금일증군행) : 오늘 그대의 행차에 드리오니
千里長相憶(천리장상억) : 천리 먼 길에 오래도록 기억해 주소서
채연곡(采蓮曲) - 연꽃을 따며 부르는 노래
秋淨長湖碧玉流(추정장호벽옥류) :
가을은 맑고 긴 호수엔 벽옥 같은 물 흐르고
荷花深處繫蘭舟(하화심처계난주) :
연꽃 우거진 곳에 아름다운 목련배 매여 있어요
逢郞隔水投蓮子(봉랑격수투연자) :
임을 만나 물 사이로 연밥을 던지다가
遙被人知半日羞(요피인지반일수) :
멀리 사람들이 알아보아서 반나절이 부끄러웠소
이해와 감상
采蓮曲 : 采ㅡ풍채 채. 캐다.
蓮ㅡ연밥 연(련). 연(연꽃과의 여러해살이 수초)
<연밥을 따며 부르는 노래. 연꽃을 따며 부르는 노래>
秋淨長湖碧玉流 : 秋淨長湖ㅡ가을에 긴 호수가 맑다.
碧玉流ㅡ벽옥이 흐르다. 즉 벽옥 같은 물이 흐르다.
<가을에 긴 호수가 맑고 벽옥 같은 물이 흐르다.>
荷花深處繫蘭舟 : 荷ㅡ멜 하. 연. 荷花ㅡ연꽃
深處ㅡ깊숙한 곳 繫ㅡ맬 계. 매다.
蘭ㅡ난초 난(란). 난초. 목련. 蘭舟ㅡ목란배. 아름다운 배.
<연꽃 핀 깊은 곳에 아름다운 배를 매다.>
逢郞隔水投蓮子 : 逢ㅡ만날 봉 郞ㅡ사내 랑(낭). 사내. 남편. 낭군.
隔ㅡ사이 뜰 격. 사이 뜨다. 蓮子ㅡ연꽃의 열매. 연밥.
<임을 만나 물 사이로 연밥을 던지다.>
遙被人知半日羞 : 遙ㅡ멀 요. 멀다. 멀리. 被ㅡ입을 피. 입다. 받다.
(어떤 명사(名詞) 앞에서 동작(動作)을 받거나 입는 뜻을 나타내는 말.)
半日ㅡ한나절 羞ㅡ부끄러울 수. 부끄러워하다. 부끄럼.
包羞忍取是男兒ㅡ<題烏江亭 (제오강정)>//杜牧 (두목)>에 나오는 詩句.
부끄럼을 용납하고 치욕을 참는 것이 진정한 남아로다.
<멀리서 사람들이 알게 될까 반나절을 부끄러워하다.>
<출처: Mountain 4U>
허난설헌의 묵조도
寄夫江舍讀書 (기부강사독서)
燕掠斜詹兩兩飛 연략사첨양량비
落花요亂撲羅衣 낙화요란박나의
洞房極目傷心處 동방극목상심처
草綠江南人未歸 초록강남인미귀
멀리서 공부하는 남편에게 부친다.
제비는 처마 비스듬히 짝지어 날고,
지는 꽃 어지럽게 비단옷 스치네.
규방에서 기다리는 마음 아프기만 해,
강남에 풀 푸른데 임은 돌아오지 않네.
이해와 감상
寄夫江舍讀書 : 寄ㅡ부칠 기 夫ㅡ지아비 부. 남편.
寄夫ㅡ남편에게 부치다. 江舍ㅡ강가의 집. 강가에 있는 공부방.
<강가에 있는 공부방에서 책을 읽는 남편에게 부치다.>
燕掠斜詹兩兩飛 ; 燕ㅡ제비 연 掠-홱 채갈 약(략) 노략질할 약.
燕掠ㅡ제비가 홱 채다. 斜ㅡ비낄 사. 비스듬하다. 詹ㅡ처마 첨
斜詹ㅡ처마를 비스듬히 兩ㅡ두 양(량). 짝 兩兩ㅡ짝 짝이.
