丈夫出家 生不還
1930년 3월 6일, 한 청년이 ‘丈夫出家 生不還(장부출가 생불환)’‘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 하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32년 4월 29일.중국 상하이 훙커우(紅口) 공원에서 수통형 폭탄을 투척해 일본의 수뇌들을 응징하는 의거를 단행하고
그 해 12월 19일 순국하니, 스물 넷, 젊디젊은 나이에 항일 불꽃으로 산화한 이 청년은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다.식민지 교육을 박차고 나오다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우리에게 알려진 ‘봉길’이라는 이름은 별명이고 본명은 우의(禹儀)다.1918년 덕산(德山) 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다음 해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말을 배워 그들의 종살이하라는 교육은 받지 않겠다”며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했다.
그 뒤 마을 서당인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 선생의 가르침 속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신문과 잡지 등도 구독하며 신학문을 습득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덕분에 늘 장원을 놓치지 않았던 영특한 제자를 아낀 매곡 선생은 윤봉길이 졸업할 무렵, 석별의 정으로 매곡의 ‘매(梅)’자와 윤봉길이 평소 흠모하던 성삼문 선생의 호 ‘매죽헌(梅竹軒)’에서 ‘헌(軒)’자를 떼어 ‘매헌(梅軒)’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다한문학 공부를 마친 윤봉길은 1926년부터 농촌사회운동을 펴나갔다. 열 아홉 어린 선생님이었지만 야학당을 개설해 문맹퇴치에 심혈을 기울였고, 1927년에는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해 본격적으로 농촌 계몽 운동을 벌였다.
이듬 해에는 ‘부흥원(復興院)이란 단체를 설립해 증산운동과 공동판매 등 농촌 부흥운동을 추진했고, 1929년에는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해 농촌개혁운동을 추진할 중심 인물들을 규합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펴나갔다. 계몽의 성과는 곧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은 독립 달성에 있음을 깨달은 윤봉길은 1930년, 조국을 위해 큰 일을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만주로 떠났다.
독립운동의 길로 나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힘을 보태야 성공적인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한 윤봉길은 다롄(大連), 칭다오(靑島)를 거쳐 1931년 8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했고,
임정 지도자인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을 만나 의열 투쟁의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행사와 일본군의 상하이 사변(일본 승려 살해사건을 이유로 일으킨 사변) 전승 축하식이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될 예정이다”라는 <상해 일일신문(上海日日新聞)>의 보도를 접하게 됐다.
독립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윤봉길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여겼고, 의거 3일 전,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 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했다.1932년 4월 29일,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한 폭탄을 가지고 상하이 훙커우 공원으로 향한 윤봉길은 오전 11시 40분. 참석자들이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부르기 시작하자, 물통형 폭탄의 안전핀을 뽑아 식장 한복판을 향해 힘껏 던졌고, 일본 상하이 파견군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등이 연기와 불꽃 속에 쓰러졌다.
천지를 뒤흔든 역사적인 상하이 의거의 순간이었다.
내 피가 거름되어 광복의 꽃 피우리라 윤봉길 의사의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며 임시정부를 동맹국 정부로 대우했고 조선의 청년들이 중국 군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을 길을 열어주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침체됐던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하지만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의거가 있은 지 27일 만에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형이 집행되기 직전 윤봉길 의사가 남긴 최후 진술은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 하고 있지만 세계 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머지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 않으며 대한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오”였다.
13년 뒤, 윤 의사의 유언은 이루어져 광복이 되니,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1946년, 고국으로 돌아와 효창공원 묘역에 안장되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3월 1일 윤봉길 의사에게 건국공로훈장 중 최고 훈격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의사의 고귀한 희생에 한민족이 바친 하나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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