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

연암 박지원-북학의 선두주자

권운영 2015. 12. 6. 11:07

 

박지원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 허위의식에 빠진 세태를 비판하였다. 그는 또한 당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하였던 북학의 선두 주자였다.

 

 

정치적 불운 속에서 찾은 은둔의 여유, 연암에 정착하다


박지원의 청장년 시절은 그리 유쾌한 시간만은 아니었다. 서울 반송방 야동(지금의 중구 순화동과 의주로 2가 일대)에서 태어나 삼청동 백련봉 아래 이장오라는 인물의 별장에서 세들어 살았고 얼마 뒤에는 백탑 인근으로 이사하였다가 다시 백탑 서쪽 전의감동으로 옮기며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가 20~30대에 [양반전]이나 [예덕선생전]과 같은 세태를 비판하는 작품을 집필하게 된 것도 이런 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당시 탑골을 무대로 활동하던 이서구이덕무, 유득공 등을 만나 교류한 것이 기쁨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대대로 서울에서 살던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박지원이었지만, 그 당대에는 별로 여유로운 삶은 아니었던 듯하다. 한때 생원진사시에서 장원을 하며 촉망받던 재원이었던 박지원은 끝내 과거를 포기하고 1771년(영조 47) 황해도 금천의 골짜기인 연암골을 찾고는 그로부터 몇 년 뒤에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정착하였다. 박지원의 호는 여기서 유래하였다. 이같은 박지원의 청장년 시절의 삶은 선조들의 청렴한 삶과 유람을 즐기는 그의 생활관에서 연유한 것이지만, 그밖에도 당시 실력자 홍국영과의 불화도 한 몫을 하였다.

 

박지원의 저술인 양반전(왼쪽, 1947년 조선금융조합연합회 발행)과 허생전(오른쪽, 1924년 시문사 발행)
<출처 : 독립기념관(https://search.i815.or.kr)>

 

 


박지원이 연암골에 정착하기 직전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유언호는 “자네는 어쩌자고 홍국영의 비위를 거슬렸나. 자네에게 심히 독을 품고 있으니 무슨 화가 미칠지 모르겠네. 그 자가 자네를 해치려 틈을 엿본지 오래지만 자네가 조정의 벼슬아치가 아니라고 늦추어 온 것 뿐이라네. 이제 복수의 대상이 다 제거되었으니 다음 차례는 자네일 걸세. 자네 이야기만 나오면 그 눈초리가 심히 험악해지니 필시 화를 면하기는 어려울 걸세. 이 일을 어쩌면 좋겠나? 될 수 있는 한 빨리 서울을 떠나게나”(이종묵, [조선의 문화공간]에서 재인용)라고 권하였다는 것이다. 유언호 이외에도 정조의 역작인 [무예도보통지] 편찬 실무를 주관하였던 친구 백동수도 이처럼 권하였다. 사실 당시까지도 이렇다할 정치적 활동이 없었던 박지원이었기에 홍국영과 직접적인 마찰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정조 즉위 초 홍국영을 중심으로 정조의 적대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1776년(정조 즉위년) 11월 기장현에 유배된 심종질인 박종악의 활동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이때 박종악이 유배된 것은 정조와 홍국영에 의해 1차 제거 대상이었던 홍인한정후겸과 밀착되었다는 이유였다. 이를 통해서 유추해본다면 박지원 가문이 이들과 밀착된 것이 아마도 홍국영과의 관계를 껄끄럽게 했던 요인이 아닐까 한다.

 

 

‘북벌’에서 ‘북학’으로, 열하일기의 집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정묘호란병자호란 두 차례를 경험한 조선에서는 북벌론이 팽배하였다. 후금, 후일의 청나라 황제에게 조선을 대표하던 국왕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은 조선의 사림들에게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항복 후 형식적으로는 사대 외교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군비를 증감함과 동시에 이른바 ‘소중화’론을 내세우며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청에 대한 북벌을 준비하였다. 북벌은 한동안 조선의 정치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서서히 북벌의 이념은 점차 퇴색해가고 그 자리에 북학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당장이라도 멸망할 것 같은 청나라가 멸망은커녕 오히려 중국의 주인으로 굳건하게 자리잡은 뒤 정치적 안정뿐 아니라 문화적 발전을 이룩해가는 상황과도 관련되었다. 이제 청나라는 정벌해야 할 대상에서 배움의 대상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열하일기]의 일부. 홍대용 등으로부터 시작된 북학 논의는 박지원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열하일기]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금천의 연암골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박지원은
1780년(정조 4) 서울로 돌아왔다. 직접적인 계기는 아마도 그 동안 불화를 겪었던 홍국영의 정치적인
몰락이 아닐까 한다. 서울로 돌아와 생활하던 중 박지원은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같은 해 5월
삼종형 박명원이 고희를 맞은 청나라 건륭황제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는 진하 겸 사은사의
정사로 사행길에 올랐다. 이때 박지원은 박명원의 권유를 받고는 그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사행길에
동행하였다.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http://db.itkc.or.kr)>

 

 


