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르는 인도의 시인이자 사상가로, 서정시집 《기탄잘리》로 1913년 아시아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벵골어 문학을 발전시킨 한편, 인도의 문화와 문학, 정신을 세계에 알렸다. 그의 사후 인도는 인도와 방글라데시로 분리되었는데, 각국은 각각 타고르의 시를 애국가로 채택했다. 또한 타고르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데, 그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동아일보〉의 요청으로 조선의 독립에 대한 염원을 담은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를 지어 게재했으며, 최남선의 요청으로 〈패자의 노래〉를 짓기도 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1861년 5월 7일 인도 콜카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라비(태양)'인데, 자라서 온 인류를 비추는 태양이 되라는 의미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아버지 데벤드라나트 타고르는 인도의 근대 종교 개혁을 이끈 브라마 사마지의 지도자이자 인도 독립의 정신적 지주 중 한 사람으로, 벵골인에게 '마하리시(위대한 성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전통 있는 브라만 계층 집안에서 라빈드라나트는 14명의 아이 중 막내로 자랐다. 부유한 환경에서 인도의 고전, 사상, 종교, 천문학을 비롯해 토착어인 벵골어와 산스크리트어, 영어 등 많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8세 때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가정교사에게 배우거나 귀족학교에서 공부하기도 했으나 격식과 규제를 싫어하여 늘 꾀병을 부리거나 수업 전에 도망쳐 산과 들에서 뛰놀았다고 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교육은 아버지에게 받았다. 특히 12세 때 아버지와 함께 인도 히말라야 여행을 다녀왔는데, 이때 인도의 역사, 위인, 천문학, 과학 등을 체험을 통해 배우고 고대 인도 시인들의 작품을 접한 경험은 후일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또한 진보적인 아버지로부터 영국 및 유럽의 문학, 정서를 자연스럽게 터득하기도 한다.
16세 때 발표한 첫 시집 《들꽃》으로 타고르는 '벵골의 셸리'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17세 때에는 형과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이 시기에 서구 낭만주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역시 정규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타고르는 1년이 조금 지나 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도로 돌아온 후 타고르는 시와 희곡, 소설, 수필 등 다양한 분야의 습작을 하면서 작가로서 역량을 키워 나갔다. 1890년 시집 《마나시(마음의 화현化現)》로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으며, 이후로도 서간집 《벵골의 섬광》, 희곡 〈우체국〉, 〈암실의 왕〉, 〈희생〉, 〈왕과 왕비〉 등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두각을 드러냈다.
타고르는 전통적인 산스크리트어 문학 규범에서 벗어나 일상적 구어를 사용했으며, 서구 문화의 전통 중 훌륭한 것들을 인도 문학에 접목시키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예이츠, 앙드레 지드를 비롯한 서양 문학 작품들을 번역하여 인도에 소개했다. 이로부터 인도 근대 문학이 태동하기 시작한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타고르의 이런 시도는 인도가 아니라 영국에서 먼저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인도 지식인들은 고전적 산스크리트어 문학 작품을 선호했으며, 일반인들은 신디어나 힌디어로 된 글을 주로 읽었고, 벵골어는 지방 속어로 간주하여 경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벵골어로 쓴 그의 작품각주1) 들은 유럽 문인들에게 인도의 전통 언어로 현상 세계의 모순과 혼돈, 인간의 내면을 통찰하고 있다며 각광받았다.
작가로서 활동하던 타고르는 1890년경부터 아버지에게 토지 관리를 위임받아 일했는데, 그러면서 벵골 농촌의 현실과 문화를 접하고 현실 문제에 눈뜨게 된다. 이에 따라 1901년에는 샨티니케탄각주2) 에 학교를 세워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전인 교육을 실시했는데, 이곳은 후일 국제적인 대학(비슈바바라티 대학)으로 성장한다. 또한 학교를 설립한 지 10년 뒤에는 학교 인근에 농업 공동체를 구성하여 농민의 정신적, 경제적 자립을 지향하는 농촌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초기 시들은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유미주의적 작품들이 많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점점 현실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으며, 1912년에 출간된 《한 다발의 이야기들》에는 농민들의 비참한 삶과 일상의 불행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1905년, 영국 식민정부가 벵골 분할령을 실시하자 이를 계기로 인도 내에서는 민족운동이 대두되었다. 타고르는 그 지도적 입장에 서기도 하는 등 인도 독립과 관련된 정치적 활동을 한다. 하지만 1915년에 간디가 귀국하여 스와라지(자치) 운동을 시작하면서 그에게 참여를 요청했을 때는 거절했다. 그는 독립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으나 유일한 가치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또한 간디의 노선이 자칫 국수주의적인 것이 될 수 있을 뿐더러 군중 통제가 불가능해졌을 때 생길 폐해를 우려했다. 타고르는 간디를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고 불렀고 간디는 타고르를 '구르데브(위대한 스승)'라고 불렀으나, 민족주의자였던 간디와 범세계주의적 관점을 지닌 타고르는 사상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타고르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두었지만, 무엇보다 벵골의 전원과 갠지스 강을 사랑하는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지녔다. 그리하여 많은 사회 활동을 하는 동시에 집필도 활발하게 했는데, 문학의 중심 제재는 그가 사랑한 벵골의 자연이었다. 타고르는 이런 제재를 서정성과 낭만성, 신비주의적 정서로 승화시키는 데 특히 뛰어났다. 《황금조각배》, 《경이》, 《꿈》, 《희생》 등의 시집이 대표적이다.
1900년대 초, 타고르는 아내와 두 아들, 아버지를 병으로 연이어 잃으면서 비탄에 빠졌다. 그는 이런 일을 겪으면서 점차 종교적으로 변모하여 많은 시를 썼는데, 이때의 시 대부분이 《기탄잘리》에 수록되어 있다. '님에게 바치는 노래, 신에게 찬미 드리는 송가'라는 부제처럼, 이 작품집에 실린 157편의 시는 생과 사의 문제를 다루는 한편, 인간은 어디까지나 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타고르는 이 시집을 일부 영역해서 영국인 친구에게 건넸고, 이로써 영국 문인들이 이 시집을 접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도 있었다. 예이츠는 이 시집을 언제나 손에서 떼지 않고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으며, "내가 얼마나 감동하는지 누군가가 알아볼까 봐 두려워 가끔 원고를 가려두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크게 감동해 영역본 출간을 추진했다. 1912년에 런던에서 《기탄잘리》가 출간되면서 타고르는 인도의 대표 시인으로 꼽히게 되었으며, 이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1915년에는 영국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았는데, 1919년 독립을 주장하던 인도인 시위대 수백 명이 영국군의 총격에 희생된 암리차르 학살 사건이 터지자 이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기사 작위를 반납했다.
노벨상을 받은 뒤 그는 미국, 일본, 프랑스, 싱가포르, 자카르타, 자바 등 세계 각국을 순방하며 제국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인도 독립을 지지하는 활동을 하는 한편, 시인으로서 자신의 시와 인도 시 문학에 대한 강연 활동을 했다. 또한 샨티니케탄 운영에 힘을 기울이면서 시집 외에도 〈인간의 종교〉, 〈제국주의〉와 같은 평론 등을 펴냈다.
1941년 8월 7일 인도 콜카타에서 사망했으며, 사후 간디와 함께 국부(國父)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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