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에서 아침을 먹고 어딜갈까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내포지방의 중심, 예산. 충효와 우애의 고장.
예산과 서산은 엎어지면 코닿을 만큼 지척이다. 해미읍성을 지나 가야산 기슭을 따라 시원하게 열린 도로를 달린다.
좀 더운날씨지만 높은 지대에 올라왔는지 열어놓은 창문으로 시원한 솔향 가득한 산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식혀준다.
어느때보다 선명한 한여름의 높은 파란하늘에는 다양한 모양을 한 뭉게구름이 느릿하게 흘러간다.
저수지를 지나 오르막을 올라 정상부에 이르니 어느덧 눈이 시원해지며 예산에 다다른다. 5분이나 달렸을까.
길 언저리 이정표에서는 수덕사와 충의사, 덕산온천을 가리키는 글자들이 보인다.
수덕사는 작년에 갔으니 오늘은 조금 다른코스로 한번 가본다.
뻥뚤린 도로에서 내려와 편도 1차선도로를 달리니 충의사와 덕산온천의 갈림길.
워터파크보다는 그래도 예산을 상징하는 인물중 한분인 매헌 윤봉길 선생을 기리는 충의사로 발길을 돌린다.
예산의 대표적인 여행지라면 가야산, 수덕사, 예당호, 추사고택, 임존성 등이 있는데, 충의사는 그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예와 의를 자랑하는 예산 덕숭산과 가야산 자락에 위치한 충의사는 암흑같은 일제 치하에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했던 매헌 윤봉길 의사의 혼과 얼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처음 길옆 간판에 보이는 충의사란 간판을 본다면 그냥 무슨 절인가
할 수도 있을것이다. 忠義祠. 이름처럼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뜻을 기리는 사당이다. 옛날 가문의 조상을 모시거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절을 빛낸 분들을 기리는 사우와 비슷한 의미이다.
윤봉길의사는 1908년 지금의 충의사가 있는 곳 길 건너편 시량리에서 5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23세이던 1930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뜻을 펼치고자 하였고 1932년 중국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일제의 전승기념 축하자을 폭파하는 거사에 성공하고 일제에 의해 체포돼 그해에 일본에서 순국하였다.
이때가 선생의 나이 열혈청춘 25세때. 지금으로 따진다면 갓 군대를 제대할 나이에 조국을 위해 한목숨 숭고하게 바친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고 발전된 조국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선생이 옥사의 이슬로 사라져간지 13년이 지나고 조국의 감격스런 해방을 맞이한 1945년에야 비로소 일본에 쓸쓸히 잠들어 있던
유해를 서울 효창공원의 묘역으로 모셨다. 부인은 지금 충의사 경내 조용한 소나무 아래에 모셔져 있어 서로 다른곳에 잠들어 있지만,
저승에서는 아마 함께 그동안 못나눈 사랑을 하시기를 빌어본다. 충의사는 선생의 영정을 모신 본전과 기념관, 그리고 선생이 태어나신
생가인 광현당과 어릴적부터 청년으로 성장할때까지 살던 저한당으로 구분된다.
이곳을 방문한 날도 공주대학교의 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국토순례대장정을 하는지 같은 옷과 모자를 걸친채 윤봉길 의사의 흔적을
둘러보고 있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많지 않아보인다. 인근 수덕사와 추사고택이 워낙 유명해서 그런가보다.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족끼리 먹거리를 준비해와 등나무 테이블 아래서 음식을 먹으며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일단 주차장에 차를 세운뒤 충의사 본전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매헌 윤봉길 선생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전날 내린 폭우로 이곳 저곳이 파이고 모래가 길을 뒤덮어 경내가 좀 어지러운 모습이다.
그동안의 오랜 비로 인해 무성하게 자란 잔디를 깍는 직원분들의 손길이 바쁘다.
계단을 올라 입구에 있는 홍살문을 지나면 충의사의 본전으로 들어가는 삼문을 만난다.
잔디깍는 기계와 조그만 잔디깍이 차량이 바삐 원을 돌듯이 움직이며 수풀처럼 무성한 풀을 머리를 삭발하듯이 짧게 쳐낸다.
위윙 위잉하는 소리가 좀 시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더운 날씨에 고생하시는 분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삼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사자 두마리가 대위에 올라가 내방객을 위협하며 으르렁거린다.
아니면 서로를 경계하며 쳐다보는 것인가. 삼문의 입구에는 충의문이란 현판이 높게 걸려있는데,
가운데 문은 굳게 잠겨있고 양쪽문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가운데 문은 선생의 아름다운 영혼의 그림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왕릉으로 말하면 신도같은 곳이다.
