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천(無心川)은 청주시 청원구에서 발원해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일면 상대리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청주시내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미호천(美湖川)에 합류하고 금강을 거쳐 서해에 이르는, 전체 길이 34.5㎞, 유역면적 177.71㎢의 지방하천이다. 동쪽으로는 한남금북정맥으로 연결되는 우암산(牛岩山)[338m], 상당산(上黨山)[419m], 것대산(484.0m), 선도산, 선두산, 백족산, 국사봉이, 그리고 서쪽으로는 명심산(신봉동 고분군), 구룡산(九龍山)[163.6m], 망월산, 문의 봉화봉이 둘러싸고 있다. 청주를 동서로 양분하고 있는 무심천(無心川)은 역사문화의 보고(寶庫)이자 시민들의 휴식처이면서 생태 환경에도 중요한 하천이다.
‘무심천(無心川)’은 청주를 동과 서로 가르며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월운천, 영운천(潁雲川), 명암천, 율량천, 발산천 등의 작은 내를 거느리고 있다. 무심천(無心川) 동쪽에 우뚝 선 '우암산(牛岩山)[338m]'과 함께 청주를 대표하는 자연물이다. 무심천(無心川)에는 무심천(無心川)이라는 지명 이외에도 ‘대교천(大橋川)’, ‘심수(沁水)’, ‘심천(沁川)’ 등의 여러 명칭이 결부되어 있었다. 이중에서 옛 문헌에 많이 나오는 지명은 대교천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여러 지리지에 대교천이라는 명칭이 나온다. 대교천은 문헌에서 발견되는 무심천(無心川)에 대한 최초의 공식 명칭이다. 이 대교천이라는 명칭은 이곳에 대교 즉 '큰 다리'가 놓여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며, '대교가 있는 하천의 상류로부터 쓰이기 시작하여 전 하천으로 확대되어 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대교천이라는 명칭은 19세기 말 자료에까지 나타나다가 그 이후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대교천이라는 명칭을 대신한 지명이 무심천(無心川)이다. 무심천이라는 명칭은 18세기 중기에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 「청주목(淸州牧)」’에 처음 나온다. 그리고 『해동지도(海東地圖)』보다 뒤에 나온 ‘『호서전도(湖西全圖)』 「청주목(淸州牧)」’에도 표시되어 있다.
이 '무심천(無心川)'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무심하게 말없이 흐르는 내’라는 설, ‘무심하고 무정한 내’라는 설, ‘물이 없는 내’ 즉 ‘무수천(無水川)’이 변한 것이라는 설, ‘수심이 없는 내’라는 의미의 ‘무심천(無深川)’이 변한 것이라는 설, '무성(武城)뚝 안으로 흐르는 심천(沁川)'이라는 의미의 ‘무심천(武沁川)’이 변한 것이라는 설, 불교용어 ‘무심(無心)’에서 왔다는 설 등 아주 다양하다. 불교용어 ‘무심’에서 왔다는 설이 그런대로 무게를 싣고 있다. 이 설은 무심천(無心川) 하류(지금의 운천동 지역)에 사찰이 많았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지금까지 발견된 ‘사뇌사 명문(思惱寺 銘文)’, ‘운천동사지(雲泉洞寺址) 유물(遺物)’, ‘신라사적비(新羅寺跡碑)’, ‘흥덕사 명문(興德寺 銘文)’, ‘구양사 명문(句陽寺 銘文)’ 등을 토대로 해 볼 때 지금의 운천동 지역에는 많은 사찰이 몰려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지역은 한때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었던 곳이다. 운천동 일대가 사찰 지역이니 그 사찰 앞을 흐르는 하천도 불교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청주시에서 무심천변에 세운 유래비가 있다. 이 유래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심천(無心川)은 남석천(南石川) 통일신라 - 심천(沁川) 고려 - 석교천(石橋川), 대교천(大橋川) 조선 - 무성뚝 일제강점기-에서 오늘의 무심천(無心川)으로 불려왔다. 이 무심천(無心川)에는 확인키 어려운 몇 설화가 전해져 오는 바 그 중 다음과 같은 사연이 길손의 발길을 멎게 한다.〉 〈청주 고을 양지바른 곳에 오두막이 있었네 그 집에 한 여인 다섯 살짜리 아들과 살았네 집 뒤로 맑은 물 사철 흐르고 통나무다리 놓여 있었네 어느날 행인이 하나 찾아들자 여인은 아이를 부탁하고 일보러 나갔고 아이를 돌보던 행인은 그만 깜빡 잠들고 말았네 꿈결인 듯 여인의 통곡소리에 눈을 뜨니 이게 웬일인고 돌보던 아이 주검되어 그 여인에게 들려있네 사연을 알아보니 행인이 잠든 사이 통나무다리 건너다 물에 빠져 죽었다네 여인은 아이의 잿가루를 그 물에 뿌리고 삭발 후 산으로 갔다네 이 소식 인근 사찰에 전해지자 모든 승려 크게 불쌍히 여기어 아이의 명복을 빌기로 했다네 그들은 백일만에 통나무다리 대신 돌다리를 세웠네 그 다리 이름은 남석교(南石橋)인데 사연 알 바 없이 무심히 흐르는 이 냇물을 일러 무심천(無心川)이라 하였네.〉 하지만 이것은 설화이기 때문에 사실로 확인할 수는 없다.
