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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소월시, 신화적으로 읽기/우한기

권운영 2014. 6. 21. 08:37

 

소월시, 신화적으로 읽기/우한기

 

 

[예전에 긁적였던 글 뒤지면서 이 글을 본다. 가고 싶은 데가 있는 모양이다 싶어 함 올려본다.]

내가 보기에 소월은, 뭐랄까, 神내리는 경험을 한 사람 아닌가 싶다. 그가 쓴 시는 크게 이런 흐름을 갖는다.
떠남(님의 상실) --> 미련 --> 방황 --> 해방(죽음과 부활)
그런데 이 흐름도는 <진달래꽃>의 흐름과 똑같다.

1.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떠남)

떠난 이유는 나 때문이다. 내 삶이 어느샌가 님(하나님; 부처님; 나만의 나)을 잃어버린 거다. 그러나 나는 그 님을 보내고도 제법 잘 살 걸로 믿었다. 이렇게 나는 에덴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오게 됐다. 이 대목은 만해의 <님의 침묵>에서 님이 떠나버린 상황과 비슷하다. 그러...
나 만해는 졸지에 님을 잃어버린 반면, 소월은, 아니 우리는 님을 버렸다. 우리가 잃어버린 님은 나 때문에 떠난 거다. 먹고 살려고, 세상에 적응하려고, 출세란 걸 해 보려고, 돈이란 걸 벌려고... 이런 내 모습이 역겨워 내 속의 하나님이 나를 떠나버린 거다. 따라서 님의 상실은 나의 상실이기도 하다.

관련시 : <접동새>, <초혼>
<접동새>에서는 누이가 죽는다.
이 누이는 근원적 모태, 자궁, 곧 우리가 잃어버린 대지성을 상징한다. 이 대지성이야말로 진정한 내 하나님(부처님)이었다.
죽었다? 아니다! 우리가 죽여버린 거다.
<초혼>에서는 이 잃어버린 님을 불러보지만,
이미 우리는 회복할 수 없는 길로 접어들어 버렸다는 걸 보여준다.

2.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미련)

제법 호기 있게 님을 보냈지만, 그건 호들갑일 뿐이다. 내 속에는 끊임없이 미련이 남는다. 우리도 사귀던 님을 보낼 때, 허풍을 떤다. '자~알, 살아야 해. 정말, 잘, 살아야 돼.' 그 허풍의 표현이 '아름 따다'다. 그러나 그건 미련이 아주 크게 남는다는 징표다. 잃어버린 에덴을 늘 그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관련시 : <못잊어>,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처음 님을 보낼 때는 그 님 없이도 잘 살 줄 알았다. 금방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님을 떠나 들어온 이곳에서 우리는 그 님을 애타게 그리워한다. 어찌 아니겠는가. 님 없이는 내가 더 이상 나가 아닌 것을...

3.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방황)

님은 정말 가볍게도 떠난다. '걸음걸음', '사뿐히' - 얼마나 경쾌한가. 그런 님을 보면서 나는 상처를 받는다. '즈려 밟고' 가 달라니. 이건 뿌린 꽃을 밟아서 국물을 내 달라는 것 아닌가. 이렇게 우리는 님을 기꺼이 보낸 것 같지만, 기꺼이 세상과 타협한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깊은 내면에는 큰 상처가 남아 있다. 이로써 우리의 삶은 잃어버린 자기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다. 우리가 어쩌다가 기어들어온 이 세상(삼수갑산)은 영영 님과 고향을 회복하지 못하는 감옥이 된다. 고향을 잃어버린 우리는 열십자 한복판, 너무 많은 갈래길에 서서 갈 곳을 몰라 방황하고 있다.

관련시 : <산>, <삼수갑산>, <길>
<삼수갑산>은 압권이다. 들어서버린 삼수갑산에서 우리는 세상살이를 시작했다. 이곳은 ‘오다가다’ 들어선 곳일 수도 있고, 내 발로 기꺼이 찾아온 곳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님이 없는 이 곳에서 우리는 갈 길을 몰라 방황한다. 수많은 길이 열린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내 집’을 찾아갈 길, 님을 찾아갈 길은 ‘바이’ 보이지 않는다.

