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7년 영의정 권철의 아들로 태어났다.
1582년(선조 15년) 과거에 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에 의주목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임명되었다. 선조가 수도인 한양을 떠나 의주로 피난 가는 등 사태가 더 급박해지자 권율은 전라도 순찰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의 지휘 아래 용인에서 왜군과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후 남원에서 지원병 1천 명을 모아 다시 북쪽으로 나아가다가 금산군에서 왜군의 정예 부대를 크게 물리쳐 전라도를 지켰다. 이 공으로 전라도 순찰사가 되어 전라도 일대를 책임지게 되었다.
계속 북쪽으로 나아가다가 수원의 독왕산성에 머무르면서 성을 튼튼하게 쌓고 몰려드는 왜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권율은 왜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가 거느린 대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잘 물리쳤다.
1593년에는 한양을 되찾기 위해 북쪽으로 나아가다 2,8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머물렀다. 이에 왜군은 3만 명이 넘는 군사로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행주산성은 한양 근처의 중요한 군사 요새였기에 이곳을 적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권율의 지휘 아래 의병과 승병 및 부녀자까지 나와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왜군의 수가 권율이 이끄는 군사의 수보다 10배가 넘었지만, 있는 힘을 다해 싸운 덕분에 큰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다. 행주산성에서의 큰 승리로 권율은 도원수가 되었다. 장군 중의 최고 장군이 된 것이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왜군이 북쪽으로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와 함께 울산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으나,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걱정한 명나라가 갑자기 후퇴하는 바람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냥 철수해야만 했다. 이어 순천에 머물고 있던 왜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역시 명나라 장수들이 협조하지 않아 실패했다. 그렇게 힘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한 가운데 7년 간에 걸친 전쟁이 차츰 끝나갔다.
1599년 나이가 들어 병이 깊어지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그 해 7월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