무심천(無心川)은 여러 번의 홍수와 직강 공사로 유로가 변경되었다. 근대 이전에는 무심천(無心川)이 석교초등학교에서 서운동, 문화동, 우암동으로 직류하다가 청주농업고등학교 앞에서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내덕동 부근에서 현재의 유로를 따라 흘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무심천(無心川)의 유로는 1906년 8월의 홍수로 인하여 유로가 변경되었고, 1939년에는 도시계획에 의해 현재의 석교동 일대를 개발하고 남주동(南洲洞), 서문동, 영동을 개발하기 위하여 유로를 서쪽으로 변경시켰다. 또 1895년, 1914년, 그리고 1956년의 지형도를 비교해 보면 율현 부근의 무심천(無心川)이 직강 공사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1969년에는 무심천(無心川) 지구 정리 공사로 유로를 다시 서쪽으로 변경시켜 현재의 제방이 축조되었다. 무심천(無心川)은 본래 천정천이었으나 하상정리로 하상이 낮아졌는데 장암동 상류부에는 천정천을 잘 볼 수 있다.
무심천(無心川)은 환경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다른 도시가 도심의 하천을 복개한 반면 청주는 무심천(無心川)을 그대로 두었다. 몇 번의 정비가 있었으나 그래도 노천하천으로 유지되고 있다. 무심천(無心川)은 도심의 공원이면서 습기나 온도에도 중요한 기능을 한다. 또한 바람의 흐름이나 인간의 심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무심천(無心川)은 청주시민들에게 수변공원의 역할을 하고 또 정신적인 위안을 주는 중요한 공간이다. 다양한 체육시설과 놀이시설도 있지만, 생태환경의 학습장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청주에서 무심천(無心川)의 환경적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무심천(無心川)은 예술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예술적 상상력과 사실적 묘사를 풍부하게 하는 예술의 자산이다. 시인들은 무심천(無心川)을 거닐며 시적 상상력과 이미지를 떠올리고, 화가는 무심천(無心川)에서 그림을 그린다. 음악가 역시 흐르는 물처럼 운율과 장단 그리고 선율과 리듬을 맞춘다. 청주를 세로 질러 흐르는 무심천(無心川)은 자연하천을 넘어서서 청주인들의 쉼터이고 또 문화적 자산이자 예술의 샘이다. 도종환[1954~ ] 시인은 시 「무심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한 세상 사는 동안/가장 버리기 힘든 것 중 하나가/욕심이라서/집착이라서/그 끈 떨쳐버릴 수 없어 괴로울 때/이 물의 끝까지 함께 따라가 보시게/흐르고 흘러 물의 끝에서/문득 노을이 앞을 막아서는 저물 무렵/그토록 괴로워하던 것의 실체를 꺼내/물 한 자락에 씻어 헹구어 볼 수 있다면.../달맞이꽃 속에 서서 흔들리다 돌아보시게/돌아서는 텅빈 가슴으로/바람 한 줄기 서늘히 다가와 몸을 감거든/어찌하여 이 물이 그토록 오랜 세월/무심히 흘러오고 흘러갔는지 알게 될지니/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나니/욕심 다 버린 뒤/우주처럼 넓어진 마음 무심이라 하나니/다 비워 고요히 깊어지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나니”.
