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는 감춤의 미학(美學)이다.
시는 예쁜 포장지 속에 들어 있는 빛나는 보석이다. 고로 감춤의 미학이다.
그러나 시는 감춤만을 본질의 특성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때론 우회나 굴절 그런 다음 스팩트럼의 추상에서 즐거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시가 지각(知覺)에 의해서만 기쁨과 즐거움을 배태하기 때문이다.
그럼 시는 황도제 지각 이외에는 기쁨과 즐거움을 얻을 수 없는 것일까? 불행하게도 그렇다. 그러나 다른 장르는 예외다. 또한 예술과 관련, 즐거움을 주는 것이 모두 다 아름다우며 모두 다 가치 있는 것이냐 하는 명제의 질문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만 답변할 수는 없다. 가령, 미술에 있어 '로센버그'의 <침대>를 예로 들어보면 페인트칠한 침대를 벽에 걸어놓음으로써 침대는 예술작품으로 인정되는데 이때 폭신폭신한 느낌을 주는 예쁜 색깔의 침대가 우리에게 대단한 즐거움을 주는 사물임은 분명하게 인지되지만 실용성과 관련 있는 그 침대가 꼭 아름다워야 한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결국 시는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예술에서 한 발짝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순으로 보면 예술의 맨 앞자리에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미'는 본디 유용성이나 그와 비슷한 이유에서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미'란 바라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단계 더 천착해 보면 진정한 즐거움이란 현상적 감각적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적 즐거움에 가까운 것이어야 한다. 시각이나 청각에 의존한 감각적 즐거움은 순간적이며 단순하지만 지각에 의존한 즐거움은 직선적으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비밀이 이해되지 않는 한 쾌미음을 부를 수 없다. 그러나 어려운 수학문제를 한참 끙끙거리며 풀어나가다가 갑자기 해답이 전광석화처럼 눈에 들어올 때의 그 기쁨은 예상외로 크다. 그것은 노력 뒤에 오는 배가된 희열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기쁨을 <재인식의 쾌감>이라고 하였는데 감춤의 껍질을 벗긴 뒤에 나타나기에 피부반응보다 더 큰 물결 같은 감동이 되는 것이다. 시는 바로 이 <재인식의 쾌감>이라는 장르이기에 다른 예술보다 한 단계 위에 자리 매김 되어진다.
예술은 신의 예지에 의해 창조된 질서정연한 자연을 인식함으로써 성립하는 모방이다. 따라서 예술에는 자연의 질서가 반영된다. 또 예술은 자연에서 표현수단과 방법을 빌려온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술을 신의 창조와 비교한다. 신은 자연의 내적 원리에 따라 창조를 하셨지만 예술가는 자연의 외적원리에 따라 모방할 뿐이다. 예술은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낼 수 없고 단지 신이 창조한 자연 속에서 형상을 인식하여 그걸 모방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신의 창조보다 저급하다. 하지만 예술은 인식활동 및 도덕적 실천 활동과 함께 인간정신 활동의 하나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시는 이런 토양 위에서 삶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적 행복을 가장 작은 그릇에 담아내기 위하여 비유를 통한 압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노력의 산물인 예술이'시'이다. 그런데 문제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분절성, 상상의 한계성, 추상성이 전제되어 있는 정형성을 깨뜨리지 않는 한 진정한 시문학이 탄생할 수 없다고 제창하며 추상적 기호로서의 언어를 극복하고 언어의 인습을 거부해야 한다는 낯설게 하기(포스트 모더니즘 포함)의 기법을 주장하면서 실천해야 한다는 시인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인의 모방은 아무런 통일성도 없는 사건의 복합을 사진사처럼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는 사건을 필연적인 인과관계의 테두리 내에서 재현하는데 있다'라는 이 말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어떤 형태로든 시인들은 단순한 모방자가 아니라 일종의 창작자임이 분명하기에 기존의 질서와 전통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것에 대해 도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춤의 원리에 의한 암시성의 본질을 몰각한 채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긴장감이 흘러 넘쳐야만 좋은 시가 되는 줄 알고 기상(.奇想)과 절연(絶緣)만을 일삼는 시업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란, 자아와 세계의 만남으로 인한 미적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구원으로 나가야함을 직시해야 하는데, 그것은 웅변과 같은 호소나 만화 같은 표현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찾아지는 감춤만이 진정한 시의 미덕이며 미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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