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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의성김씨 오류헌이야기

권운영 2013. 5. 3. 06:55

 

 

 

 

 

 

 

 

 

 

 

 

 

명 칭 :  의성김씨 오류헌(義城金氏 五柳軒)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282
(원소재지 : 임동면 지례리 357)
건 축 주 :  김원중(金遠重, 1658~1724)
건축시기 :  1678년(숙종 4)
이건시기 :  1990년대
소 유 자 :  김원택(관리자 : 김원택)
문 화 재 :  경상북도 중요민속자료 제184호, 1984년 1월 10일 지정, 일곽

건축 이야기
대문은 높이 솟아 있고, 나무의 검붉은 색감과 백토의 흰색이 어울려 가볍고 경쾌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대문은 위쪽이 아치 형태로 처리되어 있다. 나무를 이용하여 아주 춤이 낮은 호선을 만들어낸 것이다. 바깥 쪽 뿐만 아니라 안쪽도 똑같이 처리되어 있다. 정면에서 보면 두 줄기 위로 배가 부른 밋밋한 호선이 층을 이루고 있는 형상이다.

바깥쪽 대문 위에는 오류헌 현판이 유려한 필치를 자랑한다. 검은 빛 바닥 판 위에 흰색으로 쓴 글씨이다. 그것과 조화를 이루려 함인가? 문패 역시 같은 색감으로 김원택(金源宅)이라는 이름 석자를 아로새겨놓고 있다. 잘 꾸며진 집이고, 잘 관리되고 있는 집이라는 점은 이렇게 문 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강력한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티끌 한 점 없는 정원이 우리의 눈 안에 펼쳐진다. 상당히 넓은 바깥마당이다. 마당 안에는 빈틈없이 잔디가 깔려 있고, 잔디 상태는 잡초 하나 섞여있지 않고 아주 좋다. 사람이 통행하는 곳은 포석을 깔았다. 마당 한쪽, 파랗게 줄 서서 조금씩 이파리 끝을 같은 동작으로 흔들고 있는 잔디 위에 자연석 너럭바위가 놓여 있고, 한 젊은이가 바깥쪽으로 엉덩이를 향한 자세로 앉아 슬며시 고개를 돌린다. 사람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아니다. 실물 크기의 앉은 자세 조각상은 옷의 색감과 질감이 특히 뛰어나다.

건축 배경
김원중(金遠重, 1658~1724)은 1678(숙종 4)년에 분가를 하면서 이 집을 지었다.

건축 특징
1920년 오류헌의 주인은 집을 개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사랑채를 규모 있게 지을 꿈을 가졌다. 그는 최고의 목수를 불러 들였고, 목수의 미학을 구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환경을 꾸며 주었다. 현장에 대장간을 세워 목수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현장 제작하였고, 기와도 목수가 원하는 대로 현장 부근에서 굽게 하였다. 그렇게 하여 건설된 것이 바로 이 사랑채 건물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채 건물은 1920년 당시 안동 일원에서 최고 수준의 건축 미학이 총집결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건물을 눈여겨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례의 자연, 보다 구체적으로는 지례 내급의 자연과 어울리는 미학이 실현되어 있는 것이므로, 오늘 오류헌이 놓여져 있는 지점에서는 원래의 미학을 완벽하게 느낄 수는 없는 노릇이리라. 그러나 건물은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 하니, 건물 자체가 갖는 아름다움과 그 철학은 여전히 그 속에 간직되어 있지 않겠는가.

건축 구성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을 사이에 두고 동쪽은 사랑채이고, 서쪽은 안채의 바깥채이다.

안채의 바깥채는 사랑채에 비해 춤도 낮고 방도 작다. 원래의 건물에서는 사랑채 역할을 했을 것이나 새로 사랑채가 지어지면서 안채의 기능을 나누어 수행하는 공간으로 쓰여 지게 되었을 것이다. 4칸 규모이며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폭이 좁은 쪽마루를 앞에 달았다. 문이나 기타 장식물의 처리 방식은 사랑채와 흡사하다. 사랑채와 건립 연대가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1920년대에 개축하면서 작은 손질을 가했으리라는 점을 추정하여 볼 수 있다.

