梅軒 윤봉길

윤봉길의 생애

권운영 2013. 5. 12. 08:17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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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尹奉吉)

양 손에 폭탄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절명사를 가슴에 붙인 채 촬영한 윤봉길
본명 윤우의(尹禹儀)
출생 1908년 6월 21일(1908-06-21)
대한제국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
사망 1932년 12월 19일 (24세)
일본 일본 가나자와 시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사인 총살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별칭 매헌(梅軒)
직업 독립운동가, 교육자, 시인
배우자 배용순
자녀 장남 윤종, 차남 윤담
부모 윤황(부), 김원상(모)
상훈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시인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본명은 윤우의(尹禹儀), 호는 매헌(梅軒)이고,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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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편집]

초기 [편집]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광현당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려의 명장 윤관(尹瓘)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윤황(尹璜)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이다. 1911년 3월 4세 때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하였다. [1]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오치서숙에서 윤봉길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다.[1]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裵用順)과 결혼하였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하기도 했다. 1928년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 한학수업을 마쳤다. 이때 윤봉길은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다.[1]

교육 계몽 활동 [편집]

청년 시절에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한 윤봉길은 농촌계몽활동, 농촌부흥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운동 등을 시작하였다.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였다. 1928년 부흥원 설립을 기념하는 공연인 우화 「토끼와 여우」의 공연과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기사년 일기>(己巳年 日記)를 지었다. 이어 위친계(爲親契) 조직, 월진회(月進會), 수암 체육회 등을 조직하였다.[1]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후에 이 정보를 일본 경찰이 입수하여 미행,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출옥 후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편집]

김구와 윤봉길
일본 가나자와 시에 있는 위령비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야채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국무령김구(金九)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1932년 4월 29일 상하이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일왕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2], 협의 끝에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폭탄은 도시락 모양과 물통 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폭탄을 도시락 및 물통으로 위장하려는데에 목적이 있었다. 당시 일본 일왕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으므로 일본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공원에 입장한 후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천진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 등장했고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었다.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물통 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다.[3]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다시 바닥에 놓아둔 도시락 폭탄을 집어들려는 순간 일본 헌병이 덮쳤다. 윤봉길은 팔목이 잡힌 채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쳤다.[4]

홍커우공원에서의 폭탄 투척을 실행한 윤봉길은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2], 상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 등을 죽이고, 총영사 무라이,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에게 중상을 입혔다.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蔣介石)는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 투척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고, 이는 그 동안 장제스가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사형 순간 [편집]

처형 직전의 윤봉길

폭탄 투척 직후 체포, 곧바로 헌병으로 넘겨지면서 보다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5]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金澤陸軍刑務所)에서 총살 당했다.[1]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되었다.[1]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윤봉길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시 형무소에서 형틀에 묶인 사형수(윤봉길)는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숨졌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돼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한복판에 표식도 없이 암매장되었다. 시신이 묻힌 2m 깊이의 구덩이는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뒀고, 시신을 봉분(封墳)도 없이 평평하게 묻어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윤봉길 의사가 수뇌부를 섬멸시킨 데 대한 일제 군부의 치졸한 복수와 대우였다.[5][6]

기타 [편집]

사후 [편집]

효창공원 삼의사의 묘
노신 공원에 있는 기념비(2008년 )

국민회의 부주석 김구는 일본에 있던 박열에게 3의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유해 발굴을 부탁하였다. 유해봉안 추진위원장을 맡은 박열은 재일동포들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가나자와(金澤)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같은해 6월 16일 서울에 도착하여 6월 30일 국민장으로 안장되었으며 장지는 효창공원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65년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준비위가 구성되고 같은해 6월 29일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으며 1965년 12월 19일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준위를 서울 조계사에서 발족되었다.[7]

2012년 그의 일본 순국 기념비에 말뚝 테러 사건이 벌어졌다.[8]

평가 [편집]

만보산 사건으로 일본에게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중국의 주석 장제스는 이후 윤봉길의 상해 의거를 높이 평가하여 중국의 백만 대군이 이루지 못한 것을 윤봉길이 해냈다며 극찬하고, 이후 임시정부의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5] 독립운동가 겸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이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병문화시킨 것의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9]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윤봉길의 의거가 임시정부 지원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임시정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 특히 윤봉길의 의거가 있기 전에 임시정부는 참 외로웠다. 장개석이 임시정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동전 한푼도 도우지 않았으며, 윤봉길 의거를 보고서야 장개석이 전적으로 도왔던 것이다”라고 회고하였다.[5] 반면, 박헌영이승만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절하 했는데, 박헌영은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없는 극소수의 활동'이라며 윤봉길 의거를 부정적으로 평가절하였고,[10][11] 이승만은 '이런(의거)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12]