4.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해방 - 죽음과 부활)

죽어도 울지 않겠다지만, 이 대목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로 끊어 읽으면 죽을 때까지 울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님을 잃어버린 우리가 그 님을 회복하는 길은 죽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을 말 그대로의 죽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삼수갑산에 스스로 갇혀 버린 나, 님을 잃어버린 나를 죽이고 님을 회복하기 위하여 속세에 빠진 나를 기꺼이 죽이고 거듭나자는 것으로 읽고 싶다. 여기서 소월 시의 신화성이 드러난다. 영적으로 거듭남, 이것이 바로 ‘세례’의 의미다. 예수의 십자가는 낡은 나를 버리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이었다. 그러면서 예수는 우리에게도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권유했다. 그렇게 낡은, 타락한, 속세에 찌든, 이분법의 논리, 삼수갑산에 갇힌 나를 죽이고 자기 하나님을, 잃어버린 님을 회복하라는 권유다.

관련시 : <가는 길>,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산유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라면>
<가는 길>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을 노래한다. 세속의 삶에 아무리 미련을 갖더라도, 자연은 죽음의 상징인 가마귀들로 뒤덮여 있다. 그 가마귀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가~~~아, 가~~~아’
강물도 우리에게 재촉한다.
어서 따라오라고(앞강물), 따라가자고(뒷강물).
이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의 길, 영생의 길이 열린다. <금잔디>는 아예 죽음의 굿판을 벌인다. ‘우리 님 무덤 가에 핀 금잔디’, 이것은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이제 무
당의 굿거리가 풍성하게 펼쳐진다.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여러분도 어디 한번 굿거리처럼 읊어보시라. 나는 이 시를 보면서, 소월이 신내림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걸 들려주려는 거다. ‘죽으시오! 그래야 봄을 맞이할 수 있소. 님을 다시 찾을 수 있소. 그것이 곧 부활이오.’ <엄마야 누나야>는 다시 찾은 님과의 삶을 노래한다. <접동새>에서 죽은 님, 나를 떠난 님은 내가 죽음으로써 이렇게 다시 만난다. 대지의 회복!! <산유화>는 소월이 바라는 에덴의 상이다. 늘 태어나고 태어나고 태어나는 세계의 이치[生生之理]. 이 세계는 우리의 개성을 말살하는 곳이 아니다. ‘저만치 혼자 핀 꽃’처럼 우리는 스스로의 독자성으로써 세계를 이룬다. 진정으로 거듭난 자들이 이루는 세계다. <산유화>가 우리가 회복할 세계의 원형을 보여준다면, <바라건대는...>은 님(나 = 형제)을 회복한 우리가 이룰 새로운 세상을 그리고 있다. 삼수갑산은 ‘새라 새로운 탄식’의 세계였다. 그러나 님을 되찾은 우리가 더불어 살아갈 곳은 곧 대지다. 어떻게 찾을 것인가.

볼지어다,
希望의 반짝임은, 별빛의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갑자기 체 게바라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지니자.’ 희망의 반짝임, 별빛의 아득임을 보되, 그러나 우리는 온 몸으로 가슴과 팔다리에 용솟음치는 핏줄기(물결)로써만 대지를, 님을 되찾을 수 있다.

물론, 소월을 ‘한’의 시인이라 하더라도 괜찮다. 그리고 끝내 좌절하여 죽음을 노래한 시인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나는, 소월의 한과 죽음은 부활을 예비하고 있다고 본다. 그가 의도했건 않았건 상관없다. 어차피 시인은 세계의 속살을, 잃어버린 에덴을, 삶의 원형을, 진실한 나를 만났고, 그 만남의 의미를 따지기 전에 먼저 노래하는 사람이므로. 그들은 이 시대의 ‘샤먼’이므로...
사족을 달자면, 나는 예수나 붓다도 ‘샤먼’이라 본다. 그이들 역시 죽고 됨으로써, 잃어버린 하나님[부처님]을 발견했고, 그 자기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 삶을 살았으므로.

