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사(思無邪) / 임보
‘思無邪’는 시를 논하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회자되는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다.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수록되어 있는 공자의 전후 말씀은 이러하다. ‘시 삼백 편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詩三百 一言而蔽之 曰思無邪)’로 기록되고 있다. 시 삼백...은 곧 『시경(詩經)』을 이름이고, 『시경』 속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정확히는 305편)은 다 거짓됨이 없이 바르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리라.
잘 알려져 있듯이 『시경』은 공자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은대(殷代)로부터 공자가 살았던 춘추(春秋)에 이르기까지 전해오는 수 천 수의 민요들 가운데서 공자가 선별하여 하나의 책으로 묶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대략 멀리는 BC 10세기로부터 가까이는 BC 5세기까지의 작품들이 수록된 셈이다. 수백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수천 수의 민요들을 놓고 도대체 공자는 어떤 기준으로 작품들을 선별했을까? ‘思無邪’는 바로 그 선별의 기준을 이르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수천 수의 노래들 가운데는 본능적인 욕정을 노래하는 수준미달의 음탕한 것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고, 남을 미워하고 비방하는 투기 어린 노래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공자는 그러한 노래들은 다 제쳐놓고 건실하고 고상한 ‘思無邪’의 노래들만 골라잡았을 것이다. 공리적인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던 공자로서는 그럴 만도 한 일이다. 아니 어쩌면 그 당시 세상에 횡행하는 노래들이 너무 난잡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두다가는 백성들의 정서가 크게 문란해질 것을 염려하여 공자는 이를 순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바람직한 노래들만 선별하여 엮어낸 것이 『시경』이리라. 그렇다면 『시경』의 편찬은 속된 노래들의 숙청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서양의 플라톤과는 달리 공자는 시의 공리성을 믿고 있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시의 효용에 관해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양화편(陽貨篇)>의 ‘흥관군원(興觀群怨)’의 설이다.
小子何莫學夫詩 詩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
(그대들은 왜 시를 배우려하지 않는가.
시는 감흥을 자아내게 하고,
사물을 관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여럿이 함께 어울릴 수 있게도 하고,
또한 마음에 맺힌 응어리를 풀게도 한다.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는 일이며
또한 금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도 한다.)
‘흥(興)’은 감성적(感性的)인 정서, ‘관(觀)’은 이지적(理智的)인 관찰력, ‘군(群)’은 사회성 곧 詩나 시회(詩會)를 통한 교유성(交遊性)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원(怨)’을 어떤 이들은 치자(治者)의 실정(失政)에 대한 원망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국한된 의미로 한정하기보다는 마음속에 맺힌 불만스러움을 시로 푸는 비판 의식쯤으로 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그리고 뒤에 덧붙인 말들은 충효의 도덕성과 사물에 대한 지식을 익힐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말하자면 공자는 시를 인품을 교화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공자의 이러한 시관은 비록 수천 년 전의 생각이지만 오늘의 효용론적 입장의 문학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매달 많은 문예지들과 동인지들을 통해 수천 편의 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시단의 인구가 수천 명에 이르고 있으니 그들이 매월 한 편씩만 만들어 내도 그만한 작품이 생산되기에 충분하다. 좋은 작품들이 많이 생산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문제의 심각성은 적지 않다. 오늘의 자유시라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런 규제도 없다. 극단적인 표현을 쓴다면 비문(非文)도 시로 행세하는 곤란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시의 무정부상태라고나 할까.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시라는 이름으로 쓴 글은 다 시라고 불러줘야만 되는 실정이다. 그러니 시처럼 쓰기 쉬운 글이 없게 되었다. 가장 정련된 문학의 양식으로 신성시되던 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 시단의 꼴이 말이 아니다.
그래서 작품을 분별코자 하는 생각에서 그런 것인가. 해마다 화사집들을 묶어 내는 풍조가 일고 있다. 문학단체들이 그들의 구성원 중심으로 엮어 내기도 하고, 잡지사나 출판사가 ‘올해의 시’ 혹은 ‘몇 년도의 대표작’이라는 이름을 매달아 작품집을 편찬해 내기도 한다. 그런데 요즈음 편집자들이 작품을 선정할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선별하는지 자못 궁금하다. 작품을 보는 안목은 극히 주관적이어서 객관적인 기준을 설정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지 모른다. 그러나 주관적인 기준이라 할지라도 공자의 ‘思無邪’처럼 설득력을 지닐 수만 있다면 세상의 호응을 얻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
나는 문학의 양식(樣式)을 소중히 여기는 입장에서는 고전주의자의 편에 선다. 시는 절제의 문학이다.
자유시는 양식의 방임이 아니라 매 작품마다 그 작품의 내용에 가장 적합한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는 규제의 문학으로 보아야 한다. 정형시보다 자유시가 더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편 작품의 내용을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효용론자의 편에 선다. 작품의 언술이 윤리적인 가치를 지니든, 미적인 가치를 지니든 간에 독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즐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독자의 심성을 정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어지럽히는 작품이 있다면 이는 존재의의를 상실한 공해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오늘에 공자가 다시 있어 어지러운 이 시단을 한탄하면서 새로운 시경을 엮는다면 어떤 기준으로 작품들을 선별할 것인가. 역시 사무사(思無邪), 사무사(事無私)라고 호통을 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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