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금닭이 품고 있는 알이 놓인 자리쯤 될 것이다. 명당을 입증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다. 그 터가 얼마나 화를 입지 않았는가다. 닭실마을의 명당에는 충재고택이 있다. 충재고택에는 1528년에 건축된 청암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그곳에 거북바위가 있어서 상서로운 기운까지 돈다.
충재고택은 닭실마을 가장 안쪽에 있다. 더 안쪽으로는 어떤 집도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정자 누마루에는 앞 들판이 보이고, 산자락을 따라 내려가는 개울물도 보인다. 충재고택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온다. 예전에는 그 마당에 행랑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져 마당만 넓어졌다. 사랑채로 둘러싸인 안채는 따로 안마당이 있는 ㅁ자 구조를 하고 있다. 충재고택 마당 한켠에는 유물기념관이 있다. 충재가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금속활자 주자전서가 보관되어 있고, 그의 문집이 보관된 곳이다. 유물관이 너무 커서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보관할 유물이 많아서 그렇다면 이해해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터를 잡고, 정자까지 넣어둔 충재의 미의식에는 턱없이 못미치는 건물이다. 그 유물관 앞을 지나면 안채 마당과 담장을 분리된 공간이 나온다. 그 안쪽에 청암정이 있다. 청암정은 실로 아름답다. 한 집안의 울타리 안에 있는 정자로서 우리나라 최고 간다고 추켜세울 만하다. 사실 이 청암정 때문에 닭실마을을 오고, 봉화를 들르고, 경상북도 북부지방을 찾는다. 지난 여름 큰물이 질 때도 가고, 가을 송이축제 때도 다녀왔다. 무엇을 보기 위해서도, 사사로이 개인별장을 가질 필요가 없다. 청암정에 잠시 머문 것만으로 영원한 마음을 별장을 얻게 된다. 청암정은 집 밖의 물길을 끌어들여 인공연못을 만들고, 연못 안에 들어있는 웅대한 거북바위 위에 정자를 올려놓았다.
거북바위의 둘레에 물이 있으니, 마치 거북이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형국이다. 정자는 집안에 있는 것 치고는 제법 너르다. 정면 4칸에 측면 2칸짜리 단층누각이다. 정면 한칸에 연결된 측면 2칸에는 난간과 함께 누마루를 달았다. 정자가 올라앉는 바위는 검다. 봄빛이 비추면 이끼가 되살아나 푸른빛을 띨 테지만, 겨울이라 검다. |
충재 권벌(1478~1548)은 안동 출신이다. 견훤과의 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기여한 삼태사의 한 사람인 권행의 20대 손이다. 성균생원을 지낸 임사빈의 둘째 아들로 안동 도촌리에서 태어났다. 19살에 진사에 합격하고, 30살에 문과에 급제를 하여 관직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권벌이 닭실마을에 터를 잡은 것은 삼척부사로 부임할 무렵이다. 그가 삼척부사를 자청한 것은 연로한 아버지를 가까이서 모시기 위해서였다. 봉화에 터를 잡은 것은 선대(先代)의 외가 쪽으로부터 분재받은 농토가 있었기 때문이다. 충재는 오랫동안 관직에 머물렀지만, 관직 생활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중종 15년(1520년)에 기묘사화에 연류되어 처음 파직을 당한다. 그때 충재는 봉화 닭실로 낙향하여 유유자적한 생활을 누린다. 그가 1528년에 지은 청암정이, 그가 얼마나 평화로웠는지를 잘 웅변해 준다. 충재는 이곳에서 13년을 머물다가 1533년에 다시 정계로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충재는 또 한번의 사화에 휘말리게 된다. 명종 즉위년에 윤원형이 주도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파직이 된다. 그리고 2년 뒤에 벌어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71살,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행복한 결말은 아니었다. 충재와 가까웠던 인물은 경주 양동마을의 회재 이언적(1491~1553)이다. 충재는 이언적보다 13살이 연상인데, 을사사화로 화를 입었을 때, 충재는 우찬성이었고 회재는 좌찬성이었다. 회재는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재(齋)자 돌림의 호를 쓰고, 정치적인 신념을 같이하고, 그리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는 모습까지 서로 닮았다. 이런 각별한 인연으로 경주 양동마을의 여주 이씨 집안과 봉화 닭실마을의 안동 권씨 집안은 “성부동일실(姓不同一室)-성은 다르지만 한 집안이라”이라며 가깝게 지내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회재 이언적은 동방 5현에 동국 18현으로 모셔져 성균관에서 불천위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충재는 성리학의 계보 속에서 그 이름이 희미하다. 권정우 씨에게 조심스럽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동국 18현의 많은 이들이 그렇지만, 제자를 잘 길러야 한다. 정치사업보다는 교육사업을 얼마나 잘했느냐가, 평가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충재는 관직생활을 오래했기에 후진 양성에 힘쓸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영남 사림이면서도 기호학파 쪽에서 호평받는 인물이었다. 율곡은 충재를 두고 충절이 맑은 하늘의 해와 달과 같다고 평했다. 청암정에서 나와 닭실마을 앞 들판을 가로질러 개울을 따라 산자락을 감아돌아가면, 다시 한번 탄복할 만한 광경과 마주치게 된다. 수태극 산태극으로 감아돌아가는 은밀하고 아름답고 청정한 계류변에 배처럼 정박한 정자가 있다. 석천정사(石泉亭舍)다. 청암정이 정적(靜的)이라면, 석천정은 동적(動的)이다. 굽이치는 물살과 하얀 암반 그리고 키 큰 노송과 계곡 바람소리 속에 정자가 둥실 떠가는 것 같다. 처음 이곳을 발견한 이는 얼마나 좋아했을까? 정자를 세운 사람은 충재의 아들인 권동보다. 그 세월도 450년이 흘렀다. 세월은 흘렀고 사람은 갔지만 정자는 여전하다. 계곡물도 바위들도 물소리도 여전하다.
권벌과 권동보, 두 부자가 알아본 자연, 그들은 자연 속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듯 인간의 집을 세워놓았다. 그들의 삶터였고, 휴식공간이었던 자연 속에, 일년에 한번만이라도 들어와 볼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이다. 그런 자연을 발견하고, 오늘까지 지켜준 닭실마을과 권씨 집안에 감사할 따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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