이제 나는 소월의 굿거리에 맞춰 우줄우줄 춤추는 삶을 꿈꾼다.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예전에 긁적였던 글 뒤지면서 이 글을 본다. 가고 싶은 데가 있는 모양이다 싶어 함 올려본다.]

내가 보기에 소월은, 뭐랄까, 神내리는 경험을 한 사람 아닌가 싶다. 그가 쓴 시는 크게 이런 흐름을 갖는다.
떠남(님의 상실) --> 미련 --> 방황 --> 해방(죽음과 부활)
그런데 이 흐름도는 <진달래꽃>의 흐름과 똑같다.

1.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떠남)

떠난 이유는 나 때문이다. 내 삶이 어느샌가 님(하나님; 부처님; 나만의 나)을 잃어버린 거다. 그러나 나는 그 님을 보내고도 제법 잘 살 걸로 믿었다. 이렇게 나는 에덴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오게 됐다. 이 대목은 만해의 <님의 침묵>에서 님이 떠나버린 상황과 비슷하다. 그러...나 만해는 졸지에 님을 잃어버린 반면, 소월은, 아니 우리는 님을 버렸다. 우리가 잃어버린 님은 나 때문에 떠난 거다. 먹고 살려고, 세상에 적응하려고, 출세란 걸 해 보려고, 돈이란 걸 벌려고... 이런 내 모습이 역겨워 내 속의 하나님이 나를 떠나버린 거다. 따라서 님의 상실은 나의 상실이기도 하다.

관련시 : <접동새>, <초혼>
<접동새>에서는 누이가 죽는다.
이 누이는 근원적 모태, 자궁, 곧 우리가 잃어버린 대지성을 상징한다. 이 대지성이야말로 진정한 내 하나님(부처님)이었다.
죽었다? 아니다! 우리가 죽여버린 거다.
<초혼>에서는 이 잃어버린 님을 불러보지만,
이미 우리는 회복할 수 없는 길로 접어들어 버렸다는 걸 보여준다.

2.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미련)

제법 호기 있게 님을 보냈지만, 그건 호들갑일 뿐이다. 내 속에는 끊임없이 미련이 남는다. 우리도 사귀던 님을 보낼 때, 허풍을 떤다. '자~알, 살아야 해. 정말, 잘, 살아야 돼.' 그 허풍의 표현이 '아름 따다'다. 그러나 그건 미련이 아주 크게 남는다는 징표다. 잃어버린 에덴을 늘 그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관련시 : <못잊어>,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처음 님을 보낼 때는 그 님 없이도 잘 살 줄 알았다. 금방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님을 떠나 들어온 이곳에서 우리는 그 님을 애타게 그리워한다. 어찌 아니겠는가. 님 없이는 내가 더 이상 나가 아닌 것을...

3.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방황)

님은 정말 가볍게도 떠난다. '걸음걸음', '사뿐히' - 얼마나 경쾌한가. 그런 님을 보면서 나는 상처를 받는다. '즈려 밟고' 가 달라니. 이건 뿌린 꽃을 밟아서 국물을 내 달라는 것 아닌가. 이렇게 우리는 님을 기꺼이 보낸 것 같지만, 기꺼이 세상과 타협한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깊은 내면에는 큰 상처가 남아 있다. 이로써 우리의 삶은 잃어버린 자기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다. 우리가 어쩌다가 기어들어온 이 세상(삼수갑산)은 영영 님과 고향을 회복하지 못하는 감옥이 된다. 고향을 잃어버린 우리는 열십자 한복판, 너무 많은 갈래길에 서서 갈 곳을 몰라 방황하고 있다.

관련시 : <산>, <삼수갑산>, <길>
<삼수갑산>은 압권이다. 들어서버린 삼수갑산에서 우리는 세상살이를 시작했다. 이곳은 ‘오다가다’ 들어선 곳일 수도 있고, 내 발로 기꺼이 찾아온 곳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님이 없는 이 곳에서 우리는 갈 길을 몰라 방황한다. 수많은 길이 열린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내 집’을 찾아갈 길, 님을 찾아갈 길은 ‘바이’ 보이지 않는다.

