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시조 아우르기 (시조,시,수필) (2)
송 귀 영 (한맥 문학가 협회장)
근자에 들어 여러 시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고 있는 것은 훌륭한 작품성에 선망과 감동의 대상이 있는가 하면 어딘가 좀 부족한 작품들도 접하게 된다.
문학에 있어 표현력이 부족하면 개인적인 낙서 행위에 불가할 뿐이고 표현력은 있지만 예술성이 부족하면 단순한 잡문에 그칠 뿐이다.
고독의 감성에 심취한 어쩌면 세속의 울분을 부족한 갈망으로 가득 찬 새로운 언어로 소재의 탐구가 사찰과 스님 그리고 보살을 모티브로 삼은 시조 한수에 눈독을 드리고 시조 단 주변에서 객 필로 서성이던 중 연꽃 못에 노니든 준치의 한 마리 붕어를 애 둘러보게 된다.
원망이 없는 충만한 갈망으로 시조를 쓰고자 노력 하고 내면의 광범위함, 서정의 격렬함, 시어의 능숙한 표현들이 반어적이며 시적 요소가 담긴 고요 속에서 시상의 폭발을 일으키며 정형화로 독자들의 취향에 맞추려는 흔적을 경험한다.
시조의 편식에 식상해서 여기저기 눈을 흘기다가 뜻밖에 특이한 서정적 소재로 축조한 이태희의 시조 “사바의 짝사랑”을 읽고 실뿌리를 내리는 잔잔한 기슭 속 어느 고찰을 답사라도 하기위해 산행을 준비한다.
느긋이 신발 끈을 다잡아 매고 발걸음을 떼며 산세를 바라보는 호사까지 누린다.
녹음의 능선들이 너그럽게 일렁이는 산사의 주변을 내달리며 삼라만상이 뜰아래로 속마음을 고해하듯 늘어트리고 있다.
장삼소매 깃을 매무새로 엄숙하게 가부좌 틀고 사바세계를 거닐며 속세의 삶을 외면하는 저 방장 스님의 외로움을 만난다.
묵언수행에 잠입하여 속기를 씻어내지 못한 평자의 마음도 이미 산그늘과 더불어 기울고 있음이다.
삭발하고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은 청순한 대훈해 보살님에게 연정을 품고 그 마음을 훔치지 못한 청각사 방장스님의 순간적 음락이 칼끝에 자해하는 탈속의 애사를 더듬어 본다.
고독이 뭉텅 뭉텅 가랑잎 쌓이듯 산중 도량에서 외톨이로 부대끼는 인간 본질의 감성이 진리에 매몰되고 수도자의 고뇌를 터트릴 수 없는 순간적 고독과 함께 수도자의 진솔한 내면을 들춰본다.
꿈속의 시간과 공간은 늘 어렴풋한 것이지만 그것이 사찰의 내밀한 밀담이 겹치어 청각사 스님의 방장 윗목에 쌓인 따스한 연정이 안쓰러울 뿐이다.
애틋한 과거가 마중 나가지 못한 사찰의 일상은 적멸의 세월을 뒤울리게 하고 수도승에게 있어 사찰 안뜰에 피는 홍매도, 연못에서 피는 화중련도 다소곳이 고개 숙인 대훈해 보살님의 환한 미소가 틀림없다.
청각사 방장스님 무치의 짝사랑에
대훈해 보살님을 어깨너머 흠모하다
손 한번
잡지 못 하고
열반했다 하더이다.
그리다 삭아지는 깔 비의 붉은색깔
만나면 쌓여가는 삭정 같은 묶은 정이
서로의 마주친 눈매
눈만 껌벅 하더이다.
속세에 감긴 사슬 풀지 못한 가슴앓이
탑 돌아 찬불하며 사바에서 해후하다
열반한
불국정토에
생불로 서더이다.
