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이문열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등단 첫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인기를 끌었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해
당대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랐다.
'이문열 신드롬'이란 말까지 생겼다.
이제까지
그의 저서는 3천만 권 이상 팔렸다.
보수라는 진지를 고수하는 사나이
1948년 서울에서 출생한
소설가 이문열의 본명은 이열(李烈),
경북 영양군 석보면이 고향이다.
6·25 전쟁 때
아버지가 월북함에 따라
어머니와 5남매는 여러 곳을 전전했다.
초등학교를 빼곤
정규 교육 모두 중퇴로 끝냈다.
서울대 사범대를 그만두고
사법 시험을 준비했으나 매번 실패했다.
군 전역 후
대구에서 학원 강사와 신문 기자로 일했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한 첫 해에
<사람의 아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이후
<젊은 날의 초상>, <레테의 연가>, <영웅시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삼국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인기를 끌며
당대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랐다.
한편 2000년대 이후
대표적인 보수 논객이 되었다.
이문열의 부친 이원철은
경북 영양의 천석꾼의 자제였다.
서울 휘문고보를 졸업,
일본으로 유학갔다가 사회주의에 빠졌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 박헌영과 이현상 등
남로당 지도부와 교통(交通)했다.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며 인민군이 내려오자
그는 수원 농대(현, 서울대 농대)의
관리 책임 완장을 찼다.
이후
동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서울이 수복되자 그는 교수 5명과
학생들을 트럭에 태우고 월북했는데,
당시 만삭인 아내와
어린 네 자식들은 데려가지 않았다.
막내아들 이문열은 세 살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외가인 경북 영천에 내려가 잠시 머물다가
문중이 있는 경북 영양을 거쳐 안동으로 이사했다.
1955년 안동 중앙국민학교에 입학했다가
다음해
서울로 이사하는 바람에 전학을 하려 했지만
전학증이 없어 여기저기 퇴짜를 맞다가
1957년 종암국민학교로 전학했다.
또 다시
1959년 경남 밀양으로 이사해
1961년 밀양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이는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졸업이다.
아버지의 얼굴도 목소리도
아무런 기억이 없음에도
그는 아버지의 그늘 속에 살았다.
연좌제가 폐지된 1981년까지
이는 그의 주홍글씨였다.
대공 담당 형사들은
그의 가족 주위를 늘 맴돌며 동네 사람들에게
수상한 언동을 하지 않느냐고 캐묻는 통에
한 동네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이문열의 가족사를 알면
그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소설 <변경>에는
월북한 아버지를 둔
명훈, 영희, 인철 등 3남매가 등장한다.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는 셋째 인철은
바로
이문열의 분신인 셈이다.
인철의 입을 빌려 부친의 부재에 따른
가정의 파탄을 그려내고 있다.
"아아, 아버지, 아버지.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제대로 된
사진조차 본 적이 없는 그 막연한 추상,
그러나
집 안 구석구석 살아서 떠돌며 끊임없이
재난과 불행의 먹구름을 몰고 오던
두렵고 음산한 망령,
정액 몇 방울의 의미로서는
너무 무겁던 내 삶의 부하(負荷)였으며,
알 수 없는 원죄를
내 파리한 영혼에 덮씌우던 악몽,
깊은 밤 선잠에서 깨어나 듣던
어머님의 애절한 흐느낌과
몽롱한 내 유년 곳곳에서 한과도 같은
그리움을 자아내던 이였으되
또
듣기만 해도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소스라쳤던
이름의 주인....."
1961년 5월,
군사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대대적인 농지 개간을 추진했다.
연좌제를 지양(止揚)하겠다는 얘기도 돌았다.
그의 어머니는 귀향을 결심했다.
선산발치에 있던 2만 평의 야산을 개간해
삶의 터전으로 삼을 작정이엇다.
고향인 영양군 석보면엔 중학교가 없었다.
그는 홀로 밀양에 남아 중학교에 입학했다.
고아원생은
입학금과 월사금이 면제였지만
궁핍과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어머니를 설득해서 학교를 중퇴하고
귀향길에 올랐다.
소설 <변경>에도
인철이 중학교 진학을 위해 밀양에 남아
고아원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고향엔 일가친척만 백여 호가 있었다.
대학생도 열 명은 되었다.
그는
집들을 돌며 책을 수거했다.
비오는 날엔 밭 일을 쉬고 독서를 했다.
긴긴 겨울은 책 읽기에 좋았다.