이 시는 마음의 무심(無心)을 희구하는 서정시다. 시인 역시 어린 시절부터 노닐던 무심천(無心川)을 예술적으로 승화해 내었다. 무심천(無心川)이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예술의 소재가 되기도 하며, 또 예술활동의 공간이기도 하다.
‘무심천(無心川)’은 청주를 동과 서로 가르며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월운천, 영운천(潁雲川), 명암천, 율량천, 발산천 등의 작은 내를 거느리고 있다. 무심천(無心川) 동쪽에 우뚝 선 '우암산(牛岩山)[338m]'과 함께 청주를 대표하는 자연물이다. 무심천(無心川)에는 무심천(無心川)이라는 지명 이외에도 ‘대교천(大橋川)’, ‘심수(沁水)’, ‘심천(沁川)’ 등의 여러 명칭이 결부되어 있었다. 이중에서 옛 문헌에 많이 나오는 지명은 대교천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여러 지리지에 대교천이라는 명칭이 나온다. 대교천은 문헌에서 발견되는 무심천(無心川)에 대한 최초의 공식 명칭이다. 이 대교천이라는 명칭은 이곳에 대교 즉 '큰 다리'가 놓여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며, '대교가 있는 하천의 상류로부터 쓰이기 시작하여 전 하천으로 확대되어 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대교천이라는 명칭은 19세기 말 자료에까지 나타나다가 그 이후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대교천이라는 명칭을 대신한 지명이 무심천(無心川)이다. 무심천이라는 명칭은 18세기 중기에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 「청주목(淸州牧)」’에 처음 나온다. 그리고 『해동지도(海東地圖)』보다 뒤에 나온 ‘『호서전도(湖西全圖)』 「청주목(淸州牧)」’에도 표시되어 있다.
이 '무심천(無心川)'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무심하게 말없이 흐르는 내’라는 설, ‘무심하고 무정한 내’라는 설, ‘물이 없는 내’ 즉 ‘무수천(無水川)’이 변한 것이라는 설, ‘수심이 없는 내’라는 의미의 ‘무심천(無深川)’이 변한 것이라는 설, '무성(武城)뚝 안으로 흐르는 심천(沁川)'이라는 의미의 ‘무심천(武沁川)’이 변한 것이라는 설, 불교용어 ‘무심(無心)’에서 왔다는 설 등 아주 다양하다. 불교용어 ‘무심’에서 왔다는 설이 그런대로 무게를 싣고 있다. 이 설은 무심천(無心川) 하류(지금의 운천동 지역)에 사찰이 많았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지금까지 발견된 ‘사뇌사 명문(思惱寺 銘文)’, ‘운천동사지(雲泉洞寺址) 유물(遺物)’, ‘신라사적비(新羅寺跡碑)’, ‘흥덕사 명문(興德寺 銘文)’, ‘구양사 명문(句陽寺 銘文)’ 등을 토대로 해 볼 때 지금의 운천동 지역에는 많은 사찰이 몰려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지역은 한때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었던 곳이다. 운천동 일대가 사찰 지역이니 그 사찰 앞을 흐르는 하천도 불교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청주시에서 무심천변에 세운 유래비가 있다. 이 유래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심천(無心川)은 남석천(南石川) 통일신라 - 심천(沁川) 고려 - 석교천(石橋川), 대교천(大橋川) 조선 - 무성뚝 일제강점기-에서 오늘의 무심천(無心川)으로 불려왔다. 이 무심천(無心川)에는 확인키 어려운 몇 설화가 전해져 오는 바 그 중 다음과 같은 사연이 길손의 발길을 멎게 한다.〉 〈청주 고을 양지바른 곳에 오두막이 있었네 그 집에 한 여인 다섯 살짜리 아들과 살았네 집 뒤로 맑은 물 사철 흐르고 통나무다리 놓여 있었네 어느날 행인이 하나 찾아들자 여인은 아이를 부탁하고 일보러 나갔고 아이를 돌보던 행인은 그만 깜빡 잠들고 말았네 꿈결인 듯 여인의 통곡소리에 눈을 뜨니 이게 웬일인고 돌보던 아이 주검되어 그 여인에게 들려있네 사연을 알아보니 행인이 잠든 사이 통나무다리 건너다 물에 빠져 죽었다네 여인은 아이의 잿가루를 그 물에 뿌리고 삭발 후 산으로 갔다네 이 소식 인근 사찰에 전해지자 모든 승려 크게 불쌍히 여기어 아이의 명복을 빌기로 했다네 그들은 백일만에 통나무다리 대신 돌다리를 세웠네 그 다리 이름은 남석교(南石橋)인데 사연 알 바 없이 무심히 흐르는 이 냇물을 일러 무심천(無心川)이라 하였네.〉 하지만 이것은 설화이기 때문에 사실로 확인할 수는 없다.
