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내력과 성장 배경
이육사는 이황의 14세손으로 선비 정신이 강한 집안에서 이가호(李家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6대조 이구운(李龜雲)은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판을 지냈고, 고조부 이휘빈(李彙斌)은 통덕랑을 지냈으니 학문과 벼슬의 전통이 배어 있는 집안이었다. 육사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미쳤던 인물은 할아버지인 이중직(李中稙)으로 생각된다. 이중직은 손자인 이육사에게 일찍부터 글을 가르쳤고, 1909년 진성 이씨 문중의 신식 학교인 보문의숙(寶文義塾)의 초대 교장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자 노비들을 풀어주며 노비 문서를 소각하였고, 광복 운동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가문의 내력은 이육사를 비롯하여 그의 형제들이 모두 항일 투사로 활약하고, 3·1운동이나 6·10만세 운동 및 신사 참배 반대 운동까지 펼친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배출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육사의 친가뿐만 아니라 외가 역시 대단한 집안이었다. 이육사의 외할아버지 허형(許衡)은 의병장으로 이름난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사촌이었고, 1906년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을 암살하려던 사건에 연루되어 1909년 체포되기도 하였다. 외삼촌들도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는데, 특히 대한광복회의 군자금 운반책이었던 허규(許珪)가 이육사에게 미친 영향이 컸다. 외사촌 허은(許銀)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李相龍)의 손자 며느리가 되었다.
이육사의 집안은 친가와 외가 모두 강렬한 항일 투쟁의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그 속에서 자라난 이육사와 형제들이 항일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 질문1 이육사는 이황의 몇 세손인가요?
- 질문2 진성 이씨의 집안에서 세운 신식 학교 이름은 무엇인가요?
- 질문3 이육사는 의병장이었던 왕산 허위와 어떤 관계였나요?
- 질문4 이육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조부 이중직은 어떤 일을 했나요?
‘육사’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었고, 어렸을 때 원삼(源三)이라고 불렸다. 처가가 있었던 영천의 백학학원에 다니던 1922년에도 원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니 18세 청년 시절까지 원삼으로 불렸던 것이다.
이후 그가 주로 사용한 이름은 이활(李活)과 육사였다. 이활이라는 이름이 확실하게 확인된 첫 기록은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첫 시(詩) ‘말’을 이활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것이다. 중국을 드나들었던 1930년대 전반기에 그는 계속해서 이활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1935년 3월 『개벽(開闢)』에 글을 게재할 때도 이 이름을 썼다. ‘이활’이라는 이름은 1939년까지 지속적으로 쓰여졌다.
한편 육사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쓰인 것은 1930년 10월 『별건곤(別乾坤)』에 「대구사회단체개관(大邱社會團體槪觀)」이란 평문(平文)을 발표할 때이다. 이 글의 목차에서는 ‘이활’이라 썼는데, 본문에서 ‘대구 이육사(大邱二六四)’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이육사(264)는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의거에 연루되어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을 때의 수인 번호였다. 이후 그는 264라는 이름으로 글을 발표하여 자신의 투쟁 의지를 분명하게 드러내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1931년 1월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 시절에는 ‘육사(肉瀉)’를 썼다. 이는 ‘고기 먹고 설사한다.’는 뜻으로 당시대를 비아냥거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1930년 10월 광주 학생 항일 투쟁 1주년을 맞아 항일 시위가 일어나고, 대구 거리에 항일 격문이 나붙었다. 일제 경찰은 이 격문의 주범으로 이육사를 지목하여 구속하였다. 그는 3월에 출소하여 현재의 포항시 북구 기계면 현내리에 사는 집안 아저씨 이영우(李英雨)의 집에서 쉬며 건강을 회복하였다. 이때 매화 한 폭을 그린 다음 옆에 ‘육사(戮史)’라고 썼다. 이영우가 이 장면을 보고 “육사(戮史)는 역사를 죽인다는 표현이니,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말이 아닌가? 의미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차라리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표현이 되는 육사(陸史)를 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권하자 바로 ‘육사(陸史)’라고 바꿔썼다고 한다. ‘육사(陸史)’라는 이름은 1932년 의열단이 중국 난징[南京]에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이육사가 1기생으로 입학하면서 사용하였다. 이후 1933년 4월 1일자로 발간된 『대중(大衆)』 창간 임시호 목록에 ‘이육사(李陸史)’라는 이름이 공개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1935년 6월 『신조선(新朝鮮)』에 시를 발표한 이후에는 거의 대부분 ‘육사(陸史)’라는 이름이 ‘이활(李活)’이라는 이름과 같이 사용되었다.
