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이육사 詩
권운영
2017. 8. 19. 19:09
* 꽃 -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방울 나리잖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자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한 약속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 파초 - 이육사 항상 알는 나의 숨결이 오늘은 해월(海月)처럼 게을러 은(銀)빛 물결에 뜨나니 파초(芭蕉) 너의 푸른 옷깃을 들어 이닷 타는 입술을 축여주렴 그옛적 『사라센』의 마즈막 날엔 기약(期約)없이 흐터진 두낱 넋이였서라 젊은 여인(女人)들의 잡아 못논 소매끝엔 고흔 손금조차 아즉 꿈을 짜는데 먼 성좌(星座)와 새로운 꽃들을 볼때마다 잊었든 계절(季節)을 몇번 눈우에 그렸느뇨 차라리 천년(千年)뒤 이가을밤 나와함께 비ㅅ소리는 얼마나 긴가 재여보자 그리고 새벽하날 어데 무지개 서면 무지개 밟고 다시 끝없이 헤여지세 *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광인의 태양 - 이육사 분명 라이풀 선(線)을 튕겨서 올라 그냥 화화(火華)처럼 사라서 곱고 오랜 나달 연초(煙硝)에 끄스른 얼굴을 가리면 슬픈 공작선(孔雀扇) 거츠는 해협(海峽)마다 흘긴 눈초리 항상 요충지대(要衝地帶)를 노려가다 * 광야(曠野)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募)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서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天古)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자야곡(子夜曲) - 이육사 수만 호 빛이라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더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 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불꽃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내려 항구에 돌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절여 바람 불고 눈보라 치잖으면 못 살리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 소리 숨 막힐 마음 속에 어디 강물이 흐르느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 맘에 드리노라. 수만 호 빛이라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 호수 - 이육사 내여 달리고 저운 마음이련마는 바람에 씻은 듯이 다시 명상하는 눈동자 때로 백조를 불러 휘날려 보기도 하건만 그만 기슭을 안고 돌아누워 흑흑 느끼는 밤 희미한 별 그림자를 씹어 놓이는 동안 자줏빛 안개 가벼운 명모같이 내려 씌운다. * 연보(年譜) - 이육사 너는 돌다릿목에서 줘 왔다던 할머니의 핀잔이 참이라고 하자. 나는 진정 강언덕 그 마을에 떨어진 문받이였는지 몰라. 그러기에 열 여덟 새 봄은 버들피리 곡조에 불어 보내고 첫사랑이 흘러 간 항구의 밤 눈물 섞어 마신 술 피보다 달더라. 공명이 마다곤들 언제 말이나 했나 바람에 붙여 돌아온 고장도 비고 서리 밟고 걸어간 새벽 길 위에 간(肝) 잎만이 새하얗게 단풍이 들어 거미줄만 발목에 걸린다 해도 쇠사슬을 잡아맨 듯 무거워졌다. 눈 위에 걸어 가면 자욱이 지리라. 때로는 설레이며 바람도 불지. * 절 정 - 이육사 매서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