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친 구]]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누가 몰랐으랴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끼리도
끝까지 함께 갈 순 없다는 것을
진실로 슬픈 것은 그게 아니었지
언젠가 이 손이 낙엽이 되고
산이 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언젠가가
너무 빨리 온다는 사실이지
미쳐 숨돌릴 틈도 없이
온몸으로 사랑할 겨를도 없이
어느 하루
잠시 잊었던 친구처럼
홀연 다가와
*-*투욱 어깨를 친다는 사실이지
--['너무 빨리 온다는 사실이지'
그렇지.
예고도 없이, 너무 빨리.
허망하구나, 인생아.
그 친구 녀석이 예고도 없이 홀연히 와서는 어깨를 툭 하고 치기 전에,
치기 전에, 치기 전에.... 무엇 먼저 하면 좋을까.
[출처] 문정희 <친구>
**고향을 찾아서 1 /문정희
십수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
민대머리처럼 흙이 벗겨진
아버지 무덤 앞에 섰다.
부끄럽구나
저 널부러진 검불 하나에도
나됩구는 사금파리 하나에도
나는 몸둘 바를 모르겠구나.
내가 때묻은 티티새처럼
이름도 없는 항구로
떠돌아다니는 동안에도
저 산맥 저 무덤은 비바람에
이마를 적시며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언젠가 돌아올
내 속살을 보고 있었구나.
**고향을 찾아서 2 /문정희
가을도 아닌데 고향 사람들은
모두 낙엽되어 흩어져 있었다.
다리에 구렁이 같은 힘줄이 솟아
쌀 두 가마 등짐지던 사출이 아저씨도
이빨로 소주병을 까던 기훈이 오빠도
엉댕이가 맷돌 같던 쌀장수 화순댁도
모두 어김없이 낙엽이 되었다.
키다리 선출이 칠푼이 알밤이조차도
모두 낙엽이 되었다.
수북한 낙엽 속에서 용케
송장 메뚜기처 럼
살아남은 이복언니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날 보고 그 자리에서
땅을 치며 통곡했다.
마른 갈비뼈 사이로
쉬잇쉬잇 해수병이 드나드는
목쉰 울음 속에
그녀는 내 이름 부르지 않고
30년 전에 죽은
울아버지 부르며 통곡했다.
내 슬픔 당당하게 뺏어들고
땅을 치며 먼저 울어버렸다.
나는 슬픔조차 빼앗겨
타관 사람처럼
그냥 서 있기만 했다.
**꿈 / 문정희
내 친구 연이는 꿈 많던 계집애
그녀는 시집갈 때 이불보따리 속에
김찬삼의 세계여행기 한 질 넣고 갔었다.
남편은 실업자 문학 청년
그래서 쌀독은 늘 허공으로 가득했다.
밤에만 나가는 재주 좋은 시동생이
가끔 쌀을 들고 와 먹고 지냈다.
연이는 밤마다
세계일주 떠났다.
아테네 항구에서 바다가제를 먹고
그 다음엔 로마의 카타꼼베로!
검은 신부가 흔드는
촛불을 따라 들어가서
천년 전에 묻힌 뼈를 보고
으스스 떨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또 떠나리.
아! 피사, 아시시, 니스, 깔레 ......
구석구석 돌아다니느라
그녀는 혀가 꼬부라지고
발이 부르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만
뉴욕의 할렘 부근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밤에만 눈을 뜨는
재주끈 시동생이
김찬삼의 세계여행기를 몽땅 들고 나가
라면 한 상자와 바꿔온 날이었다.
그녀는 비로소 울었다.
결혼반지를 팔던 날도 울지 않던
내 친구 연이는
그날 뉴욕의 할렘 부근에 쓰러져서 꺽꺽 울었다
**치마
-문정희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하다
가만 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들려고 애쓴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다
여자들이 감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
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
놀라운 것은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 [그리고 임보 시인의 답 시- 팬티]
**팬티 - 문정희의 「치마」 를 읽다가
- 임보
그렇구나.
여자들의 치마 속에 감춰진
대리석 기둥의 그 은밀한 신전.
남자들은 황홀한 밀교의 광신들처럼
그 주변을 맴돌며 한평생 참배의 기회를 엿본다.
여자들이 가꾸는 풍요한 갯벌의 궁전,
그 남성 금지구역에 함부로 들어갔다가 붙들리면
옷이 다 벗겨진 채 무릎이 꿇려
천 번의 경배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 그런 곤욕이 무슨 소용이리.
때가 되면 목숨을 걸고 모천으로 기어오르는 연어들처럼
남자들도 그들이 태어났던 모천의 성지를 찾아
때가 되면 밤마다 깃발을 세우고 순교를 꿈꾼다.
그러나 , 여자들이여. 상상해 보라
참배객이 끊긴.
닫힌 신전의 문은 얼마나 적막한가!
그 깊고도 오묘한 문을 여는
신비의 열쇠를 남자들이 지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보라.
그 소중한 열쇠를 혹 잃어버릴까 봐
단단히 감싸고 있는 저 탱탱한
남자들의 팬티를!
**남편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 많은 안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 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커피
[문정희시인]
커피 알맹이가
뜨거운 물에 닿는 순간
팥죽처럼 녹는다
얼마만큼 사모해야
이토록
순식간에 빠져들수 있을까
녹아서
향기를 심을 수 있을까
**자주 해 주고 싶은 말
시인- 문 정희
혼자라는 생각을 지우는 말
"잘 지내지"
세상을 다 얻는 가슴 벅찬 말
"너가 필요해"
그 무엇도 해낼 수 있는 말
"너를 믿는다"
**물컵
시인-문정희
신의 축복으로
내가 만일 다른 무언가로
다시 태어난다면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순백의
물컵으로 태어나리라
그리하여
식사하기전,하루에 세 번은
그대 입술에 닿으리라.
[[문정희(文貞姬, 1947년 5월 25일 ~ )시인. 전남 보성 출생. 1969년 “월간 문학” 신인상에 ‘불면’과 ‘하늘’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로 삶의 생명력과 의미에 대한 관찰 및 통찰을 시로 나타냈으며, 최근에는 여성성과 일상성을 기초로 한 특유의 시적 에너지와 삶에 대한 통찰을 담은 시를 많이 썼다. 시집으로 “문정희 시집”(1973), “아우내의 새”(1986), “그리운 나의 집”(1987), “제 몸 속에 살고 있는 새를 꺼내 주세요”(1990), “찔레”(200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