4.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해방 - 죽음과 부활)

죽어도 울지 않겠다지만, 이 대목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로 끊어 읽으면 죽을 때까지 울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님을 잃어버린 우리가 그 님을 회복하는 길은 죽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을 말 그대로의 죽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삼수갑산에 스스로 갇혀 버린 나, 님을 잃어버린 나를 죽이고 님을 회복하기 위하여 속세에 빠진 나를 기꺼이 죽이고 거듭나자는 것으로 읽고 싶다. 여기서 소월 시의 신화성이 드러난다. 영적으로 거듭남, 이것이 바로 ‘세례’의 의미다. 예수의 십자가는 낡은 나를 버리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이었다. 그러면서 예수는 우리에게도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권유했다. 그렇게 낡은, 타락한, 속세에 찌든, 이분법의 논리, 삼수갑산에 갇힌 나를 죽이고 자기 하나님을, 잃어버린 님을 회복하라는 권유다.

관련시 : <가는 길>,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산유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라면>
<가는 길>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을 노래한다. 세속의 삶에 아무리 미련을 갖더라도, 자연은 죽음의 상징인 가마귀들로 뒤덮여 있다. 그 가마귀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가~~~아, 가~~~아’
강물도 우리에게 재촉한다.
어서 따라오라고(앞강물), 따라가자고(뒷강물).
이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의 길, 영생의 길이 열린다. <금잔디>는 아예 죽음의 굿판을 벌인다. ‘우리 님 무덤 가에 핀 금잔디’, 이것은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이제 무
당의 굿거리가 풍성하게 펼쳐진다.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여러분도 어디 한번 굿거리처럼 읊어보시라. 나는 이 시를 보면서, 소월이 신내림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걸 들려주려는 거다. ‘죽으시오! 그래야 봄을 맞이할 수 있소. 님을 다시 찾을 수 있소. 그것이 곧 부활이오.’ <엄마야 누나야>는 다시 찾은 님과의 삶을 노래한다. <접동새>에서 죽은 님, 나를 떠난 님은 내가 죽음으로써 이렇게 다시 만난다. 대지의 회복!! <산유화>는 소월이 바라는 에덴의 상이다. 늘 태어나고 태어나고 태어나는 세계의 이치[生生之理]. 이 세계는 우리의 개성을 말살하는 곳이 아니다. ‘저만치 혼자 핀 꽃’처럼 우리는 스스로의 독자성으로써 세계를 이룬다. 진정으로 거듭난 자들이 이루는 세계다. <산유화>가 우리가 회복할 세계의 원형을 보여준다면, <바라건대는...>은 님(나 = 형제)을 회복한 우리가 이룰 새로운 세상을 그리고 있다. 삼수갑산은 ‘새라 새로운 탄식’의 세계였다. 그러나 님을 되찾은 우리가 더불어 살아갈 곳은 곧 대지다. 어떻게 찾을 것인가.

볼지어다,
希望의 반짝임은, 별빛의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갑자기 체 게바라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지니자.’ 희망의 반짝임, 별빛의 아득임을 보되, 그러나 우리는 온 몸으로 가슴과 팔다리에 용솟음치는 핏줄기(물결)로써만 대지를, 님을 되찾을 수 있다.

물론, 소월을 ‘한’의 시인이라 하더라도 괜찮다. 그리고 끝내 좌절하여 죽음을 노래한 시인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나는, 소월의 한과 죽음은 부활을 예비하고 있다고 본다. 그가 의도했건 않았건 상관없다. 어차피 시인은 세계의 속살을, 잃어버린 에덴을, 삶의 원형을, 진실한 나를 만났고, 그 만남의 의미를 따지기 전에 먼저 노래하는 사람이므로. 그들은 이 시대의 ‘샤먼’이므로...
사족을 달자면, 나는 예수나 붓다도 ‘샤먼’이라 본다. 그이들 역시 죽고 됨으로써, 잃어버린 하나님[부처님]을 발견했고, 그 자기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 삶을 살았으므로.

이제 나는 소월의 굿거리에 맞춰 우줄우줄 춤추는 삶을 꿈꾼다.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출처 : 흑곰의 블로그
글쓴이 : 흑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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