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 윤봉길의사 사적지 [梅軒尹奉吉義士事蹟地]
도중도에는 광현당(光顯堂)이 있는 곳으로 윤봉길 의사께서 이곳에서 태어나 4세까지 살았던 집입니다. 도중도에는 왜놈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곳이라하여 이곳에서 시름을 달래고.. 독립운동의 앞날을 설계하였던 곳이라고 하니 그 의미가 깊은 곳인데.. 지금은 넓은 광장에 푸른 잔디가 시원하기 그지없고..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아담한 초가집은 정겹고도 정겹습니다...
#1.매헌무궁화공원.
#2. 솟대와 연꽃
#3. 아담한 초가집하나.
#4 냇가에서 만난 물 잠자리.
#5. 길을안내하는 솟대
도중도에는 광현당(光顯堂)이 있는 곳으로 윤봉길 의사께서 이곳에서 태어나 4세까지 살았던 집입니다. 도중도에는 왜놈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곳이라하여 이곳에서 시름을 달래고.. 독립운동의 앞날을 설계하였던 곳이라고 하니 그 의미가 깊은 곳인데.. 지금은 넓은 광장에 푸른 잔디가 시원하기 그지없고..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아담한 초가집은 정겹고도 정겹습니다...
#1.매헌무궁화공원.
#2. 솟대와 연꽃
#3. 아담한 초가집하나.
#4 냇가에서 만난 물 잠자리.
#5. 길을안내하는 솟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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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1908~1932)는 1908년 6월 21일 시량리 178번지, 즉 이곳 도중도 고택에서 태어났다. 네살까지는 이 집에서 자랐고 같은 마을 139번지의 고택으로 이사하여 1930년 2월 7일 23세 때 광복의 웅지(雄志)를 품고 출가하기 전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생가는 광현당(光顯堂)이라 이름하였는데 남향으로 앉은 조그마한 집이며 성장가는 구한당이라 이름하였다.
6, 7세에 천자문을 배우고 11세 되던 해(1918)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인 선생에게 불만을 품고 12세에 자퇴하였다. 13세부터 16세까지 한문공부를 다시하여 매곡 성주록선생(成周錄先生)으로부터 매헌이란 아호를 받았다. 19세부터는 신문화의 습득에 주력하고 농촌근대화의 개혁운동에 투신하여 농민독본 25과를 편술하여 가르치고 22세 때에는 농촌부흥을 꾀하고자 월진회를 조직하였다.
의사는 또한 농촌청년들의 협동심을 기르기 위하여 수암체육회(秀岩體育會)를 조직하여 도중도에 운동장을 만들었다. 이와 같이 청년 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의 탄압에 의하여 1930년 마을을 떠나고 말았다. 이미 월진회를 조직할 때 독립운동조직과 연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봉길 의사는 만주를 거쳐 상해임시정부에서 가서 김구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1932년 4월 29일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상해사변전승축하식을 겸한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수뇌급 수십명에게 중사상을 입히고 우리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세계만방에 과시하였다. 윤의사는 거사를 성공시키고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1932년 12월 19일 일본 삼소정공병(三小井工兵) 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향년25세를 일기로 장렬히 순국하였다.
충의사는 근년에 세운 윤봉길 사우로서 영정이 모셔져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집이다. 홍전문과 삼문이 있으며 경내에 있는 기념관에는 보물 제568호인 윤의사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윤의사가 야학회, 월진회, 독서회 등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복흥원 건물은 본래의 위치가 충의사 본관 인근 산중턱에 있었으나 훼손되어 근년에 초가 삼간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이 외에도 윤의사 의거기념탑과 윤의사 동상이 있다.
윤봉길 의사(1908~1932)는 1908년 6월 21일 시량리 178번지, 즉 이곳 도중도 고택에서 태어났다. 네살까지는 이 집에서 자랐고 같은 마을 139번지의 고택으로 이사하여 1930년 2월 7일 23세 때 광복의 웅지(雄志)를 품고 출가하기 전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생가는 광현당(光顯堂)이라 이름하였는데 남향으로 앉은 조그마한 집이며 성장가는 구한당이라 이름하였다.
6, 7세에 천자문을 배우고 11세 되던 해(1918)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인 선생에게 불만을 품고 12세에 자퇴하였다. 13세부터 16세까지 한문공부를 다시하여 매곡 성주록선생(成周錄先生)으로부터 매헌이란 아호를 받았다. 19세부터는 신문화의 습득에 주력하고 농촌근대화의 개혁운동에 투신하여 농민독본 25과를 편술하여 가르치고 22세 때에는 농촌부흥을 꾀하고자 월진회를 조직하였다.
의사는 또한 농촌청년들의 협동심을 기르기 위하여 수암체육회(秀岩體育會)를 조직하여 도중도에 운동장을 만들었다. 이와 같이 청년 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의 탄압에 의하여 1930년 마을을 떠나고 말았다. 이미 월진회를 조직할 때 독립운동조직과 연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봉길 의사는 만주를 거쳐 상해임시정부에서 가서 김구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1932년 4월 29일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상해사변전승축하식을 겸한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수뇌급 수십명에게 중사상을 입히고 우리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세계만방에 과시하였다. 윤의사는 거사를 성공시키고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1932년 12월 19일 일본 삼소정공병(三小井工兵) 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향년25세를 일기로 장렬히 순국하였다.
충의사는 근년에 세운 윤봉길 사우로서 영정이 모셔져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집이다. 홍전문과 삼문이 있으며 경내에 있는 기념관에는 보물 제568호인 윤의사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윤의사가 야학회, 월진회, 독서회 등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복흥원 건물은 본래의 위치가 충의사 본관 인근 산중턱에 있었으나 훼손되어 근년에 초가 삼간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이 외에도 윤의사 의거기념탑과 윤의사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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