같은 해 6월 압록강을 건넌 뒤 북경을 거쳐 열하, 그리고 다시 북경을 거쳐 10월말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약 5개월여의 기간 동안 박지원은 신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열하는 건륭황제가 별궁을 건설하면서 북경에 버금가는 청나라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박지원은 사행 기간 동안 청국의 학자를 비롯해 몽골과 티벳 사람까지 접하면서 그들의 학문과 문화를 접하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돌아와서 몇 년의 작업 끝에 그동안 오랑캐로만 치부하였던 청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상을 소개하며 북학론을 개진한 역작 [열하일기]를 발표하였다. [열하일기]는 내용에서뿐 아니라 그 문체에서도 당시로써는 파격적이면서 직접적이고, 해학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체반정의 대상이 되다

[열하일기]를 발표하면서 주가를 올리던 박지원은 이어 친구인 유언호의 추천으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면서 벼슬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평시서 주부와 사복시 주부, 의금부 도사, 사헌부 감찰, 한성부 판관 등을 거쳐 1791년(정조 15) 경상도 안의현감에 제수되었다. 안의현감에 재직하던 1792년 뜻밖의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다름 아닌 규장각 직각 남공철의 서신이었다. 이때 남공철이 편지를 보낸 것은 국왕 정조의 명에 따른 것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문체가 바르지 못하니 이를 반성하라는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는 중앙의 조정에서 국왕 정조에 의해 문체반정(文體反正)이 추진되던 시기였다. 문체반정이란 당대 과거시험지를 비롯해 지식인들의 일부 저술에 보이는 문체가 잘못되었다고 하여 그 문체를 단속해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바로 문체반정의 주 표적이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후일 김택영(1850∼1927)이 찬술한 [박연암선생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열하일기]가 발표되자 이를 얻어 본 국왕 정조는 1792년(정조 16) 남공철을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근래 신기한 것만을 따르는 문체의 주범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라고 하면서 남공철로 하여금 편지를 보내도록 해서, 속히 문체의 잘못을 인정하고 순정하게 수정한다면 관직 제수도 마다하지 않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중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전하도록 한 것이었다. 남공철의 편지를 받은 박지원은 자신의 문체가 잘못되었다는 속죄의 편지를 보냈으며, 이를 받아 본 정조는 그의 문재(文才)를 칭찬하며 더 이상은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였다.

 

현장에서 실현된 북학 정신

한때 정조의 문체반정 대상이기도 하였던 박지원은 그가 평소 저술에서 강조하였던 북학의 정신을 직접 현장에서 구현하는데 주력하였다.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던 당시 고을 내 노인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어 효의식을 고양시키고, 옥사를 관대하게 처리하였으며, 백성들의 구휼에도 주력하였다. 그는 뿐만 아니라 각종의 수차나 베틀, 물레방아 등을 제작하여 사용하게 하였고, 하풍죽로당이나 연상각, 공작관 등의 중국식 건물을 지었다. 중국 사행길에서 보고 들었으며, 자신이 [열하일기]에 기록한 중국의 실용적인 문명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1796년 안의현감에서 물러나 군직(軍職)을 받고 상경한 박지원은 이후 계산동(오늘날의 종로구 계동 일대)에서 생활하던 중 역시 벽돌로 총계서숙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제용감 주부와 의금부 도사, 의령 령 등을 거쳐 1797년 면천군수에 제수되었다. 면천군수에 재직하던 1799년에는 농서를 구하는 교지에 응하여 농서인 [과농소초]를 지어 올렸다. [과농소초]는 그가 금천의 연암골에서 생활하던 당시 경험에 바탕한 농서로써, 여기에 그가 후일에 찬술한 [한민명전의]를 첨부하여 올린 농서였다. [과농소초]에서 박지원은 중국 농법의 도입 및 재래 농사 기술의 개량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첨부한 [한민명전의]에서는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한전론(限田論)을 제안해, 심각한 토지 소유의 불균형을 해소하려고 하였다. 박지원은 결국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 허위의식에 빠진 세태를 비판하면서, 당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하였던 북학의 선두 주자였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박지원이 후배 박제가의 [북학의]에 대해서 지은 서문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여기서 그는 당시 조선 내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우리를 저들과 비교해 본다면 진실로 한 치의 나은 점도 없다. 그럼에도 단지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튼 것만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산천은 비린내 노린내 천지라 나무라고, 그 인민은 개나 양이라고 욕을 하고, 그 언어는 오랑캐 말이라고 모함하면서, 중국 고유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마저 배척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장차 어디에서 본받아 행하겠는가. …(중략)…남들은 물론 믿지를 않을 것이고 믿지 못하면 당연히 우리에게 화를 낼 것이다. 화를 내는 성품은 편벽된 기운을 타고난 데서 말미암은 것이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원인은 중국의 산천을 비린내 노린내 난다고 나무란 데 있다.”(박지원, [연암집] ‘북학의서’에서)


 

 

 

이근호 /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글쓴이 이근호는 조선후기 정치사와 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대중과 소통하려는 차원에서 [이야기 조선왕조사],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사전] 등을 출간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발행일  2010.12.27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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