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안동권씨

[스크랩] 봉화 닭실(酉谷)마을 충재(沖齋) 권벌(權?) 관련 유적 청암정(靑巖亭) 에서

권운영 2016. 5. 14. 10:42








 

봉화 닭실(酉谷)마을 충재(沖齋) 권벌(權橃) 관련 유적 청암정(靑巖亭) 에서

(2013/04/29 현재)


평해손씨(平海孫氏) 평해 숭덕사(崇德祠) 2013년도 춘향제(春享祭) 참석후
귀경길에 들러본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에 있는 충재(沖齋) 권벌(權橃)관련
유적인 청암정(靑巖亭)  전경 입니다. 닭실(酉谷)마을은 1380년 충재 권벌의 선조가
처음 개척한 곳으로 마을모양이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세라 닭실마을이라 부르게 된 곳으로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이 지역을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경승지로 지적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역사문화
경승지 입니다. 안동의 내앞, 풍산의 하회, 경주의 양동과 함께 삼남지방의 '4대명당'으로
꼽은 길지(吉地)이며, 마을의 외관이 풍수지리학에서 귀히 여기는 '금빛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금계포란)'을 하고 있다 하여 '닭실'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만 애초의
마을이름은 '닭'의 경상도 방언인 '달'을 사용하여 '달실'이었습니다. 안동권씨의 집성촌인
닭실마을은 조선중기의 문신인 '충재' 권벌선생이 기묘사화로 벼슬에서 물러난 후 낙향하여
'터'를 잡고 살던 곳 으로, 거북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운 청암정(靑巖亭)은 마을 앞을
흐르는 석천계곡에 있는 석천정(石泉亭)과 더불어 유곡마을을 대표하는 경관으로, 주변의
울창한 송림(松林), 계류(溪流), 아름다운 수석(水石) 등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뛰어난 명승지 입니다.


 

 

 

 

 

 

 

 

 

 

 

 

 

 

 

 

 

 

 

 

 

 

 

 

 

 

 

 

 

 

 

 

 

 

 

 

 

 

 

 

 

 

 

 

 

 

 

 

 

 

 

 

 

 

 

 

 

■봉화 닭실(酉谷)마을


달실마을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에 위치한 우리나라 전통마을 중의 한 곳으로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된 ‘내성유곡권충재관계유적’이다. 이 마을은 약 500여 년 전,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충재(沖齋) 권벌( : 1478~1548)선생께서 마을에 입향하신 이후 지금까지도 후손들이 지켜오고 있는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나지막한 산과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지형인 이곳은, 나라를 위한 충(忠)사상이 지배하던 곳이다. 평소에는 농사를 근본으로 하여 학문에 힘쓰다가, 나라가 위태해질 때면 목숨을 다해 나라를 지키던 사람들이 살아온 곳이다.
특히, 대한제국말기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의 주권침탈기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힘을 아끼지 않아 ‘충절의 마을’이라는 별칭까지 얻기도 했던 곳 중의 한 곳이 바로 이곳 ‘유곡1리 달실마을’이다.현재는 마을의 구성원들 대부분이 농사를 주로 하며 생활하고 있다.

 

●충재(沖齋) 권벌(權橃) 선생 약력

 
충재 권벌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훤정(萱亭),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연산 2년(1496) 진사시에 入格하고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과 삼사(三司) 및 승정원(承政院)과 각 조(曹)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고위관직에 재직할 때는 대의(大義)를 위해서 일신(一身)의 안위(安危)을 돌보지 않으며, 이로 인해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을사사화(乙巳士禍)의 화(禍)를 연이어 입었으나, 선비로서의 강직함과 격조를 간직했으며 평소 『근사록(近思錄)』을 애독하시며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까지 하였다.


특히 을사사화 때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홀로 충순당(忠順堂)의 문정왕후(文定王后)에게 나아가 윤원형(尹元衡)을 위시한 소윤(小尹)일파의 전횡(專橫)과 무고하게 화를 입은 윤임(尹任),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의 삼대신(三大臣)을 구하는 논지의 주장을 강력히 피력하였다.