이태희의 “사바의 짝사랑” 전문
탈속한 속세에서 내려다 본 중생들의 삶 자체를 청각사 방장 스님을 통해 전이 시켜 설화처럼 형상화 하였다.
사찰 경내에서 걷어 올린 묵시적 스님의 마음 안에는 그 지속성과 균질성이 돋보이고 심장으로 숨 쉬어 살고 있는 번연한 현실이 새삼 장하고 아름다워 기이하고 침잠한 전율로 치받이고 있다.
탈속한 대훈해 보살님도 속세의 한을 감당하지 못해 출가하여 부처님의 품에서 자비를 구원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이 견디기에는 참으로 가혹하여 속된 세상의 질긴 줄을 끊어 내기에 너무나 굵기도 하고 길며 질기다.
그래서 숯불처럼 새 까맣게 타들어가는 연소하지 못한 검은 연기속 가슴앓이가 비단 방장스님 개인의 속살만은 아닐 것이다.
마음이 고요하면 티끌세상이 바로 푸른 벽산에 살아있는 부처가 아니던가.
화자 속 대상의 청각사 방장 스님과 대훈해 보살님은 현세의 아름다운 청춘 남녀 간 연인이 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며 사찰 주변에서 유한의 자연물을 다른 대상으로 치환하는 정신 기체를 흠모로 상징화(Symbolization)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방장 스님과 대훈해 스님의 공간에는 “어깨 넘어”, “마주친 눈매”, “사바의 해후”가 이뤄질 수 없는 금기의 사랑으로 변주되어 이 작품의 주체적 핵심에 축으로 현현되고 있다.
억압된 충동이 “마주친 눈매”로 압축시켜 애심이 아련한 꿈으로 이어지는 좌절된 욕구의 한 단면을 내포하고 있다.
요람과도 같이 커다란 공간에 안기듯 누워 선명한 눈빛으로 가늠하기 어렵도록 숨겨진 숭고한 이면이 있음을 짐작하게 하기도 한다.
통속은 대개 인간의 노골적인 욕망을 보기 좋게 포장한다.
육체의 굴레에 갇힌 인간을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육체와 욕망이 주는 고통과 환희를 노골적으로 보이고 그 진부함을 넘어선다.
질감과 감촉은 생생하게 표현하는 것이 피와 살을 튀기며 고통과 함께 호흡한다. 몸부림은 묵직하고 갑갑한 아픔이 사찰의 수행자도 느낄 터이되 다만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바로 부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깨 죽지를 강타하는 죽비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부처는 “모든 유물은 변하는 것”이 진리이고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앞당겨 걱정하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완전 연소하라는 것이다.
무아는 고정된 내가 없기 때문에 어떠한 나도 만들 수 있고 공간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아무것이나 채울 수가 있다.
상처를 무의식에서 끌어와 환원시키고 메타포의 변화를 유도하며 주변의 사소한 일들이 시적 트라우마에 개입 시킨다.
이름 없는 능선처럼 유유한 여유로 전이됨으로써 사찰의 물리적 형태를 드러내어 존재를 확인시키면서 부정적인 경험들을 아쉬움으로 털어내고 있다.
현재를 긍정적으로 인지하려는 것이 인생의 대부분 통증이고 끊임없이 크고 작은 고통의 통증을 느끼니까 중생인 것이다.
시간은 사람과 사물을 변화시키고 연민의 흔적이 이유로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삶 자체가 사찰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흠모를 통해서 과거는 현재로 흘러 들어오는 것도 미래에 대한 답이 과거 속 연민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조를 통해 한갓 화설이라도 현재 아는 만큼 전달하고 있는 만큼 베풀면 베푼 만큼 알게 되는 묘한 사연의 체험을 보시 하고 있다.
작품을 보는 우리들 마음속에서 이뤄지고 상상을 자극하는 힘이야 말로 시대가 변해도 기술이 예술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것이다.
모처럼 시조다운 시조를 대하면서 떨리는 조그마한 행복을 느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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