삼문을 지나 본전으로 진입한다. 그리 크지 않은 충의사의 본전.
몇백년은 족히 돼보이는 하늘을 향해 용솟음치듯 굽어버린 노송들이 본전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이름하여 쌍충송. 두그루의 소나무가 입구의 사자처럼 굳건히 사당을 지키고 있다. 사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사당은 베이지색의 밝은 페인트로 건물에 색을 입혀 선생의 순결한 나라사랑의 희생정신을 떠올리게 만든다.
충의사 본전 입구에는 향로와 향이 놓여있다. 사자표 성냥통에서 성냥을 집어 조용히 불을 붙여 향을 피운다.
향연기가 어느덧 본전안을 휘돌아 하늘로 올라간다. 잠깐동안 고개를 숙여 선생의 발자취와 의거, 나라를 빼앗은 본국에서의
쓸쓸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충의사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준공식 때 쓴것이라고 한다. 경내는 한적하다.
귀기울여 들어보니 소쩍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뒷산 어디에선가 구슬프게 우는 새소리가 윤의사의 영혼을 대변하는 것 같다.
윤봉길 선생의 영정. 선생의 영정사진이 잘못됐다고 하는데, 일본인이 그려서 양복을 입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 아마 개화교육의 선구자셨던 선생이 도포자락보다는 양복을 입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선생의 영정에서 한다발의 웃음꽃이 피어난다. 찾아와서 반갑다는 의미인가. 선생님 잊지 않겠습니다.
80년전 선생이 나라를 위해 목숨바쳤던 그 정신을 가슴속 깊히 간직할께요란 화답을 하며 선생께 인사드리고 나온다. 마음이 가벼워진다.
선생님을 뵙고 내려오는 길에 분수가 있는 연못이 있다. 그동안 내린 비때문인지 물은 심하게 탁해져있다.
연못에 있는 돌다리를 따라 걸어볼 수 있지만 지금은 물이 많이 차있어 안된다고 한다. 살짝 돌하나를 던져본다.
동그라미를 그리며 수많은 원들이 연못 가장자리를 향해 뻗어나간다.
연못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불어오는 솔바람의 부드러운 미풍을 느끼고 있었더니
어느새 사람의 기척을 알았는지 분수가 제몸에 물을 뿌려 시원한 물방울들을 하늘을 향해 뿜어올린다.
비록 흐려진 연못의 물빛에 분수의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진 못하지만 마음만은 하늘을 향해 쏘아올린 공같다.
연못을 지나 나무계단을 따라 오솔길로 올라가면 윤봉길 의사의 부인인 배용순 여사의 묘소가 있다.
1922년 결혼했으니 1932년에 돌아가신 선생과는 몇년 같이 살지도 못했겠다. 그리고 그 긴 세월동안 남편의 숭고한 죽음을
마음속에 묻은채 홀로 자식들을 키우시다 한만은 인생을 88년 서울올림픽이 성대하게 치뤄지던 해에 마감하셨다.
죽어서도 선생과 한곳에 묻히지는 못하였지만 선생의 생가와 영정이 있는 이곳 솔밭에 잠들어 있다.
주차장 곁에는 커다란 비석과 귀부가 우뚝 서있다.
매헌 윤봉길의사사적비란 글귀가 보이는데, 비석을 엎고 있는 거북이의 조각이 좀 특이하다.
충의사 입구에 있는 안내도. 충의사본전과 기념관, 그리고 선생이 태어나신 도중도 등이 보인다.
안내판의 그림을 유적지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해줬으면 한다. 비슷한 색에 건물이 눈에 잘 띄지 않는것 같으니.
그리고 번호가 있는 글자들도 따로 아래쪽에 배치해 잘 보이도록 하였으면 하는 바램. 도중도는 집주위 사방으로 시냇물이 흘러
마치 섬속의 섬같은 곳이란 뜻인데, 섬이라기 보다는 잘꾸며진 정원같은 모습이다. 한번 둘러보고 싶지만
시간의 압박으로 다음 기회에 도중도를 넘겨준다. 충의사를 천천히 관람하려면 두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윤봉길 선생의 사적지에 대한 안내판. 본명은 우의이고 별명이 봉길이였다니.
그럼 원래는 윤우의라 불렸어야 하는데, 별명이 이름처럼 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그럼 나도 하리 김포비로 한번 이참에 바꿔볼까.
윤봉길의사기념관에는 선생의 유품과 책, 충의사의 내력과 선생의 업적, 일제에 대한 격렬한 독립운동의 활약상을 볼 수있다.