당시 올린 「충순당입대계사(忠順堂入對啓事)」와 「논구삼신계(論救三臣啓)」는 그 내용이 너무나 충직하여 후세에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명종 21년에 신원(伸寃)되어 관작(官爵)이 복원되고 선조조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봉화(당시는 행정구역상 안동)의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 (봉화 靑巖亭과 石泉溪谷 ) 

 

-종 목 명승  제60호 
-수량/면적 232,595.82㎡
-지정(등록)일 2009.12.09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산131번지 등 
-소유자(소유단체) 국·사유
-관리자(관리단체) 경북 봉화군수

 

거북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운 청암정(靑巖亭)과 마을 앞을 흐르는 석천계곡에 있는 석천정(石泉亭)은 유곡마을의 대표경관으로, 주변의 울창한 송림(松林), 계류(溪流), 아름다운 수석(水石) 등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뛰어난 명승지이다.  유곡(酉谷)마을은 1380년 충재 권벌의 선조가 처음 개척한 곳으로 마을모양이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세라 닭실마을이라 부르게 된 곳으로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이 지역을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경승지로 지적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역사문화 경승지이다.


●권벌 충재일기 (權橃 沖齋日記) 


-종 목 보물  제261호 
-수량/면적 6책
-지정(등록)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44 (유곡리)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권종목
-관리자(관리단체) 충재박물관

 

조선 중종조의 학자이며, 관료로 이름을 떨친 권벌(權橃, 1478~1548)의 친필일기이다. 권벌의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沖齋), 중종 2(1507)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관료생활을 하다가, 중종 14(1519)년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0여년간 야인으로 있다가 동왕 28(1533)년에 다시 소환되어 벼슬이 우찬성에 까지 올랐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던 해에 또 다시 을사사화를 당하여 삭주로 귀양갔다가 명종 3(1548)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충재일기는 권벌이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할 때 직접 기록한 친필로서 한원일기(翰苑日記) 2책, 당후일기(堂后日記) 1책, 승선시일기(承宣時日記) 2책, 신창령추단일기(新昌令推斷日記) 1책 등 모두 6책이다.

 

ㅇ 한원일기는 예문관 검열로 재직할 때의 일기이다. 1책은 중종 3(1508)년 1월 5일부터 9월 20일, 2책은 12월 1일부터 동왕 4(1509)년 9월 14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한원은 문한서(文翰署)·한림원(翰林院)으로 불렸던 예문관의 별칭이다.

 

ㅇ 당후일기는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재직시에 적은 일기로 중종 5(1510)년 3월 1일에서 3월 30일까지의 기록이다. 당후(堂后)란 승정원 주서가 거처하던 방으로 승정원 뒤에 위치해 있다 하여 주서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ㅇ 승선시일기는 승정원 승지로 재직할 당시의 공사를 기록한 일기로 1책은 중종 13(1518)년 5월 15일부터 7월 5일, 2책은 7월 10일부터 11월 6일까지의 기록이다.

 

ㅇ 신창령추단일기는 승정원 주서 재직 시 서얼 출신 종친 신창령(新昌令) 이흔(李訢)의 역모사건 전말을 추단한 기록으로 중종 4(1509)년 10월 28일에 작성되었다.


이들 일기는『중종실록』을 편찬할 때에 자료로서 채용되었으며, 권벌의 문집인 충재집(沖齋集)에도 일부 실려 있다. 당시 관료로서의 생활실태와 중앙정부의 일상 행사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 자료는 드물기 때문에 유희춘의『미암일기(眉巖日記)』와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등과 함께 귀중한 사료가 된다. 더구나 권벌의 뛰어난 문장과 필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권벌 종가 전적 (權橃 宗家 典籍) 

 

-종 목 보물  제896호 

-수량/면적 일괄(184책)
-지정(등록)일 1986.11.29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44, 충재박물관 (유곡리)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권종목
-관리자(관리단체) 충재박물관


조선 중종 때의 명신이며 학자였던 충재 권벌(1478∼1548) 선생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권벌은 연산군 2년(1496)에 진사가 되고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간, 정원과 각 조의 판서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인종 1년(1545)에 우찬성과 판의금부사를 지냈으며, 을사사화 때 소윤일파에 의하여 삭주로 유배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선조 때 억울함이 풀어져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봉화의 삼계서원에 모셔졌다.

