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탐사회 답사
안동건축기행, 씨족문화의 성전, 재사건축을 찾아
무릇 이 세상에 이름없는 존재란 없다, 세간의 장삼이사나 산골짜기 풀꽃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 존재에 걸맞는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 하물며 인간이 이룩한 가장 원시적이고 집단적인 공동체의 소망을 담아내는 건축물에 무명이란 수식어가 가당치나 하겠는가. 사실 거기에는 인간의 사유가 빚어내는 이상적이고 빛나는 유의미가 담긴 멋진 이름들이 있다. 하지만 내가 이들에게 무명이란 헌사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애써 지향하고자 하는 가치 때문일 것이다. 나는 떠돌이의 길을 살면서 여한없이 행복했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어느 산모퉁이의 돌장승과 무너진 절터의 주춧돌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와 쓰러져가는 빈집의 마루장 같은 그런 이름없이 버려지고 황폐해졌던 존재들과 만남이었다. 그중에서도 안동의 무명건축들이 안겨줬던 감동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길들은 들에서 마을로 향했고 다시 마을에서 뒷산의 정자로 그리고 한없이 깊어지는 산자락과 골짜기를 지나 적막강산으로 이어졌는데 그 길의 끝에는 어김없이 재사(齋舍)라 불리는 존재들이 있었다. 재사란 조상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을 말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재각이나 재실로 쓰이지만 안동 사람들은 특별히 재사라는 명칭을 차용하고 있다.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살림집과 달리 특별한 날에 문중의 구성원들이 모여 가문의 결속을 다지는 제사의례가 치루어지는 장소이다. 더러는 문중의 자제들을 모아 강학의 공간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안동에는 이런 재사건축이 150여개에 이른다고 하니 재사 건축을 보지 않고 안동을 보았다고 하지 말라는 것은 빈말이 아니다, 안동에서 재사건축이 발달한 이유는 그 역사적 배경이 있다. 조선후기 안동은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장기집권에 밀려 정치적 불운을 겪었던 남인의 당파성을 가진 사대부의 고장이었다. 이들은 절치부심 훗날을 기약하며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묘제나 제사를 통해 혈연공동체를 강화했고 지역사회에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재사건축을 구축하던 흐름이 있었던 것이다. 급격한 사회변동을 초래했던 조선후기 사대부들은 예학을 통해 무너져가는 규범과 질서를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조선의 성리학은 이미 쇠락기에 접어들었고 그 다양성과 생명력을 잃고 휘청거리고 있었다. 안동의 재사건축은 조선의 가치를 고수하려했던 안동 유림의 마지막 몸부림이었고 그 유산인 셈이다. 그리고 황량했던 세월 위에 식민과 산업화의 격량이 휩쓸고 갔다. 우리가 재사건축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그 머나먼 뒤안길을 헤매고 돌아온 어느날 이었을 것이다. 처음에 나는 그 건축물들의 꿈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전설 같은 시간 속에 서 있는 그 위용과 고집스러움에 발길이 멈춰섰다. 자물쇠가 굳게 잠겨진 세월 깊은 옛집은 우물 속을 들여다 보는 일처럼 깊고도 오묘하였다. 고요를 넘어선 정적이 흐르고 있었고 고스란히 조선의 이야기가 숨쉬는 하늘빛이 빈 마당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 규정할 수 없는 감동의 실체를 무명이라 이해했다. 무명이란 애써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어떤 정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때는 명성을 누렸으나 이미 잊혀진 존재가 되었거나 아직 세상 사람들이 그 가치를 알아주지 못하는 경우일 수도 있다. 홀로 존재하는 자의 쓸쓸함과 그 배후에 깔린 서글픔이 느껴지는 존재! 내가 바라보는 무명이란 그런 것이다. 그 무명의 옛집들은 깊은 상처 속에 있는 듯 폐쇄적이었다. 그러나 다가갈수록 온화하고 따뜻했다. 적송의 향기가 드러나는 나목의 무늬들 강물이 휩쓸고 간 주춧돌의 맨살위에서 춤을 추는 기둥들 들보와 서까래와 대공보가 어우러진 천장의 화음 의젓하고 늠름하고 시원하고 오밀조밀한 누마루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창문을 통해 햇볕과 바람을 실어오고 있었다 내 마음은 초저녁 하늘빛을 우러르는 것처럼 신령스러워졌다, 재사건축, 씨족문화의 성전을 찾아서 / 이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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