<제비가 처마를 비스듬히 홱 채면서 짝을 지어 날다.>
落花요亂撲羅衣 : 요ㅡ다스릴 료(요). 어지럽다. 亂ㅡ어지러울 란(난)
요亂ㅡ시끄럽고 어지럽다. 撲ㅡ부딪칠 박 羅ㅡ벌릴 라(나). 비단.
羅衣ㅡ비단옷 <낙화는 어지러이 비단옷에 부딪치다.>
洞房極目傷心處 : 洞ㅡ골 동. 고을. 굴. 洞房ㅡ규방. 極ㅡ극진할 극
目ㅡ눈 목. 보다. 極目ㅡ눈으로 볼 수 있는 한계(限界)까지 한없이 봄.
傷心ㅡ속을 썩임. 마음을 상함.
<규방에서 마음이 상한 곳을(마음이 상하여) 한없이 보다.>
草綠江南人未歸 : 草綠ㅡ풀이 푸르다 人ㅡ여기서는 임.
未歸ㅡ아직 돌아오지 않다.
<강남에 풀은 푸르건만 임은 아직 돌아오지 않다>
<출처: Mountain 4U>
야야곡(夜夜曲) - 깊은 밤의 노래
玉淚微微燈耿耿(옥루미미등경경) :
옥 같은 눈물 찔금찔금 , 등잔불 깜박깜박
羅瑋寒幅秋宵永(라위한폭추소영) :
비단 휘장 싸늘하고 가을밤은 길기도 하다
邊衣裁罷剪刀冷(변의재파전도냉) :
변방에 보낼 옷 다 짓고 나니, 싸늘해진 가위
滿窓風動芭蕉影(만창풍동파초영) :
바람 따라 움직이는 파초 그림자만이 창을 채우네
山嵐 (산람) - 산아지랑이
暮雨侵江曉初闢 모우침강효초벽
朝日染成嵐氣碧 조일염성남기벽
經雲緯霧錦陸離 경운위무금륙리
織破瀟湘秋水色 직파소상추수색
隨風宛轉學佳人 수풍완전학가인
畵出雙蛾半成蹙 화출쌍아반성축
俄然散作雨비비 아연산작우비비 (비 = 雨 아래 非)
靑山忽起如新沐 청산홀기여신목
늦은비가 강을 적시면서 새벽이 처음 열리고
아침해가 물들면서 아지랑이 더욱 푸르러지네.
구름과 안개 얽히면서 비단이 땅에 깔리는데
소상 강가에서 찢어지며 가을 물빛을 보여주네.
바람 따라 완연히 돌며 예쁜 여인을 배우다가
굽은 눈썹 그려 내었지만 반쯤은 찌푸려졌네.
잠시 뒤에 흩어져서 비가 되어 흩뿌리더니
푸른 산이 갑자기 일어서는데 새로 목욕한 듯싶어라.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허난설헌 문집인 "난설헌집"에는 나오지 않고
"역대여자시집"이란 곳에 나오고 있는 소위 문집외 시들 중
하나입니다.
3구와 4구는 마치 멋지고 그윽한 동양화 한 폭입니다. 원문을 보면
수직으로 피어오르는 구름과 수평으로 퍼지는 안개가 서로 씨실과
날실이 되어 빛나는 비단을 짜고 있고, 그렇게 짜여진 것이
소상강에까지 이어져서 그 위에서 비단이 풀어지듯 조각조각
바스러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드러나는 것은 온통 깊어진 가을의
물빛이고요. 소상강은 중국에 있는 강으로서 옛날 순(舜)임금이 죽자
그의 두 부인 아항(娥姮)과 여영(女英)이 소상강에 와서 빠져죽었다는
고사가 있어 많은 시와 노래에 등장한 의미 있는 강입니다.
<출처: 달과바람사이>
閨怨 (규원) - 여자의 원망
錦帶羅裙積淚痕 금대나군적루흔
一年芳草恨王孫 일년방초한왕손
瑤箏彈盡江南曲 요쟁탄진강남곡
雨打梨花晝掩門 우타이화주엄문
月樓秋盡玉屛空 월루추진옥병공
霜打蘆洲下暮鴻 상타노주하모홍
瑤瑟一彈人不見 요슬일탄인불견
藕花零落野塘中 우화영락야당중
비단 띠 비단 치마 눈물자국 흥건해,
일년 살이 고운 풀 임을 한탄하네.