중문은 문턱 가운데가 아래로 처지도록 처리하였다. 대문이 위쪽을 아치 형상으로 매끈하게 만들어 올렸다면, 여기 중문은 아래쪽을 가운데가 처지도록 만든 것이다. 중문 앞에서는 중문의 대문 처마를 이루고 있는 서까래, 안채의 서까래 끝을 이루고 있는 선들, 안채 마루방 천정을 이루고 있는 선들이 복합되어 무질서하면서도 통일된 미학을 연출한다.

안채는 가운데에 3칸의 마루방을 두었다. 각 칸마다 두 쪽의 나무판 문이 달려 있다. 마루 가운데 칸 처마 밑으로는 목와고택(木窩古宅)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검은 판에 음각하여 글자 영역에 흰 칠을 하였다. 대나무 마디 형상의 필선이 힘 있고 우아한 느낌을 준다. 마루 뒤쪽 처마 밑으로는 시렁이 가설되었는데, 그 위로 20여 개의 소반이 빼꼭히 올려져 있다.

사랑채는 5칸 규모이다. 측면으로는 2칸, 앞쪽은 2단의 마루를 깔았다. 마루의 양쪽은 나무판 문으로 차단되어 있다. 정면 5칸은 동쪽의 1칸과 서쪽 4칸이 분리되어 있지만 처리 방식은 같다. 차이가 있다면 동쪽 1칸은 마루의 남쪽과 동쪽 끝으로 난간을 둘러치고 있다는 점이다.

난간의 처리 방식은 힘차고 독창적이다. 다리 끝에는 직선의 톱날 무늬 셋으로 이루어진 종아리를 두고, 그 위에 밖으로 배를 내놓으며 휘어 도는 허벅다리를 만들었다. 그 위쪽에 양쪽으로 펼쳐지는 사각의 작은 판을 만들어 붙여 난간 위쪽 가로대를 받치게 하였다. 난간이 마루판과 만나는 부분은 그냥 나무판을 세워 붙였고, 그 위쪽의 폭 좁은 판자에는 각각 2개씩의 안상을 오려 놓았다.

현판
오류헌(五柳軒)
대문에 붙어있는 현판이다.
목와고택(木窩古宅)
안채의 마루방 처마 밑에 붙어 있는 현판이다.
오류헌이건기(五柳軒移建記)
10대손 김시연(金時連)이 근찬(謹撰)하였다.

문중 이야기
- 오류헌
금소의 한끝을 타고 임하댐 쪽으로 돌아들면 천전으로 나아가는 비좁은 길이 열린다. 길은 구불구불 굽어 돌며 작은 마을들과 연결된다. 오늘날 오류헌은 그곳에 자리잡고 있다. 행정 구역 명으로는 임하면 임하리이다.
- 김원중(金遠重, 1658~1724) 의 꿈
김원중은 1678년에 분가를 하면서 이 집을 짓는다고 한다. 김방걸이 살았던 곳이 지촌이므로, 본댁 근처로 분가를 해 나간 셈이다. 김원중은 1623년에 태어나서 1695년에 타계한다. 17세기를 살았던 사대부가의 사람들 치고 어느 누가 분가해 나가 새로 집을 지으면서 천년 기지를 꿈꾸지 않았을까. 때는 바야흐로 종가와 가문의 시대가 아니던가. 김원중은 오래 유지되는 집, 끝까지 옮겨가지 않는 집을 꿈꾸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김원중의 꿈이 300년은 지속되었으니 아예 무상한 세월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인가?


관련문집
- 지촌집(芝村集)
이 책은 봉화금씨 석포정주손가에서 소장하던 『지촌집(芝村集)』이다. 김방걸(金邦杰, 1623~1695)의 시문들을 총2책으로 엮어 1865년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관련인물
- 김원중(金遠重, 1658~1724)
김원중은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1623∼1695)의 아들이다. 김방걸은 배위인 정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5남 1녀를 둔다. 장남은 김세중(金世重)인데 진사이고, 차남은 김재중(金載重)이고, 그 다음은 일찍 죽었으며, 4남은 김원중이고, 5남은 김성중(金聖重)이다. 딸은 박명상(朴命相)에게 시집을 갔다.

김원중은 형식상으로는 김방걸의 4남이지만, 실질적으로는 3남이라 할 수 있다.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김요흠(金堯欽), 차남은 김명흠(金命欽), 삼남은 김필흠(金必欽)이다. 셋째 딸은 각각 생원 박용상(朴龍相), 이시진(李時晉), 무과(武科)를 한 이승후(李升厚)에게 출가하였다.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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