이처럼 이원록은 일제 지배에 대한 반감을 강하게 품고 이에 강력히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몇 번에 걸쳐 수정하였다. ‘육사’라는 이름은 그의 강력한 항일 의지가 드러난 결정체였던 것이다.
- 질문1 이육사의 본명을 말해 보시오.
- 질문2 이육사가 처음 감옥에 들어갔을 때 수인 번호를 말해 보시오.
- 질문3 이육사가 사용하였던 이름을 차례대로 말해 보시오.
- 질문4 ‘육사’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를 말해 보시오.
배움의 과정
선비적 전통을 지닌 이황 가문의 후손인 이육사는 여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소학(小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주요 유교 경전을 외울 정도로 수준 높게 한문을 공부하였다. 그의 옆집 친척이자 동기가 “육사가 사서를 모두 마쳤다.”는 증언을 하고, 그가 1935년 일본 경찰에게 자신의 종교를 ‘유교’라고 대답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육사가 신교육을 처음 접한 것은 고향에 세워진 보문의숙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보문의숙은 도산서원의 토지를 상당수 들여 1909년 12월에 설립된 진성 이씨 문중 중심의 신식 학교였다. 보문의숙은 공립학교 설립의 인가를 받아 1918년 4월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이육사는 보문의숙을 다니다가 도산공립보통학교로 편입하여 1919년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도산공립보통학교를 마친 이육사는 16세가 되던 1920년 대구로 이사하였다. 대구에서 서화가로 이름이 높던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로부터 그림을 배워서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 이육사와 친하게 지냈던 신석초(申石艸)는 “육사는 붓을 들면 글씨도 능하였고, 난초나 매화 절지 따위도 곧잘 그렸다.”고 회상하였다.
이육사는 17세가 되던 1921년 영천의 대지주 안용락(安庸洛)의 딸과 결혼하였다. 결혼 후 장인이 학무위원으로 있던 영천군 화남면 안천리에 있는 백학학원(白鶴學院)을 다녔다. 이 학교는 초등 과정의 학원이었는데, 초등 졸업생들을 중등 과정에 보내기 위한 예비 교육과정으로 보습과를 병설하였다. 이미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이육사는 보습과에서 수학하였을 것이다. 백학학원 보습과를 마치고 이 학교의 교원으로도 근무하였다. 백학학원에 다니는 동안 윤세주(尹世胄), 조재만(曺再萬) 등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들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9개월 동안 백학학원 교원으로 근무한 후 1923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경찰 기록 의하면, 그는 일본 도쿄 쇼우소쿠 예비교[東京正則豫備校]와 니뽄 대학[日本大學] 문과 전문부(文科前門部)를 다니다가 중단했다. 반면 그의 「신문조서」에는 간다구[神田區] 킨죠우 고등 예비학교[錦城高等豫備學校]에 1년간 재학했다는 진술도 있다. 하지만 그는 건강 문제 때문에 1925년 1월 귀국하고 말았다.