아쟁을 당겨서 강남곡 뜯고 보니,
배꽃 떨어져 낮에도 문 닫혔네.
달뜬 다락 가을 깊어 옥병풍 쓸쓸해,
서리친 갈대밭 저녁 기러기 날아드네.
거문고 뜯어본들 임은 뵈지 않고,
들판 연못가에 연꽃만 시드누나.
이해와 감상
閨怨 : 閨ㅡ안방 규. 怨ㅡ원망할 원.
閨怨ㅡ남편과 헤어져 사는 여자의 원한.
錦帶羅裙積淚痕 : 錦帶ㅡ비단 띠. 羅ㅡ비단 라(나). 裙ㅡ치마 군.
羅裙ㅡ비단 치마. 積ㅡ쌓을 적. 淚ㅡ눈물 루(누). 痕ㅡ흔적 흔.
<비단 띠 비단 치마에 눈물 자국이 쌓이다.>
一年芳草恨王孫 : 芳草ㅡ향기(香氣)롭고 꽃다운 풀.
恨ㅡ한 한. 원망스럽다. 王孫ㅡ임금의 손자 또는 후손(後孫). 귀한 손님.
그대. 여기서는 임의 뜻임.
<일년에 피고 지는 향기롭고 꽃다운 풀이 임을 원망하다.>
瑤箏彈盡江南曲 : 瑤ㅡ아름다운 옥 요. * 箏ㅡ쟁 쟁.
고전(古典) 현악기(絃樂器)의하나. 모양이 대쟁(大箏)과 같은 데,
열세 줄의 명주실(明紬-명주)을 현으로 하였음.
彈ㅡ탄알 탄. 튀기다. 타다. 盡ㅡ다할 진.
彈盡ㅡ남김없이 타다(연주하다. 뜯다.)
江南曲ㅡ양(梁) 무제(武帝)<464~549>에 의해 창시된 후 남녀간의
정한과 별리를 주제로 하여 역대 문인들이 즐겨 노래한 악부이다.
<瑤箏이 강남곡을 남김없이 타다.>
雨打梨花晝掩門 : 打ㅡ칠 타 梨花ㅡ배꽃 掩ㅡ 가릴 엄. 닫다.
掩門ㅡ문을 닫음. <비는 배꽃을 때리고 낮에 문을 닫다.>
月樓秋盡玉屛空 : 月樓ㅡ달이 밝은 누각. 秋盡ㅡ가을이 다 지나가다.
屛ㅡ병풍 병. 玉屛ㅡ옥으로 만든 병풍. 여기서는 허난설헌의 처소를 뜻함.
空ㅡ빌 공. 비다. 玉屛空ㅡ옥으로 만든 병풍이 쓸쓸하다.
<달 밝은 누각에 가을이 다 가는데 나 홀로 빈 방에 있다.>
霜打蘆洲下暮鴻 : 霜ㅡ서리 상 . 霜打ㅡ서리가 내리다. 蘆ㅡ갈대 노(로).
洲ㅡ물가 주. 섬. 蘆洲ㅡ갈대 섬. 下ㅡ아래 하. 내리다. 暮ㅡ저녁 모.
鴻ㅡ기러기 홍. 下暮鴻ㅡ저녁 기러기가 내리다.
<서리 내린 갈대 섬에는 저녁 기러기가 찾아들다.>
瑤瑟一彈人不見 : 瑟ㅡ큰 거문고 슬 瑤瑟ㅡ옥으로 만든 거문고.
一彈ㅡ한 번 타다. 한 번 연주하다. 人不見ㅡ사람이 보이지 않다.
<예쁜 거문고를 타보아도 임은 보이지 않다.>
藕花零落野塘中 : 藕ㅡ연뿌리 우. 연. 藕花ㅡ연꽃.
零ㅡ조용히 오는 비 영(령). 떨어지다. 零落ㅡ초목이 시들어 떨어짐.
