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안동권씨

권율장군묘

권운영 2018. 10. 21. 20:51

권율장군묘

      



위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223
문화재 지정[권율장군묘] 경기도 기념물 제2호(1972.05.04 지정)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명장인 권율(權慄, 1537∼1599)과 정부인 창녕 조씨, 후부인 죽산 박씨의 묘이다. 권율은 안동 권씨로 선조 15년(1582)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의주목사로 근무하던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목사에 임명되었다. 한양 수복을 위하여 북상하였으나 용인싸움에서 패하자 다시 광주로 되돌아가서 군사를 모아 충청도 금산 이치싸움에서 왜적을 대파시켜 전라도 지역을 지켰다. 이어 함락된 한양의 수복을 위하여 다시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산성에 진지를 구축하고 왜군의 진격을 막았다. 이후 행주산성으로 진지를 옮겨 권율이 일사분란하게 통솔하고 군사들은 사력을 다해 싸워 대승을 거둔다. 권율은 이 공으로 전군을 지휘하는 도원수가 되었으며, 선조 29년(1596)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선조 32년(1599) 관직을 물러나 그해 세상을 떠나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의 일반적인 묘역구조는 봉분(封墳)앞에 묘비(墓碑)·혼유석(魂遊石)·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이 있고 상석(床石) 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그 양쪽으로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을 각각 1쌍씩 세웠다.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공신이나 훌륭한 학자에게 허용되었던 것으로 묘의 남쪽 가까이 세웠다.
권율의 묘역은 이러한 원칙에 비교적 충실히 하였다. 권율의 묘소에는 묘비(墓碑)·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이 각1기씩 있다. 그리고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표시인 망주석(望柱石)과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 세우는 동자석·문인석(文人石)이 각 1쌍씩 세웠다. 묘역의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기존의 신도비가 비문이닳아 없어져 철종 12(1861)에 권율의 후손들이 새로 건립한 것이다. 1971년과 1999년 정화사업으로 묘를새롭게 단장했다.
* 시대 - 조선 선조 32년(1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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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권율 장군 묘역에는 권율을 비롯하여 그의 전(前) 부인 창령조씨(昌寧曹氏)와 후(後) 부인 죽산박씨(竹山朴氏) 묘소 3기가 있고, 그 위로 형 권순(權恂)과 부친 권철(權轍)의 묘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 1972년 5월 4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었다.


내용

권율(權慄, 1537~1599)은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문신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무장으로서의 업적이 가장 두드려진다. 그는 충청남도 금산의 이치(梨峙) 전투, 수원의 독산성(禿山城) 전투, 그리고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 등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다.

봉분은 장군의 묘를 중심으로 좌우에 전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창령조씨와 후부인 정경부인 죽산박씨가 안장되었다. 봉분은 장방형으로 호석(護石)을 두르고 그 앞에 묘비,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이 있으며 좌우로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이 각각 1쌍씩 있다. 그 외에 묘역 아래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신도비는 기존의 신도비가 비문이 마모되어 1861년(철종 12)에 후손들이 새로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신흠(申欽)이 지은 것이고, 전액과 비문의 글씨는 이유원(李裕元)이 쓴 것이다. 1971년 정화사업으로 곡장(曲墻: 무덤 뒤에 둘러싼 작은 담)과 봉분의 호석 등이 새로 단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