사진 조작 [편집]

1932년 5월 1일 아사히 신문 기사에 실린 조작사진
1932년 5월 1일 아사히 신문 기사에 실린 조작사진
최초 사진[13]

과거의 사진 조작 논란 [편집]

1999년, 강효백 경희대학교 국제법무대학원 교수는 현재 널리 알려진 훙커우 의거 이후 체포사진(오른쪽 사진)이 가짜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오른쪽 사진과 표제 사진의 인물 모습이 확연하게 다른 것은 물론, 윤봉길은 중절모를 쓴 적이 없으며, 트렌치 코트를 입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에 관해 대한민국 정부는 오랫동안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던 2008년 10월 8일, 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의 주장에 근거하여 이 사진 속 인물이 윤봉길이 확실하다고 답변하였으며, 강효백 교수는 이에 대해 재반박을 하는 한편, SBS스페셜에서 이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고 밝혔다.[14]

윤봉길의 유족들 중 6촌 동생인 윤명의는 "윤 의사가 생전에 입지 않았던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다"며 윤봉길의 실제 모습과 닮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윤봉길의 부인 배용순과 동생 윤남의는 1976년대에 위 사진의 인물이 윤봉길이 맞다고 증언한 바 있다.[15]

조작으로 밝혀짐 [편집]

2011년 3월 1일 SBS 스페셜 특집다큐 '일본이 찍은 체포사진 속 인물 그는 윤봉길인가' 방송에서 윤봉길의 사진은 조작으로 밝혀졌다. 상해 총영사관의 외무성 경찰사에서는 "윤봉길은 두들겨 맞고 기절해 군인과 헌병의 힘에 의해 끌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아사히 신문 기사의 실린 두장의 사진도 컴퓨터 그래픽으로 판독결과 각각 동일인물이 아닌 것으로 판독되었다.[16]

기념관 [편집]

1987년 윤의사 의거 55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국민의 성금을 모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양재 시민의 숲”에 매헌기념관 -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세웠다. 현재 양재시민의숲역의 부역명도 매헌역이다.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이 있었던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지금은 루쉰 공원)에도 기념관 매정(梅亭)이 있다.

1963년 윤봉길 의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충의사가 세워졌다. 1972년 생가와 고택 및 충의사 경역이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1978년 사당과 삼문을 전면 증축하고 충의사 정화사업이 준공되었다.

충의사는 4개 구역으로 나뉘는데, 본전지역은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충의문, 홍살문 등이 있고, 기념관 지역은 윤봉길의사기념관, 어록탑, 보부상 전시관이 있다. 성장가지역은 윤봉길의사가 4세때부터 망명전 23세까지 살던 저한당과 의거 기념탑, 윤봉길의사 동상이 있다. 생가지역에는 도중도, 광현당, 부흥원 등이 있다.[17]

유언 [편집]

2005년 12월 18일 매헌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순국 73주기를 맞아 유언 친필 사본을 공개했다.

윤의사는 거사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공원을 답사한 직후 홍커우 숙소인 동방공우(東方公寓)에 돌아와 백범 김구 선생의 요청에 의해 유언을 작성했다. 이 자리에서 윤의사는 거사가, 조선청년단에 대한 당부의 시, 김구 선생에 대한 존경의 시,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 등 4편의 시를 2시간여 만에 썼다

두 아들 종과 담에게 남긴 시에는 거사를 앞둔 비장한 심경과 자식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18]

저서 [편집]

  • 《오추》(嗚推)
  • 《옥수》(玉睡)
  • 《임추》(壬椎)
  • 농민독본》3권
  • 《기사년 일기》(己巳年日記)

가족 [편집]

8.15 광복이듬해인 1946년 백범 김구와 윤봉길의 가족. 왼쪽부터 김구, 부친 윤황, 모친 김원상, 윤봉길의 부인 배용순, 아들 윤종
1962년 3월 2일 효창공원에서 아버지 윤봉길에게 추서된 훈장을 달고 김구의 아들 김신과 악수하며 기념사진

유품 [편집]

함께 보기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