 

전적은 약 3,000책이 소장되어 있는데, 지정된 것을 살펴보면『우향계축』(1478),『사마방목』(1406),『문과잡과방목』(1507),『충재자필일기』등 15종 184책이다.  과거 합격자명단인 『사마방목』은 보물 제524호인 『정덕계유사마방목』보다 17년이 앞선 것이고, 『문무잡과방목』 역시 지금까지 간행되어 전해지는 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물 제603호로 지정된 『정덕계유문무잡과방목』보다 6년이나 오래된 본이다. 『을사정난기』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며, 『충재일기』는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진 역사적 자료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는 조선 전기 정치, 사회,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조선중종조(朝鮮中宗朝)의 명신(名臣)이며 학자(學者)였던 충재(沖齋) 권벌선생(權벌先生)의 종가(宗家)에 소장(所藏)되어 있는 전적중(典籍中) 보물(寶物) 896호(號)로 일괄지정(一括指定)된 것이다.

 

충재권벌(沖齋權벌)(성종(成宗)9, 1478∼명종(明宗)3, 1548)은 자(字)는 중허(仲虛), 호(號)는 충재(沖齋)또는 훤정(萱亭), 본관은 안동(安東), 사빈(士彬)의 아들 1496년(연산(燕山)2)에 진사가 되고 중종(中宗)2년(1507)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검열(檢閱)을 지낸 뒤, 대간(臺諫) ·정원(政院)과 각조(各曹)의 판서(判書) 등을 고루 지내고,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 명(明)에 다녀왔다. 인종(仁宗)1년(1545)에 우찬성(右贊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내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이 되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소윤일파(少尹一派)에 의해 찬배(竄配)되고 배소(配所)인 삭주(朔州)에서 별세(別世)하였다. 선조초(宣祖初)에 신원(伸寃)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으며, 봉화의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정(祭亭)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 저서에〔충재집(沖齋集)〕과〔충재일기(沖齋日記)〕등이 전한다.

 

O 전적은 약(約) 3000책이 소장되어 있는데 성종(成宗)9년(1478)에 작성(作成)된 우향계축(友鄕契軸), 홍치구년병진(弘治九年丙辰)(1496) 사마방목(司馬榜目), 정덕이년정묘(正德二年丁卯)(1507) 문무잡과방목(文武雜科榜目), 충재자필일기(沖齋自筆日記) 등 15종 184책만 조사하였다.

 

O 사마방목(司馬榜目)은 보물 524호로 지정된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보다 17년이 앞서며, 문무잡과방목(文武雜科榜目)도 현재까지 발견된 간본방목(刊本榜目)으로는 가장 오랜 것이며, 보물 603호로 지정된 정덕계유문무잡과방목(正德癸酉文武雜科榜目)보다 6년이나 앞선다.

 

O을사정난기(乙巳定難記)는 유일본(唯一本)이며, 충재일기(沖齋日記)는 임란(壬亂) 이전의 사료(史料)이며, 기타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근사록(近思錄), 주자대전(朱子大全),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등 충재(沖齋)가 받은 내사본(內賜本) 등은 서지학(書誌學) 연구(硏究)에 중요한 자료이다.

 

O이들 전적은 조선전기 정치(政治), 사회(社會), 문화(文化) 발달사(發達史) 연구(硏究)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근사록 (近思錄) 

 

-종 목 보물  제262호 
-수량/면적 4책
-지정(등록)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44 (유곡리) 
-소유자(소유단체) 권종목
-관리자(관리단체) 충재박물관


근사록(近思錄)은 송나라 유학자인 섭채가 성리학의 기본이 되는 주돈이의『태극도설』과 장재의『서명』등 중요한 문헌만을 골라 만든 성리학의 독본이다. 이 책은 고려 공민왕 19년(1370)에 당시 뛰어난 성리학자인 박상충이 진주목사로 부임하는 이인민에게 선사한 것이다.

 

이 책은 판식이나 자체로 보아 원판을 보고 다시 새긴 것으로 보인다. 권발이 애독하던 것으로 늘 소매에 넣고 다녔으며, 중종 때에는 경연에서 강의까지 하던 것이다. 고려본(高麗本)이 희귀한 상황에서 중국판을 따라 다시 새긴 것이라 하더라도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며, 조선시대 성리학을 연구하는데 있어 반드시 정독해야 할 도서이다. 특히 정조가 친히 머리글을 지어서 붙였다는 것만으로도 더욱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백운의 여행이야기
글쓴이 : 백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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