塘ㅡ못 당. 연못. 野塘中ㅡ들에 있는 연못 속으로.
<들녘 연못 속으로 연꽃이 시들어 떨어지다.>
* 箏(쟁) : 국악기 중 사부(絲部)에 속하는 악기.
본래는 중국의 속악에 쓰이던 13현의 악기였다.
1114년(예종 9) 宋에 사신으로 갔던 안직숭(安稷崇)이 돌아오는 길에
새 악기와 곡보(曲譜)를 가지고 와서 태묘(太廟)의 제향(祭享)에도
겸용하였는데, 이때 들어온 악기 중에 쟁이 있었다.
그 후 이 악기는 주로 궁중제례(宮中祭禮)에서 당악(唐樂)에만 연주되어
왔으며 다시 15현으로 만들어 대쟁(大箏)이라 불려 왔다.
아쟁(牙箏)도 이 쟁 계통의 악기로 보고 있다.
이 밖에도 《수서(隋書)》에 의하면 백제 때 쟁이 있었고,
《세종실록》에도 1424년 쟁을 새로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출처: Mountain 4U>
<친필>(1587년 작.)-서울대 전시자료
<친필 한시 풀이>
煙鎖瑤空鶴未歸 안개는 공중에 자욱한데 학은 돌아오지 않고
桂花陰裏閉珠扉 계수 꽃 그늘 속에 구슬 문은 닫혔네
溪頭盡日神靈雨 시냇가는 온종일 신령스런 비만 내리고
滿地香雲濕不飛 땅에 가득한 구름은 젖어서 날지 못하네
暮春 蘭雪軒(1587년 늦봄에 난설헌)
강남곡(江南曲) - 강남에서
人言江南樂(인언강남낙) : 사람들 강남을 즐거운 곳이라 하지만
我見江南愁(아견강남수) : 나는 강남의 근심을 보았습니다
年年沙浦口(년년사포구) : 해마다 모래벌 포구에서
腸斷望歸舟(장단망귀주) : 단장의 이별하고 고향 가는 배를 보았답니다.
감우2 (感愚2) - 어리석었어
古宅晝無人(고택주무인) : 고택에는 낮에도 사람이 없어
桑樹鳴鵂鶹(상수명휴류) : 뽕나무에는 부엉이와 올빼미만 우네
寒苔蔓玉砌(한태만옥체) : 옥섬돌엔 차가운 이끼와 넝쿨만 무성하고
鳥雀棲空樓(조작서공루) : 빈 누각엔 새들만 깃들이네
向來車馬地(향래거마지) : 지난 날 수레와 마차 오가던 곳인데
今成孤兎丘(금성고토구) : 지금은 토끼 언덕이 되었네
乃知達人言(내지달인언) : 이제야 알겠구나, 선인의 하신 말씀
富貴非吾求(부귀비오구) : 부귀는 내가 구할 바가 아니란 것을
상봉행2(相逢行2) - 만남의 노래
相逢靑樓下(상봉청루하) : 청루에 서로 만나서
繫馬垂楊柳(계마수양류) : 수양버들 아래 말 매놓고
笑脫錦貂裘(소탈금초구) : 웃으며 비단옷과 갓옷 벗어
留當新豊酒(유당신풍주) : 신풍주를 사서 같이 마셨다네
상봉행1(相逢行1) - 만남의 노래
相逢長安陌(상봉장안맥) : 장안의 거리서 서로 만나
相向花間語(상향화간어) : 꽃밭 속 찾아가 속삭였다
遺却黃金鞭(유각황금편) : 황금 말채찍질 하지않았는데도
回鞍走馬去(회안주마거) : 돌려세운 말은 그냥 달려갔었네
감우1(感愚) - 어리석었어
盈盈窓下蘭(영영창하란) : 하늘하늘 창 아래 난초잎
枝葉何芬芬(지엽하분분) : 가지와 잎이 어찌 그리도 향기로운가
西風一披拂(서풍일피불) : 하뉘바람이 한번 스치면
零落悲秋霜(영락비추상) : 시들어버리니 가을서리를 슬퍼하노라
秀色縱凋悴(수색종조췌) : 빼어난 고운 빛 시들어 버려도
淸香終不斃(청향종불폐) : 맑은 향기는 끝내 없어지니 않는구나
感物傷我心(감물상아심) : 風物에 감응하는 마음이 아파서
涕淚沾衣袂(체루첨의몌) : 눈물은 흘러 옷깃이 젖네
추한(秋恨) - 가을날의 한
縫紗遙隔夜燈紅(봉사요격야등홍) : 비단 창문 사이에 두고 등 밝은 밤
夢覺羅衾一半空(몽각나금일반공) : 꿈에서 깨어보니 비단 이불 한 곳이 비어있네
霜冷玉籠鸚鵡語(상냉옥롱앵무어) : 서릿발은 차갑고 옥초롱에는 앵무새 저 혼자 지저귀고
滿階梧葉落西風(만계오엽락서풍) : 불어오는 서풍에 섬돌 가득 오동잎은 떨어지네
허난설헌 가족묘