제도 교육권을 벗어난 그는
쉽게 읽히는 문학에 편중한 독서였다.
틈틈이 고입 검정고시를 준비해
1965년 검정고시로
안동고등학교에 입학하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1년 만에 중퇴했다.
가족은
개간지를 헐값에 처분하고
부산에 정착한 뒤였다.
그는 가족을 따라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 전학할 시기를 놓쳐
방콕하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사르트르, 니체, 키르케고르 등을 접하며
실존주의에 빠져들었다.
그 사이
친구들은 하나둘 대학에 진학했다.
또래에 뒤쳐진 생각이 들어
그는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자전적 소설 <젊은 날의 초상>에는
대학 입시를 앞둔 주인공의 일기장을 보여 준다.
"이제 너를 위해 주문을 건다.
남은 날 중에서
단 하루라도 그 계획량을 채우지 않거든
너는 이 시험에서 떨어져라.
하늘이 있다면
그 하늘이 도와 반드시 떨어져라.
그리하여
주정뱅이 떠돌이로 낯선 길바닥에서 죽든
일찌감치 독약을 마시든 하라"
- <젊은 날의 초상> 중에서
한편,
이 책에는 1989년에 발표된 <필론의 돼지>가
그래픽 노블로 소개되고 있다.
이 소설은
제대병사들이 탑승한 열차를 배경으로
한국 사회를
작가 자신의 시각으로 그려낸다.
특정한 상황을 설정하여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 존재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준다.
폭력의 악순환과 함께
인간 존재의
어두운 속성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권력의 폭력이나,
지배를 당하는 쪽의 폭력을
등가(等價)의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대구매일신문>에 응모한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가작으로 뽑힐 때까지
이문열은 많은 좌절을 경험했다.
서울대 사범대까지 중도에 포기했으며,
신춘문예, 사법고시 등에서 잇달아 고배를 들었다.
마침내
문인으로서의 등단에 성공하고 발표한
<사람의 아들>은 큰 주목을 받았다.
기도원에서
잔인하게 살해된 시체가 발견된다.
피살자 민요섭은 전쟁고아로
외국인 선교사의 양자로 입양되어
신학대학에 다녔던 우수한 학생이었다.
이후
그는 상급 학년이 되면서 반항적으로 변해
교수와 신학적 논쟁을 벌인 끝에
학교를 자퇴하고 만다.
한편,
사건 담당 형사는
요섭의 행적을 추적하다
노트 한 권을 입수한다.
미제 사건을 처리될 판에
한 창녀을 통해 조동팔이
요섭과 관련된 인물임을 알게 된다.
사실
요섭은 인간 중심의 종교라는
새로운 종단과 교리를 만들어
미래의
사도들을 양성하는 일을 벌였다.
하지만
빈곤한 그들이 직면하는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범죄 뿐이었다.
이에
조동팔은 요섭의 열렬한 사도였기에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을 들락거렸다.
하지만
교주격인 요섭은
동팔이 감옥에 있는 사이에 종단을 해체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기독교 기도원으로 돌아갔다.
이후 출옥한 동팔은
절망적인 분노에 사로잡힌다.
형사의 검거망이 옥죄어 오는 걸 느낀
동팔은 음독자살을 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나까지
패배해 쓰러졌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지금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은 민요섭의 피지,
우리의 신에 대한 절망은 아니오.
이 시각 이전에나 이 시간 이후에나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은 우리의 신뿐이며,
설령
아무도 느끼지 못하더라도
그 고독한 신성(神聖)은
언제나
당신들의 머리 위에서 빛날 것이오"
소설가 이문열은
세상과 날카롭게 부딪혀 왔다.
누적 판매
3천만 권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작품성과 대중성을 둘 다 얻은
당대 최고의 작가다.
그럼에도 이런 영예가
무참하게 '보수의 괴물'로 낙인찍혀
세계 문화사에
전무후무할 '책 장례식'까지 당했다.
정치가
문학을 시녀로 삼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진보다, 보수다를 떠나
작가 이문열의 삶과 인생,
그리고
그의 작품 세계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펼쳐 읽어보라.
책은
이문열 인터뷰와 아내 인터뷰,
작품 소개와 사진,
만화로 보는 일대기 등을 다채롭게 담았다.
생각하면 우습지 않은가?
진정으로
인간을 위해 봉사해야 할 것은 이념인데
거꾸로
인간이 이념을 위해 봉사해야 하다니,
보다 행복해지기 위한 고안이
오히려 인간을 죽이고 있다니...
- <영웅시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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