일본에 있는 동안 이육사는가 조선인 아나키스트 모임인 흑우회에 가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항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이육사의 생애를 고려한다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1923년 9월에 있었던 간토[關東] 대지진 발생 후 일본인이 조직한 자경단(自警團) 등에게 6천 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하는 현실을 목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그저 학교만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 유학 동안 이육사가 경험한 것은 이후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귀국 후 이육사는 대구 달성공원 입구에 있는 조양회관(朝陽會館)에 출입하였다. 조양회관은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을 조직하고 활동하던 대구 부농의 아들 서상일(徐相日)이 주도하여 건립되었다. 이 건물의 설립 목적은 청년들을 교육하고 민족 사상을 고취하는 데 있었다. 대구 구락부, 동아일보 지국, 청년회, 대구 운동 협회 등 문화운동의 단체들이 모여들어 조양회관은 당시 대구 문화운동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육사가 대구의 지도적 인물들이 모인 이곳을 드나들며 문화 활동에 관계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26년 봄 이육사는 ‘파리 장서’에 최연소로 서명했던 이정기와 함께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에서 그는 [베이징[北京] 대학 사회학과 또는 쭝구어[中國] 대학 상과에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여러 기록으로 볼 때 그가 대학에서 공부한 것은 확실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중국에 유학 중이던 1927년 4월 이육사는 유월한국혁명동지회(留粵韓國革命同志會)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는 한인 독립운동 조직으로는 광저우[廣州]에서 가장 큰 것으로 회원 수가 200명이나 되었다. 손두환(孫斗煥)과 김원봉(金元鳳)이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조직과 선전 활동에 주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육사는 1927년 8월에 귀국하였다.
이처럼 이육사는 6살 무렵 한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다가 근대 교육을 받았고, 일본과 중국에 유학하는 등 계속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채워 갔다. 그가 단지 공부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었다. 조국의 독립에 몸 바친 인물들과 인연을 맺었고,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그 역시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 질문1 이육사가 23살인 1927년까지 공부했던 교육 기관을 시기 순으로 모두 열거해보시오.
- 질문2 이육사가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인연을 맺은 인물들은 누구인가요?
- 질문3 이육사가 일본 유학 이후 출입하며 대구의 지도적 인물들을 만났던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4 이육사가 광저우에서 가입한 한인 독립운동 조직의 명칭을 말해 보시오.
장진홍 의거와 이육사
이육사가 중국에서 귀국한 후인 1927년 10월 18일에 장진홍 의사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투척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폭발로 일제 경찰관과 은행원 5명이 중상을 입었고, 은행 유리창이 70장 넘게 깨졌다. 장진홍은 변장하고 대구를 벗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자취를 감추었다.
사건의 단서조차 잡지 못한 일본 경찰은 당시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이때 이육사와 그의 형 이원기, 동생 이원일, 이원조 등 4형제도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으로 조작해 낸 경찰과 검찰의 시나리오로 이원기만 한 달 남짓 후 석방되고 나머지 형제들을 1년이 훨씬 넘게 곤욕의 세월을 보냈다. 1년 4개월이 지난 1929년 2월 장진홍이 일본 경찰에 붙들렸지만, 이육사는 장진홍이 체포된 지 3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이육사가 이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진범을 찾지 못한 일본 경찰이 이육사 형제를 잡아들인 것은 이미 이들이 일제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간주될 만큼의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진범이 체포되고도 3개월 넘어서 석방된 이육사는 일제가 상당한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될 것이다. 그가 당한 고문은 매우 참혹해서 피 옷을 받아 낼 정도였다. 당시 그의 수인번호가 264였고다. 264를 자신의 필명으로 삼은 것은 이 사건이 일제에 대한 그의 저항 의식을 한층 강화시키는 계기였다는 것을 알려 준다.
- 질문1 이육사가 처음으로 감옥살이를 하게 된 계기가 되는 사건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범은 누구인가요?