난설헌과 두 아이의 작은 집 유독 애틋한 묘가 있다. 허난설헌(許蘭雪軒)의 가족묘가 그러하다. 광주군 지월읍 초월리. 중부고속도 바로 옆이라 눈여겨보면 지나는 길에도 알아볼 정도다. 묘역은 안동 김씨의 위력을 보여주듯 잘 정돈돼 있다(경기도기념물 제90호). 난설헌과 허씨 형제들 이후 난설헌에겐 불행이 겹쳐온다. 두 아이를 앞세우고 실의에 빠져 지낼 때 허봉도 유배 후의 방황 끝에 객사한 것이다. 이듬해(1589년)에 난설헌도 셋째를 가진 채로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내 시를 모두 불태우라”는 말과 함께…. 시를 통한 해방과 구원은 ‘유선시(遊仙詩)’에 특히 많다. 유선시는 신선에 대한 고사와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필력은 물론, 우주를 아우르는 상상력을 요해서 본래 남성의 장르로 여겨졌다. 그런데 사대부도 못 쓰는 유선시를 난설헌이 써냈고, 이는 세간의 입방아를 타게 된다. 많은 말 중에 난설헌이 유선시를 7세에 지은 천재라는 소문도 있었는데, 그 이름이 중국에서 유명해지고 떠돌며 ‘전설’로 변한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난설헌은 유선시를 87수나 남기고 있다. 허균이 간직한 게 그 정도니, 난설헌이 유선시를 얼마나 더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글: 정수자 시인 . 문학박사 / 사진=조남진기자>
[경기일보 2008-7-22]
조선 최고의 여성시인, 허난설헌. 시비가 우뚝하다. 이숭녕의 비문(贈貞夫人陽川許氏之墓)은 구구절절 난설헌의 삶을 일깨우고, 두 개의 작은 묘가 보는 이의 발을 오래 붙잡는다. 아프게 앞세운 두 아이의 묘.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잃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구나. (……) 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 피눈물만 속으로 삼키노라” 난설헌의 ‘곡자(哭子)’에 오빠 허봉의 시가 다시 얹힌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 (……) 맑고 밝은 얼굴에 반짝이던 그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곡(哭)에 부치노라”
허초희(許楚姬), 난설헌의 삶은 짧았다(1563~1589). 그는 스물일곱 아까운 나이에 꽃처럼 졌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가 있었다. 고독해도 높다란 정신적 거처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허씨 형제의 긍지인 문향(文香)이 뿌듯이 서려 있었다.
난설헌은 강릉에서 초당 허엽의 3남 3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천부적인 재능 덕에 난설헌은 아버지와 오빠의 뜻에 따라 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스승은 손곡 이달(蓀谷 李達)로, 허봉의 친구이자 동생 허균의 스승이었다. ‘성당3 시인’으로 불리는 당대의 문장가지만 기녀 아들이라 뜻을 펼 수 없는 이달을 허씨 형제의 스승으로 모신 것이다. 여기서 허씨 집안의 진보적 면모가 드러나는데, 그런 세계관이 선구적 여성시인 난설헌과 『홍길동』의 저자 허균을 낳았을 터이다.
