梅軒 윤봉길

윤봉길 생가

권운영 2017. 8. 1. 18:23

윤봉길 생가
 
충남 예산은 매헌 윤봉길의사가 태어난 곳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6세 때부터 큰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우고 11세 때 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3·1운동 후 일본식 교육을 받기 싫어 중퇴하였다.
 
그리고 19세 때 길에서 글을 몰라 아버지의 무덤을 못 찾는 무식한 청년을 보고, 자기 집 사랑방에서
야학을 열어 농민들을 가르쳤다.
 
농민은 못난 사람이 아니다
못난 사람은 농민이 아니다
못난 사람이 아닌 농민이다
농민은 양반이 아니다
양반은 농민이 아니다
양반 아닌 농민이다
농민은 양반이 아니다
또 못난 사람이 아니다.
- 농민독본 중에서
22세 때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청소년들에게 애국심을 심어 주고 근면과 협동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그 뒤 김구의 특명을 받아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 생일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최고 사령관 시라카와를 비롯하여 상하이 일본 거류민 단장 등을 죽이고 무라
등 많은 일본군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의 장 제스는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사람의 조선인이 해냈다' 며 칭
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뒤 오사카 군법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주어졌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德山面) 시량리에 윤봉길의사가 태어나 농촌운동을 벌였던 생가를 사적지로 지
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생장가는 정남향으로 앉은 ‘口’자형 초가이며, 야학을 가르치던 부흥원은 원
래 초가였는데 헐려, 근년에 3칸 2문으로 세웠다. 이곳에는 칠판과 친필로 쓴 상량문이 있는 상량목
이 있다. 충의사는 근년에 세운 윤의사의 사우(祠宇)로서, 3칸의 청기와집인데,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여기에 달린 3문과 경역(境域) 담장이 둘러져 있다. 윤의사는 4세까지 생가에서 자라고, 같은 마을
139번지의 초가로 이사하여 1930년 2월 7일 23세 때 광복의 뜻을 품고 고국을 떠날 때까지 이 집에
서 공부하고 혼인하였으며, 부흥원을 지어 야학을 열고 농촌계몽운동을 했다.
 
<자료 - 예산시 문화재 자료 발췌 요약 재편집>
 

 
윤봉길의사 같은 독립투사들이 죽음으로 되찾은 대한민국
요즘 들어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친일찬양을 하고 있는 세력들...
소위 보수라고는 하지만 꼴통 사대적 매국노 같은 세력들이 여전히 반공을 앞세워 구시대적 폭력적 언어로 좌파니, 빨갱이니 하며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시민의 촛불을 협박하는 난동을 개탄한다.
 
더군다나 저들의 피에는 노예의 피가 섞였는지
아직도 친미사대에 빠져 자기 나라 주권을 나 몰라라 하고 반미를 하면 곧 죽을 것처럼 겁 먹고 있고
한술 더떠 소위 개신교라는 일부집단의 신도들은 목사 같지 않는 못된 목사의 주장에 울고 불고 기도회까지 열며 생쑈를 하는 것을 보면 기가 찬다.
 
이게 제대로 된 나라에 생각 있는 백성들의 모습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