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위한 오솔길

이구재, 이진숙

권운영 2015. 12. 22. 21:10

 한국현대시작품상

 

 

 

오월의 숲은 지우개를 들고

 

                           이 구 재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기다리고 있어

내가 찾아가

안길 수 있는 숲

 

버석이는 속내를

우울의 보자기에 싸안고

자괴감의 검은 꼬리를 끌며

나서는 행보

 

다가 갈수록 온화한

신록에 나를 밀어 넣는다

 

불신이 고인 눈 반쯤 감고

나지막이 조아려

숨은 그림 찾는다

자잘한 꽃들과 이끼와 나뭇잎 사이로쏟아지는

동그란 햇빛과 새소리와 솔내 묻은 파란 바람과

이파리를 기는 작은 벌레들과 걸터앉을만한 바위와

골짜기 구르는 시냇물이 모두 지우개를 들고

나를 지우기 시작한다

 

뭉글뭉글 솟는 간지럼 같은 것이

오감을 푸르게 물들인다

오월의 깨끗한 신록이

초록의 문을 연다.

 

                - 올해의 현대시인상 -

 



 

 

주천강에 서면

 

                 가람 이 진 숙

 

 

주천강에 서면

강이 산이 되고 산이 강이 된다

가을이 봄, 여름을 데리고

메밀밭, 수수밭을 지나

새의 등을 탄 나비같이 오더니

고구마 밭 기슭에 진분홍 꽃 한 송이 남겨놓고

억새풀 바람에 실려 겨울 속으로 가더라

가을이야 내년 봄에 또 오겠지만

떠난 정 . 이별없이 내년 봄에 다시 올까

현실이 아닌 이상을 자극하며 살았기에

부대끼는 가슴이 사랑이란 걸 몰랐다

감이 홍시가 되고

다래는 말랑말랑 해져야 맛이 드는데

떪감으로 살아온 삶에

언제나 말랑말랑한 향기가 날까

낙엽 떨군 나목은 죽은 것이 아니다

생멸이 결국 하나임을 알리려

계절은 돌고 돌아서 오고

내가 갈 곳을 이해하려고

무와 유의 간극을 이해하려고

산너울, 강너울 만나러 주천강에 간다

주천강에 서면

산이 강바닥에 있다.

 

 

- 현대시 작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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