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訥 言 敏 行

권운영 2016. 2. 21. 18:38

訥 言 敏 行-논어

 

<訥-어눌할 눌,言-말씀 언,敏-민첩할 민,行-행실 행>

 

말은 부족한 듯 하고, 행실은 민첩하게 하라.

 

입술이 매끄러운 사람을 흔히 “말 잘하는 사람”으로 통한다. 입술에 기름바르고 거침없이 쏟아내는 달변가를 입천정에 곰팡이 쓸듯 어눌한 눌변(訥辯)가는 부러워한다. 그러나 조금도 부러워 할 일이 아닌것이 고래로 훌륭한 스승들은 모두 말이 어눌한 눌변자 였다는 것. 눌변속에 순수함. 순박함이 담겨 있으며 지혜로운자의 지혜가 박석(樸石)에 옥이 박혀있듯, 숨어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언변으로 사람들의 무지를 지적하고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거리나 신전 광장에서 청소년들을 상대로, 또는 마을의 유력한 사람들을 상대로 또는 지식인인체 하는 식자들을 상대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묻곤 하였다.(이것이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다).

이와 같은 문답의 주제는 대부분 실천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문답은 항상 ‘그것은 아직 모른다’라고 하는 무지(無知)의 고백을 문답자가 상호간에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이 때 상대방의 식자는 말 하는 소크라테스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자기는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아(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 여기에서 자기의 무지를 폭로당한 사람들은 때로는 소크라테스의 논법에 속아 넘어가 자신들의 무지를 폭로시키려는 수단으로 알고 그것을 그의 음흉한 수법이라 하여 분개 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참 뜻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존재 의미로 부여된 궁극의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그것을 묻는 것이 무엇보다도 궁극적 앎의 원점임을 인식하게 하는 귀중한 사실을 깨닫도록 촉구하는 데 있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이 진리의 근거를 다 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무지의 지), 그것에 대한 물음을 통하여 이 ‘막다른 벽’ 속에 머무는 데 소크라테스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내 자신을 근원부터 질문당하는 곳에 놓아두는 방법으로 내 자신이 온통 근원에서부터 조명(照明)되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참 뜻이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그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이다.

그가 단순한 달변가였다면 자신의 정연한 논리로 물음의 원점, 즉 무지의 위치로 지식인들을 내 몰고만 말 것이 아니라 화려한 답을 제시했을 것이고 그리 했더라면 그는 고발당하여 사형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원 일세기에 살았던 유사 이래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 평가받는 인물. 그의 “山上의 가르침-(山上垂訓)”은 인도의 힌두 교도였던 간디를 감동시켰고 팔복(八福)의 가르침은 가난한자의 행복을 위시하여 인간의 여덟 가지 복(福)의 조건을 가르침은 불후의 명교(名敎) 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생에 33년 반 만인 서른 세 살에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세기적인 재판을 받는다. 빌라도는 자신이 죽일 수도 있고 놓아줄수 도 있는 권이 있음을 확실히 말하며 “그대가 말하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의 혀끝 세치로 자신이 증거 하는 진리의 정체를 장황한 언변으로 늘어놓았더라면 아마 사형을 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성서 구약시대의 모세는 삼백만명의 유태인 노예를 이집트로부터 구출해 내기 위하여 80세의 고령에 당대 최대강국 이집트 파라오 앞에 선다. 신이 그에게 이 엄청난 사명을 주었을 때 모세는 자신은 입이 뻣뻣 하여 말을 할 줄 모른다고 사양했다.

그러나 언변의 효과는 달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신은 모세에게 가르치는데 그래서 신은 모세에게 말을 대신하는 그의 형 아론을 붙여주기도 했다.

 

일세기에 이르러 예수의 제자 바울은 이방자들의 사도로 불리웠을 때 그의 언변이 어눌했음을 밝힌다.

그러나 그의 아레오바고 언덕 연설은 역시 역사상 유명한 명연설로 인정되며 그 연설을 통하여 많은 개종자를 얻기까지 하였다. 청중은 그의 매끄러운 입술에 유혹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진실의 언변을 통해 감동 받은 것이다.

 

상기 눌언민행은 논어의 한 대목이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공자의 언변은 달변은 아니었음을 알수 있다.

공자의 가르침을 글로 남긴 제자들의 기록이 논어인데 논어의 기록은 매우 간략하고 요약적이어서 결코 그의 가르침이 화려한 말의 향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제자 중 자공은 언변에 능했다. 언변의 능함이 당대 학자들이 지녀야 할 덕목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전국시대에 소진 장의를 보면 실제 그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달변가의 말로는 공통되게 비참했던 경우가 많다.

 

공자의 가르침의 진의는 말의 화려함이 아니라 동작의 민첩(敏捷)성이다.

운동신경 발달로 민첩한 동작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행동의 과단(果斷)성을 말한 것이다. 말이 앞서는 것 보다 행동의 실천이 중요하고 그 행동은 말로 치례(致禮)함보다 실천을 위한 행동의 과감(果敢)성을 우선시 한 것이다.

서예의 실력은 붓 끝에서 나타난다.

휼륭한 이론아래 훌륭한 글이 나온다지만 글의 바탕이 없이 이론의 화려함만 있다면 문질(文質)이 빈빈(彬彬)해야함을 강조한 공자의 사상과 심수쌍창(心手雙暢) 해야 한다는 서보(書譜)의 논리와 얼마나 괴리(乖離)되고 먼 것인가. 실제의 연습을 게을리 말고 정진해야 올바른 글씨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다음주는

 

我知而讓不知則人必竭忠而誨之 我知 而讓不能則人

 

必盡誠而告之 (아지이양부지즉 인필갈충이회지 아지이양불능즉 인필진성이고지)-오세가

 

내가 알고도 사양하며 모른다 하면 사람들은 반듯이 힘써 가르치려 할 것이고, 내가 알면서 사양하여 능치 못하다 하면 사람들은 성심을 다하 여 일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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