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에서 태어나셨고
독립운동가, 교육자, 시인이셨습니다
그리고, 윤봉길의사는 고려의 명장 윤관의 후손입니다.
고려의 명장 윤관
역시 애국자 집안 입니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 3·1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 합니다
이어 최병대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매곡 성주록의 서당 오치서숙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어요
오치서숙에서 윤봉길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히게 되지요
학식이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과 결혼하였어요.
결혼도 하신 분이 나라를 위한 결의로 목숨을 바치시다니,,,,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하기도 했답니다.
내가 생각한것 이상으로 상당한 학식을 갇추셨던 분이 였어요
1928년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 <옥수> <임추> 등을 발간해요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 한학수업을 마치게 되지요.
청년 시절에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았데요
1929년 농촌계몽활동, 농촌부흥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운동 등을 시작하였어요.
참으로 건실한 청년이지요?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가셨습니다.
<양손에 폭탄을 들고 태국기 앞에서 절명서를 가슴에 붙인 채 촬영한 윤봉길 의사>
중국 상하이에서 채소 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한후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일왕의 생일연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
협의 끝에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하게 됩니다
당시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이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고,
이는 그 동안 장제스가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조국을 생각하시는 훌륭하신 분들 덕분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어서 너무도 감사합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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