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해 6월 압록강을 건넌 뒤 북경을 거쳐 열하, 그리고 다시 북경을 거쳐 10월말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약 5개월여의 기간 동안 박지원은 신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열하는 건륭황제가 별궁을 건설하면서 북경에 버금가는 청나라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박지원은 사행 기간 동안 청국의 학자를 비롯해 몽골과 티벳 사람까지 접하면서 그들의 학문과 문화를 접하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돌아와서 몇 년의 작업 끝에 그동안 오랑캐로만 치부하였던 청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상을 소개하며 북학론을 개진한 역작 [열하일기]를 발표하였다. [열하일기]는 내용에서뿐 아니라 그 문체에서도 당시로써는 파격적이면서 직접적이고, 해학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체반정의 대상이 되다
[열하일기]를 발표하면서 주가를 올리던 박지원은 이어 친구인 유언호의 추천으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면서 벼슬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평시서 주부와 사복시 주부, 의금부 도사, 사헌부 감찰, 한성부 판관 등을 거쳐 1791년(정조 15) 경상도 안의현감에 제수되었다. 안의현감에 재직하던 1792년 뜻밖의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다름 아닌 규장각 직각 남공철의 서신이었다. 이때 남공철이 편지를 보낸 것은 국왕 정조의 명에 따른 것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문체가 바르지 못하니 이를 반성하라는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는 중앙의 조정에서 국왕 정조에 의해 문체반정(文體反正)이 추진되던 시기였다. 문체반정이란 당대 과거시험지를 비롯해 지식인들의 일부 저술에 보이는 문체가 잘못되었다고 하여 그 문체를 단속해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바로 문체반정의 주 표적이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후일 김택영(1850∼1927)이 찬술한 [박연암선생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열하일기]가 발표되자 이를 얻어 본 국왕 정조는 1792년(정조 16) 남공철을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근래 신기한 것만을 따르는 문체의 주범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라고 하면서 남공철로 하여금 편지를 보내도록 해서, 속히 문체의 잘못을 인정하고 순정하게 수정한다면 관직 제수도 마다하지 않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중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전하도록 한 것이었다. 남공철의 편지를 받은 박지원은 자신의 문체가 잘못되었다는 속죄의 편지를 보냈으며, 이를 받아 본 정조는 그의 문재(文才)를 칭찬하며 더 이상은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였다. 현장에서 실현된 북학 정신 한때 정조의 문체반정 대상이기도 하였던 박지원은 그가 평소 저술에서 강조하였던 북학의 정신을 직접 현장에서 구현하는데 주력하였다.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던 당시 고을 내 노인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어 효의식을 고양시키고, 옥사를 관대하게 처리하였으며, 백성들의 구휼에도 주력하였다. 그는 뿐만 아니라 각종의 수차나 베틀, 물레방아 등을 제작하여 사용하게 하였고, 하풍죽로당이나 연상각, 공작관 등의 중국식 건물을 지었다. 중국 사행길에서 보고 들었으며, 자신이 [열하일기]에 기록한 중국의 실용적인 문명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1796년 안의현감에서 물러나 군직(軍職)을 받고 상경한 박지원은 이후 계산동(오늘날의 종로구 계동 일대)에서 생활하던 중 역시 벽돌로 총계서숙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제용감 주부와 의금부 도사, 의령 령 등을 거쳐 1797년 면천군수에 제수되었다. 면천군수에 재직하던 1799년에는 농서를 구하는 교지에 응하여 농서인 [과농소초]를 지어 올렸다. [과농소초]는 그가 금천의 연암골에서 생활하던 당시 경험에 바탕한 농서로써, 여기에 그가 후일에 찬술한 [한민명전의]를 첨부하여 올린 농서였다. [과농소초]에서 박지원은 중국 농법의 도입 및 재래 농사 기술의 개량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첨부한 [한민명전의]에서는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한전론(限田論)을 제안해, 심각한 토지 소유의 불균형을 해소하려고 하였다. 박지원은 결국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 허위의식에 빠진 세태를 비판하면서, 당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하였던 북학의 선두 주자였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박지원이 후배 박제가의 [북학의]에 대해서 지은 서문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여기서 그는 당시 조선 내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우리를 저들과 비교해 본다면 진실로 한 치의 나은 점도 없다. 그럼에도 단지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튼 것만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산천은 비린내 노린내 천지라 나무라고, 그 인민은 개나 양이라고 욕을 하고, 그 언어는 오랑캐 말이라고 모함하면서, 중국 고유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마저 배척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장차 어디에서 본받아 행하겠는가. …(중략)…남들은 물론 믿지를 않을 것이고 믿지 못하면 당연히 우리에게 화를 낼 것이다. 화를 내는 성품은 편벽된 기운을 타고난 데서 말미암은 것이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원인은 중국의 산천을 비린내 노린내 난다고 나무란 데 있다.”(박지원, [연암집] ‘북학의서’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