15세경에 난설헌은 김성립과 혼인을 한다. 그런데 남편이 좀 달렸던지, 몇몇 얘기가 전해진다. 그 중 기생집 출입이 잦은 남편 친구들의 장난에 난설헌이 술과 안주를 보내며 의연하게 답한 시는 유명하다.
“정금 명월주로 노리개 만들어 그대에게 채웁니다. 길가에 버리는 건 아깝지 않지만, 새 여자 허리띠에는 매어주지 말아요” 그의 자존심이 퍼렇게 묻어나온다. 비록 사랑하지 않는 남편이라도 남편과 시어머니의 홀대는 난설헌을 외롭고 힘들게 했다. 그 정황은 누나를 늘 생각했던 허균의 글에서 확인된다.
그 후 급제한 남편도 임진왜란에서 전사하고, 허균 역시 광해군 연간에 역모 죄로 처형된다. 가문의 멸망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난설헌과 허균에 대한 폄훼로 이어진다.
흔히 난설헌의 삶을 불행하다지만,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을 듯하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허봉과 허균이 영혼의 벗이자 아낌없는 후원자였으니 말이다. 허봉은 ‘누이에게 보내는 글’에서 “신선나라에서 예전에 보내준 문방사우”를 보내며 무엇이든 그리고, “두보의 소리가 누이의 소매에서 다시 나오기를 바랄 뿐”이라는 글로 독려했다. 허균 또한 이름 없이 사라질 조선의 여자 난설헌을 중국에까지 널리 알렸다. 이 모두 난설헌의 재능을 높이 친 데서 나온 것이니 참으로 아름다운 우애요 자긍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의 ‘여자’라는 굴레와 시적 구원
“조선에, 여자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난설헌은 이 셋을 한탄했다. 자의식 강하고 재능 많은 여성에게 그것이 치명적 굴레임은 충분히 짐작된다. 더욱이 여자는 이름도 필요 없다던 가부장사회 아닌가. 그 와중에 남편도 마음에 차지 않았으니 난설헌이 오직 시를 도피처이자 구원처로 삼았을 법하다.
향기로운 달빛 차가운데 밤은 깊어만 가고(香寒月冷夜沈沈)
웃으며 이별하며 교비 옥비녀를 뽑아준다(笑別嬌妃脫玉簪)
금채찍 다시 들어 돌아갈 길을 가리키니(更把金鞭指歸路)
벽성 서쪽 언덕에는 오색구름이 자욱하다(碧城西畔五雲深)
이 시에서 난설헌은 ‘교비’라는 여신이 누군가에게 옥비녀 뽑아주는 장면을 그린다. 여신이 주도하는 만남을 통해 여성의 주체성을 부각하며 금지된 자유를 초월하는 즐거움을 담아낸 것이다. 이렇듯 시비할 특성이 종종 보이는 데다 여자가 높은 기상의 유선시를 쓴 것 자체가 남자들에겐 못마땅했을 것이다.
난설헌은 호 외에 ‘경번(景樊)’이라는 자(字)를 가질 만큼 자의식이 강했다. 그런데 여자가 호 하나로도 과하거늘, 심지어 자를 갖고 있다고 시비 거는 남자가 많았다. 당(唐)의 유명한 시인 번천(樊川, 두목의 호)을 따르려 했거나 여신 번(樊)부인에 대한 경모이거나, 난설헌의 기개가 마뜩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유교적 세계관에 갇힌 남자들의 질타와 조롱에도 난설헌의 자존과 시적 추구는 꿋꿋했다. 자가 무엇을 의미하든, 그가 꿈꾼 세계가 거기 있었으리라.
개인시집을 가진 첫 여성 한류 시인
허난설헌, 조선시사에서 그는 하나의 사건이다. 상징적 사건이다. 여성에겐 출판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 아닌가. 게다가 중국의 내로라하는 시인들도 난설헌 시집을 구하고자 야단이었다. 요즘으로 보면 시인이 그것도 여성시인이 한류 스타였던 것이다. 『난설헌집(蘭雪軒集)』은 그런 상징성을 지닌 여성의 첫 개인시집이다.