무심천(無心川)은 여러 번의 홍수와 직강 공사로 유로가 변경되었다. 근대 이전에는 무심천(無心川)이 석교초등학교에서 서운동, 문화동, 우암동으로 직류하다가 청주농업고등학교 앞에서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내덕동 부근에서 현재의 유로를 따라 흘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무심천(無心川)의 유로는 1906년 8월의 홍수로 인하여 유로가 변경되었고, 1939년에는 도시계획에 의해 현재의 석교동 일대를 개발하고 남주동(南洲洞), 서문동, 영동을 개발하기 위하여 유로를 서쪽으로 변경시켰다. 또 1895년, 1914년, 그리고 1956년의 지형도를 비교해 보면 율현 부근의 무심천(無心川)이 직강 공사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1969년에는 무심천(無心川) 지구 정리 공사로 유로를 다시 서쪽으로 변경시켜 현재의 제방이 축조되었다. 무심천(無心川)은 본래 천정천이었으나 하상정리로 하상이 낮아졌는데 장암동 상류부에는 천정천을 잘 볼 수 있다.
무심천(無心川)은 환경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다른 도시가 도심의 하천을 복개한 반면 청주는 무심천(無心川)을 그대로 두었다. 몇 번의 정비가 있었으나 그래도 노천하천으로 유지되고 있다. 무심천(無心川)은 도심의 공원이면서 습기나 온도에도 중요한 기능을 한다. 또한 바람의 흐름이나 인간의 심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무심천(無心川)은 청주시민들에게 수변공원의 역할을 하고 또 정신적인 위안을 주는 중요한 공간이다. 다양한 체육시설과 놀이시설도 있지만, 생태환경의 학습장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청주에서 무심천(無心川)의 환경적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무심천(無心川)은 예술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예술적 상상력과 사실적 묘사를 풍부하게 하는 예술의 자산이다. 시인들은 무심천(無心川)을 거닐며 시적 상상력과 이미지를 떠올리고, 화가는 무심천(無心川)에서 그림을 그린다. 음악가 역시 흐르는 물처럼 운율과 장단 그리고 선율과 리듬을 맞춘다. 청주를 세로 질러 흐르는 무심천(無心川)은 자연하천을 넘어서서 청주인들의 쉼터이고 또 문화적 자산이자 예술의 샘이다. 도종환[1954~ ] 시인은 시 「무심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한 세상 사는 동안/가장 버리기 힘든 것 중 하나가/욕심이라서/집착이라서/그 끈 떨쳐버릴 수 없어 괴로울 때/이 물의 끝까지 함께 따라가 보시게/흐르고 흘러 물의 끝에서/문득 노을이 앞을 막아서는 저물 무렵/그토록 괴로워하던 것의 실체를 꺼내/물 한 자락에 씻어 헹구어 볼 수 있다면.../달맞이꽃 속에 서서 흔들리다 돌아보시게/돌아서는 텅빈 가슴으로/바람 한 줄기 서늘히 다가와 몸을 감거든/어찌하여 이 물이 그토록 오랜 세월/무심히 흘러오고 흘러갔는지 알게 될지니/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나니/욕심 다 버린 뒤/우주처럼 넓어진 마음 무심이라 하나니/다 비워 고요히 깊어지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나니”.
이 시는 마음의 무심(無心)을 희구하는 서정시다. 시인 역시 어린 시절부터 노닐던 무심천(無心川)을 예술적으로 승화해 내었다. 무심천(無心川)이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예술의 소재가 되기도 하며, 또 예술활동의 공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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