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안동권씨

道溪村 入鄕祖 휘 士彬과 후예들(1)

권운영 2017. 8. 13. 09:25
道溪村 入鄕祖 휘 士彬과 후예들(1)


도계촌(道溪村)에 권씨(權氏)가 세거(世居)한지는 오백년이 넘었다. 안동권씨(安東權氏) 19세(世) 권사빈(權士彬-贈 領議政) 공이 외조부인 이조좌랑 정약(鄭若)의 별서(別墅)가 있던 이곳에 서기 1472년(成宗 壬辰)에 정착하였으므로 520여년이 된다. 이때부터 토지를 개척하고 동족 공동체적 촌락을 형성하였다. 동족집단이 한 곳에서 세거하면서 5백년을 이어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만한 연유를 도계촌의 입지조건을 택리지(擇里志)와 비교하여 살펴본다. 안동은 이백(二白-太白, 小白)의 남쪽에 위치한 이른바 신이 알려준 복된 지역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안동시 북후면 도천리 도계촌 전경(좌측에 종택과 오선정이 있고 우측에 도계서원이 보인다.


도계촌은 천등산 동쪽으로 능선을 뒤로 하고 마을 앞 옥계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배산임수형(背山臨水形) 마을이다. 안동과 영주 예천의 세 고을의 진산(鎭山)인, 우인(羽人-신선)이 학을 타고 내려와 놀았다는 학가산(鶴駕山)과 마주보고 서 있는 해발 574m의 천등산은 동북쪽으로 대곡산(大谷山-큰골) 과 백암산등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남쪽으로는 옥계천 상류의 대곡산에서 흐르는 물은 아흔 아홉골(九十九谷) 물을 합수하여 약수탕을 이루어 놓았다.

옥봉(玉峯)선생의 도계서원(道溪書院) 명륜당(明倫堂) 상량문(上樑文)은 “이 마을의 주변 지세를 설명함에 있어 「동쪽으로는 청량산(淸凉山) 육육봉(六六峯)이 구름밖에 솟아있고 산 아래 도산(陶山)에는 퇴계선생(退溪先生) 사당 있어 마음의 향불을 피워 남몰래 상통했네. 서쪽으로 학가(鶴駕) 천등(天燈) 두 봉우리 가지런히 보이니 도덕본체(道德本體) 유래함이 한량없으니 그 누가 거슬러 오묘함을 알아내랴」” 하였다





사빈과 의, 벌, 예, 장 5부자를 추모하기위한 정자



1. 議政公 (諱 士彬)의 도계촌 정착

19世 사빈의 호는 오선정(五先亭)이며 세종 31년(1449년)에 송야촌(松夜村)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24세인 1472년(성종 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을 하였으나 그 이상의 벼슬은 하지 않고 도계촌으로 내거(來居), 백년을 이양(頤養)하였는데 가거처향(家居處鄕)이 한가지로 참되고 공경스러워 높은 덕의 소문이 풍문에 퍼져 원근이 모두 존모(尊慕)하였다 한다. 고조부 판서공(諱 靷)은 이태조(李太祖)의 한성윤(漢城尹) 제수를 거절하고 사돈간이며 지기지우인 김상촌[金桑村, 金白米卒:刑曹判書로서 고려가 망한 것을 비관하여 자결함]과 함께 낙남(落南)하여 송야촌에 은거하면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은 의리를 지키고 송도(松都)를 잊지 않는 뜻으로 송파(松坡)로 자호(自號)하고 여생을 자적하였다.





생원공(휘 심행)의 재사 (북후면 두산리)


증조의 휘는 후(厚)로 창신교위 중랑장이며 조부의 휘는 17세 계경(啓經)으로 횡성현감을 지내고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考의 휘는 곤(琨)으로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이르렀는데(贈職:吏曹判書) 물러나 집에 은거하면서 친척을 어질게 대하고 붕우를 믿음으로 사귀며 자제들을 가르침은 옳고 바르게 하니 온 향당(鄕黨)이 칭선(稱善)하고 진고지향(眞古之鄕)의 선생으로 모셨다. 1478년(成宗 9년)에는 학행과 덕망을 갖춘 고장 선비 13인으로 화산(花山-안동의 고호) 우향계(友鄕契)를 창도하여 만드니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작시한 계축(契軸)은 조선조 전기의 계회(契會)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先考 또한 세조의 왕위찬탈에 울분하여 두문불출하고 「동풍촉혼산 서일노능한(東風蜀魂酸 西日魯陵寒」즉 동쪽에서 불어오는 촉(蜀)나라 혼은 맵고 서쪽 하늘에 노능(魯陵-단종의 능)은 차갑기만 하다고 읊었다.