물론 이는 허균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허균이 없었다면 시집도 당연히 없었을 테니 말이다. 난설헌의 시를 갖고 있던 허균은 1608년 드디어 『난설헌집』(목판본)을 공주에서 출판한다(1590년 유성룡의 발문을 받아놨지만 전쟁으로 늦어짐). 명의 사신 주지번·양유년 두 사람의 서문도 있는 책은 명에서도 서로 구하려는 바람에 금세 유명해졌다. 이전에 명의 오명제가 조선의 시를 모아 출판한 『조선시선(朝鮮詩選)』(1600년) 덕에 난설헌의 이름이 중국에 이미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일본에서도 『난설헌 시집』이 출판되니, 1711년 분다이야 지로에 의해서였다. 이로써 난설헌은 한·중·일에서 시집을 출간한 한류의 원조격 스타시인이 되었다.
그런데 후대로 올수록 난설헌을 폄훼하는 글이 많아진다. 그 중에도 진보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홍대용, 박지원 등의 남성우월 시각과 비판은 실망스럽다. 난설헌을 인정하는 일부 남자 외에는 대부분 비판을 일삼았던 것이다. 조선은 과연 남자들의 나라였다. 자신들이 금줄 쳐놓은 세계 안에서만 얌전하게 살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여자는 “재주 없는 게 덕”이었을까. 그러니 난설헌처럼 난 여자가 조선에 여자로 태어난 것을 어찌 한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런 여건에서도 난설헌은 규방의 여인이 보고 듣는 세계를 뛰어넘는 시세계를 보여준다. ‘빈녀(貧女)’처럼 소외된 약자나 열악한 현실에 대한 시도 많다. 그 때문인지 난설헌 시가 대부분 허균의 작품이라는 설이 있었고, 지금도 표절 혹은 위작이라는 의심을 품는 학자들이 있다. 죽을 때 시를 다 태우라고 한 것과 그 많은 어려운 시를 어린 나이에 썼다는 게 믿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허봉이나 허균의 인정에서 확인되듯, 난설헌은 천부적 재능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스물일곱 송이 붉은 부용꽃’을 기리며
스물일곱에 갈 것을 이미 알았던 것일까. 난설헌이 23세 때 꿈을 꾸고 나서 쓴 시는 그의 삶을 더 선명하게 각인한다.
벽해의 바닷물이 하늘바다로 스며들고(碧海侵瑤海)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 기대어 있다(靑鸞依彩鸞)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늘어지며(芙蓉三九朶)
붉게 떨어지니 달빛서리 차구나(紅墜月霜寒)
난설헌의 삶은 짧았다. 불행했다. 여자나 어머니로서는 그러했다. 그러나 시인으로서는 행복하다고 할 만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누렸고, 조선의 대표적 여성시인이라는 명성도 얻었다. 게다가 중국, 일본 문사들이 앞 다퉈 시집을 찾은 스타였다. 조선의 여인 중 그렇게 널리 떨친 이름이 있었던가. 더욱이 개인시집을 가진 여성이 있었던가. 그리고 자기 묘 앞에 버젓이 시비를 세운 여자 문사가 있었던가. 그런 되새김 때문일까, 난설헌 묘에서 무언의 채근이 자꾸 들린다. 더 큰 꿈을 꾸라는…. 더 멀리 높이 나아가라는….
허균, 허난설헌 생가와 기념관
강원도 강릉 경포대 근처에 위치해 있다.
허균은 홍길동전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위인이고, 허난설헌은 허균의 누이이며 황진이와 더불어 한국
여류 문학의 양대산맥으로 불릴 만큼 섬세하고 뛰어난 문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책자는 허균.허난설헌의 기념관소개겸 초당순두부집들 안내
허균.허난설헌기념관
허씨집안의 내력과 허균의 홍길동전, 허난설헌의 뛰어난 문장력.
한눈에 볼수있게 만들어놓은 기념관.
입장료는 없고, 기념관 관리하시는 여사님이 정말 친절하세요.. ^^
<사진자료: 강원공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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