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정덕기 / 백석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한국작곡가회 회장

권운영 2018. 1. 28. 13:40


1992년 여름1.hwp



1992년 여름

   정 덕 기(작곡가)

 

정의로운 사회란 불의가 전혀 없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역사상 그런 사회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일까? 정의와 불의가 싸웠을 때 어떤 어려움과 우여곡절 속에서도 결국에는 정의가 이기는 사회가 아닐까?

TV드라마의 거의 모든 갈등구조는 선과 악이다. 이것은 비단 TV드라마 뿐 만아니라, 모든 문학작품이 그렇다. 드라마를 보면 선한사람이 악한사람의 만행에 온갖 수모를 겪다가도 결국에는 이긴다. 그래야 시청자들의 박수를 받는다. 그래야 시청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또 다시 그런 내용을 기대하며 계속 드라마를 볼 것이다. 만약 악한사람이 승리하는 드라마가 있다면 모든 시청자들로부터 외면당할 것이며, 뿐만 아니라 거센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악이 이기는 경우가 꽤 있는 것 같다. 최근 나는 민원을 넣으러 공무원들로 가득한 어느 관공서엘 갔다. 민원을 접수하였으나 그 어느 공무원도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선악을 가려 주어야할 그 어떤 행위도 하려 들지 않았다.

작년에 태국으로 신혼여행을 갔던 남자의 선한 행동이, 휴대폰을 훔친 것으로 오인되어 46일간 절도죄로 억류되었다가 풀러난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현지 대사관의 그 누구도 자국민을 보호해야한다는 기본임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의 가족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호소도 하고 서류도 접수시켰으나, 그 어디에서도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다. 마침내 부산일보의 보도 이후 5일 만에 풀려나게 된 것이다.

20041030일 프랑스 오를리 국제공항, 마약운반 범으로 검거된 한국인 주부에 대한 대한민국 공무원들의 외면을 실화로 만든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을 본적이 있다. 나는 분노하고 분노하였다. 나도 외국에서 살아본 적이 있어 우리 외교관들의 행태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 외교관들은 자국민 보호를 위해 매일같이 찾아와 힘들지 않았는지, 가혹행위는 없었는지 등을 묻는데, 우리 외교관들은 코배기조차 보기가 힘들어 타수감자들로부터 너는 나라가 없니, 너의 나라는 너를 버렸니이와 같은 질문과 자괴감에 더 괴로웠다고 그들은 증언하고 있다.

요사이 사회가 어려워져서 그런지 내 주위에도 공무원이 되고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공무원이 얼마나 좋았으면 얼마 전 천안에서는 가족들에게 공무원시험에 합격했다고 둘러대고 거짓으로 출근해오던 30대 남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3년간 서울에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던 공무원지망생이 시험에 떨어진 후 부모와 같이 고향 구미로 내려가던 도중 경부고속도로 어느 휴게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뿐만 아니라, 서울 마포구 어느 공원에서는 공무원 시험에 낙방한 30대가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한 것이 산책 중이던 시민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정말이지 무슨 대책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본인의 안위를 위한 것인지, 국민을 위한 봉사와 정의사회 구현을 위한 헌신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나라를 살만한 세상으로 바꿀, 그런 마음으로 시작해야 되지 않겠는가?

여기에 내가 경험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1992년 여름, 나는 독일에서 마지막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4번에 걸친 졸업연주회를 위한 20여 편의 작품을 채우느라 밤낮을 설쳐야 했다.

하지만 더 큰 일은 연주자들을 구해 연습시키는 일이었다. 그때 나와 가족들은 여러 사정으로 인해 자르브뤼켄에 살고 있었고, 학교는 그 곳에서 173Km나 떨어진 칼스루에에 있었다. 매일같이 두 도시를 오르내린 덕분에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학교가 있는 칼스루에에서 찾을 수 있었으나, 현악4중주 팀은 마침 그곳에서 개최된 현악4중주 페스티발로 인해 구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현악4중주 팀은 자르브뤼켄에서 구해 칼스루에에 데려가서 연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 연주자들은 초연(初演)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그런 만큼 그들은 열심히 연습했고, 열심히 연주해주었다. 덕분에 4번의 졸업연주회는 무사히 끝났다. 연주비용도 생각보다 많이 들지 않았다. 그곳 연주자들은 1000, 2000원짜리 조그마한 선물로도 매우 기뻐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악4중주 팀만은 예외였다. 독일의 그 비싼 교통비를 지불하다 보니 자르브뤼켄에서 칼스루에까지 2회 왕복교통비로 1인당 150DM4명에게 총 600DM(30만 원)이 지출되었다.

마지막 졸업연주회가 끝난 다음날, 그간의 노고에 감사드리려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수고했다 좋은 곡이었다는 말과 함께 나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현악4중주 팀의 교통비는 어떻게 했느냐고 지도교수께서 물으셨다. 개인적으로 지불했다고 하니, 그 연주자들에게 서명을 받아 학교에 제출하면 되돌려 받을 수 있다면서 자세한 방법을 가르쳐 줬다. 다음날 나는 연주자들을 만나 서명을 받은 후 학교 총무처에 제출했다. 하지만 반신반의했다. 워낙 학비 부담이 없는 나라이긴 하지만 한 개인의 졸업연주회 경비까지 대신 지불해 주리라고는 통념상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일주일 전, 나는 졸업증명서를 받기 위해 마지막으로 칼스루에 갔다. 그때까지 나의 통장에는 연주회 경비가 입금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온 김에 물어보리라 생각하고 총무처로 갔다. 담당 공무원이 휴가 중이어서 그가 돌아올 한 달 후에나 지불이 가능하다며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곳에서의 공부가 다 끝나서 일주일 후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고, 3일 후면 모든 은행계좌도 정리될 것이라고 하자, 더욱 친절하게 내일 다시 와 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확실히 받을 수만 있다면 다시 올 수도 있었지만 잘못하면 허탕만 칠 것 같아, 173Km나 떨어진 자르브뤼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다시 오기는 매우 힘들다고 하자, 조금만 기다려주면 회의를 해서 결정하겠다고 했다.

10분쯤 지났을까, 돈이 준비되었다는 말을 듣고 들어가니 고액권이 아닌 잔돈 한 뭉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총무처 직원들이 각자 주머니를 털어서 마련한 돈이었다. 한 달 후 담당공무원이 돌아오면 되돌려 받을 수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받아가라고 했다. 그리고 한국에 가서 성공하기를 바란다며 모두들 악수를 청했다.

요즘도 가끔 그 때를 생각한다. 일면식도 없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 외국인 한 명, 일주일 후면 제 나라로 돌아갈 것이고, 돌아가면 언제 다시 오게 될지 기약도 없는데, 그냥 돌려세우면 귀찮지도 않고 국고도 절약될 텐데...

그 때 그 돈에 행여 애인과의 근사한 저녁을 위한 돈이 섞이지나 않았는지, 귀여운 딸에게 인형을 사 줄 돈은 아니었는지, 그들 말대로 한 달 뒤에 잘 받기나 하였는지...

내가 한국에 돌아 온지도 25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바보처럼 공무원은 그래야 한다고, 사람은, 세상은, 그래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백석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한국작곡가회 회장)


1992년 여름1.hwp
0.03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