직접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국토대장정 팀이 차지하고 있어 들어가진 못했다. 대신 그 옆에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보부상기념관으로 입장.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국 곳곳에 있는 크고 작은 시장들을 오가며 온갖 물품을 공급했던 보부상들.
보부상의 활동으로 지방과 한양을 긴밀하게 연결하였고 곳곳의 돌아가는 소식과 서민들의 대중 문화를 퍼트리는 역할도 하였다.
전근대적인 농업국가의 틀을 벗어나 본격적인 상업기반의 시대를 열며 조선후기 상품과 경제의 발전에 한축을 담당하였다.
입구에는 보부상들의 모습이 있다. 웃음을 띠기도 하품을 하기도 어두운 기색도 보이는 보부상들.
힘든일도 즐거운 일도 고된 시기도 꿋꿋하게 버텨낸 그들이 있었다.
전시장은 10여분이면 둘러볼 수 있을정도로 규모가 작다.
보부상의 모습과 유물들은 그저 사극에서나 잠깐 잠깐 볼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 만나니 하나 하나 눈을 반짝이며 살펴본다.
저 무거운 옹기들을 지게에 짊어지고 이웃마을로 때론 다른 군의 시장으로 옮겼을 옹기장수의 두 어깨가 사뭇 힘들어보인다.
지금 이렇게 하라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보부상들이 주로 등짐에 지고 다니며 팔던 유물들이 전시돼있다. 주로 장신구나 생활용품들을 팔았는데,
이런것들이 무게도 얼마 나가지 않으면서 값은 더 후하게 받기 때문이란다. 지금의 액세서리나 금수저 그런것인가.
역시 시장에는 흥겨운 가위질로 분위기를 한껏 돋우던 엿장수들이 있었으니.
지금도 해변이나 관광지에 가면 심심찮게 그들의 구성진 엿가락장단과 춤사위로 관객들을 신명나게 하는것을 볼 수 있다.
전시장내에는 보부상들이 사용하던 문서와 계약서 등이 있고 봇짐과 지게 등이 전시돼있다.
보부상도 어엿한 상조직이었기에 지금의 유통업체나 회사처럼 탄탄한 조직이 있었고 조직간의 규율도 엄했다고 한다.
예산장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디오라마. 없는건 없다고 소리치는 장사꾼들과 한푼이라도 깍으려는 아낙네들.
역시 장날에는 주막집의 국밥과 막걸리 한사발이 최고라는 지게꾼들. 모두 흥겨운 장시의 분위기에 해가 져물어 가는 줄도 모른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관람요금은 어른 1천원, 학생은 5백원이다.
윤봉길 선생의 생가를 관람하려면 관람권이 꼭 있어야 한다.
위 치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19-1( 예산읍내에서 수덕사 가는 방향으로 가다 덕산온천지구 지나서 있다)
또는 서해안고속도로 해미나들목으로 나와 예산방면 고개를 넘어 5분정도 가면 충의사 가는 이정표가 있다. 삼거리 좌회전.
문 의 : 041 - 337 - 4108, http://www.chunghyo.net
윤봉길 선생이 성장기를 보낸 저한당의 모습.
윤봉길 선생이 야학과 강학회등을 하며 낙후된 농촌을 계몽하기 위해 만든 부흥원과 수암운동장의 모습.
매헌 윤봉길 선생이 태어난 도중도에 있는 생가인 광현당의 모습. 생가 뜰에는 유허비가 놓여있다. 충의사에서 나오면 바로 만나는 덕산온천지구. 최근에 지어졌고 물놀이시설과 다양한 스파가 있어 사랑을 받고 있는 리솜 스파캐슬이 한눈에 보인다. 물론 이곳말고도 근처에는 다양한 온천시설과 온천텔이 많으니 덕산온천의 부드러운 물을 한번 느껴보시라. 덕산온천지구에서 20여분 정도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흥선대원군이 명당터를 잡기위해 가야산 자락에 있던 천년고찰을 폐하고 조성한 아버지 남연군의 묘가 산허리 정상부에 있다. 과연 지관의 예언대로 왕이 두명이나 배출된 묘자리니 명당임에는 틀림이 없나보다. 그렇지만 독일 상인인 오페르트의 도굴을 비롯한 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지금은 전국적인 명당자리로 알려지게 되면서 답사객이 줄을 잇는다 한다. 덕산에서 홍성쪽으로 향하다 보니 길옆으로 넓은 대지가 보이고 열심히 공사중인 인부들과 차량들이 보인다. 그동안 충청남도의 중심이 대전에 있었지만 홍성,예산의 경계에 세워지는 충남도의 신도시에 공공기관의 청사들과 주변 배후단지가 완성되면 새롭게 비상하는 서해안 시대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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