생원공(휘 심행)의 재사 추원재 (북후면 두산리)


이와 같이 선대(先代)의 의행을 의정공 사빈이 참되고 공경스러움을 물려받았으니 1472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였으나 곧 환향하여 자적(自適)하고 덕을 쌓아 檥(野翁) 橃(冲齋) 欚 檣(霽村) 같은 四男一女를 당세의 거목으로 길러내고 내외손(內外孫) 28명과 200여에 이르는 증현손(曾玄孫)을 번성케 함으로서 세인의 선망을 받고 1535년(成宗 30년) 87세의 수를 누리고 봉화유곡(奉化酉谷)에서 고종(考終)하였으며 충정공이 귀히 됨에 따라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2. 道溪村의 五父子




생원공 휘 심행의 묘소


의정공 사빈이 1520년(中宗 15년) 차자(次子) 충정공(忠定公-橃)과 함께 봉화 유곡으로 이거하고 장자 야옹(野翁-檥)은 중년에 예천 저곡(渚谷맞질)에 거주하였으며 4자 제촌(霽村-檣)도 예천으로 옮기니 도계촌은 1550년 이후부터 다음 세대인 野翁의 장자 同正(審己)과 6자 生員(審行)의 자손들만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다.

同正公(諱 審己)는 7형제 중 맏이로 태어나서 의덕지행(懿德至行)의 업적이 있었을 것이나 양대(兩代)가 조몰(早沒)하였다





도계촌 종택


21世 生員公(諱 審行)의 호는 취규재(聚奎齋)이며 중종 정축(丁丑-1517년) 도계촌에서 출생하시어 6세에 모친상을 당하고 자랐으며 중부(仲父) 충정공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155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는 과거를 단념하고 향리에서 후조당 김부필(後凋堂 金富弼), 월천 조목(月川 趙穆), 이계 권대기(伊溪 權大器)와 교유하면서 한편 안동부사 권소(權紹)와 함께 시조묘소를 개사하고 한식에 제사를 올리는 규례를 제정하였으며 자제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안동향교(安東鄕校)의 중수(重修)등 조선(祖先)과 향리사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다했으나 당시의 안동현감 서익(徐益)의 모함을 받아 서울로 불려가기에 이르렀다. 이에 억울함을 호소하여 신원을 받을 즈음에 서울 객사에서 타계하였다. 생원공은 4남을 두었으니 장남 송와공 희(松窩公 暿), 차남 공 위(玉峰公 暐), 3남(叔)은 교수공 오(敎授公 晤), 4남(季)는 첨정공(僉正公) 호(皥)며 측실에 1남이 있으니 교(皎)다.




오선정 기문(북후면 도천리 오선정 내)


장남 희(暿)의 호는 松窩로서 인종 乙丑(1545)년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15,6세이 이미 경사(經史)를 통달하였으며 조금 자라서는 퇴계문하(退溪門下)에 나아가 심경(心經), 역학(易學), 계몽(啓蒙) 등을 배움에 퇴계선생이 그 탐구의 독실함을 칭찬한 바 있다. 향시(鄕試)에 6회, 별시(別試)에 5회, 강경(講經)에 1회 합격하였으나 복시(覆試)에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를 단념하였다. 공은 또 효성이 지극하여 선고의 병환에 상분(嘗糞)으로써 병세의 가감을 짐작하고 간병에 정성을 다하였다. 백담 구봉령(栢譚 具鳳齡)이 공의 학문을 아껴서 용궁훈도(龍宮訓導)에 천거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병이 일어남에 군자감정(軍資監正)에 보하고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차남 위(暐)의 호는 玉峰으로서 명종 壬子(1552)년에 출생하여 약관 21세에 동당초시(東堂初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다음 호에 상술한다.






말산재사 중수기 (북후면 두산리)


삼남 오(晤)의 호는 연어정(鳶魚亭)으로써 明宗乙卯(1555)년에 출생하여 癸卯 무과(武科)에 급제 선무랑(宣務郞)에 이르렀다. 공은 특히 글씨에 능하여 서성(書聖)으로 칭송되었으니 태사묘 위판(位版)과 교액(校額)과 시조묘 비문을 썼다.

四男 호(皥)의 호는 금오정(琴梧亭)으로서 명종 丁巳(1557)년에 출생하여 癸卯 무과에 급제 무학제독(武學提督)이 되었다. 중형(仲兄) 옥봉공과 연상(聯床) 강마(講磨)하여 풍유(風猶)의 성함과 문채(文采)의 빛남이 향성(鄕省)에 떨쳤으며 손오(孫吳)의 병법을 연습하여 씩씩하게 유장(儒將)으로서 호방(虎榜)에 올라 훈련첨정(訓練僉正)이 되었으나 이때는 임진병화(壬辰兵火)가 끝났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금오정(琴梧亭)을 짓고 임천(林泉)에서 자적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또 태사묘 중건시에는 감역(監役)의 중임을 담당하여 중형 옥봉공, 숙형(叔兄) 교수공과 함께 공사를 주도하였다.





금오정, 심행의 4남 호가 지은 정자



오선정 사빈(士彬)과 야옹공 의(檥), 충정공 벌(橃), 예(欚), 제촌공 장(檣) 등 도계촌의 5父子의 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5년 자손들이 정자를 건립하고 오선정(五先亭)이라 하였다. - 다음 호에 계속 -

<자료제공 : 안동시북후면도계촌 권용섭옹, 기사 : 현봉 권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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