- 질문3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범이 체포되고도 이육사가 3개월씩이나 더 옥살이를 당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 입교와 활동
이육사는 1930년 2월 『중외일보』 기자로 취직하여 활동하였고 이듬해인 1931년 6월에 『중외일보』가 문을 닫자, 8월에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옮겼다. 당시 뜻있는 기자들은 언론을 통해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고 있었기 때문에이육사도 민족의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신문 기자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중외일보』 기자로 활동하던 1930년 1월에 일본을 배척하는 격문이 뿌려지자 일제는 배후 조종자로 그를 지목하였다. 그는 동생 이원일과 함께 붙들렸다가 그해 3월에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그는 중국행에 올랐고 중국에 머무르는 동안 『중외일보』가 문을 닫자 『조선일보』 대구지국 소속으로 전근하였던 것이다. 이육사는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인연을 맺었던 윤세주를 만나고 1931년 말에 귀국하였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같은 영천 출신으로 의열단의 창립 멤버이자 핵심 인물이었다.
귀국 후 이육사는 『조선일보』 기자 활동을 계속 하다가 1932년 4월 다시 중국으로 향했다. 그는 윤세주와 함께 의열단이 세운 조선 혁명군사정치학교(이하 군사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이 학교 설립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국의 절대독립’이었다. 학생들은 오전 6시에 기상하여 밤 9시 취침에 들 때까지 빽빽한 교육과정을 밟아야 했다. 오전에는 학과 교육, 오후에는 야외 훈련으로 편성된 실습 교육, 저녁에는 중국어 교육을 받았다. 교육과정에는 정보, 첩보, 파괴, 선동 등 항일 투쟁에 필요한 특수 공작을 수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 요령과 활동 수칙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교육을 받으며 문학적 성향이 강한 이육사는 점차 군사 간부로 변화되어 갔다.
1기 졸업생에게 주어진 임무는 만주 또는 국내에 파견할 요원이 되는 것과 2기생 교육을 위한 교관이 되는 것이었다. 이육사는 윤세주와 같이 교관 요원의 임무를 받았다. 그러나 이육사는 교장 김원봉에게 국내 파견을 자원하여 귀국하였다. 귀국하기 전에 이육사는 난징과 상하이[上海]를 차례로 거치는데, 상하이에서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을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하였다.
1933년 7월 국내로 잠입한 이육사는 주로 서울에 머무르다 1934년 3월 20일 조선일보사 대구지국 특파원으로 채용되었다. 군사간부학교 졸업생으로서 부여받은 국내 공작원으로서의 사명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대구로 출발하기 직전인 3월 22일 그는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군사간부학교 졸업 후 별다른 활동이 없었기 때문에 6월 23일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이육사는 본격적인 글쓰기를 하여 평론가, 수필가, 시인으로서의 삶을 전개하였다. 그는 자신의 삶을 문단 생활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언론 단체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대구청년동맹의 재조직에 노력하는 등 청년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다가 1943년 4월 본격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베이징으로 향했다. 당시에는 문단의 대표급 인물들이 친일파가 되어 일본의 승리를 위해 청년들의 전쟁 동참을 촉구하고 나서는 판국이었다. 이러한 ‘문학계의 친일화’라는 조류에 저항하여 또다시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이다. 중국으로 간 이육사는 무기를 국내로 반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43년 7월 어머니와 큰형의 사람이 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인 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헌병대에 검거되었다. 그는 중국으로 압송되어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감옥에서 일제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고 순국하였다.
- 질문1 이육사가 기자 활동을 했던 신문사를 모두 말해 보시오.
- 질문2 이육사에게 군사간부학교 입학을 권했던 인물은 누구인가요?
- 질문3 군사간부학교 학생의 하루 생활을 말해 보시오.
- 질문4 군사간부학교를 졸업한 이육사가 상하이에서 만난 중국의 문인은 누구인가요?
- 질문5 1943년 이육사가 다시 베이징으로 건너갈 무렵 국내의 유명한 문인들은 어떤 활동을 했나요?
- 질문6 이육사가 마지막으로 중국에 가서 세운 계획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