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봉화 닭실마을 청암정
봉화 닭실마을 청암정
닭실마을 전경(좌측 끝집이 충재고택)
충재와 청암정
㉠충재-충재의 공부방
㉡청암정
ⓐ충재의 휴식공간
ⓑ커다랗고 넓적한 거북바위 위에 올려 지은 丁자형 건물
ⓒ건물을 빙 둘러서 척촉천(擲蠋泉)을 두르고 돌다리를 건너야 정자에 이를 수 있도록 만들어 운치가 있다.
ⓓ주위에는 향나무, 느티나무, 단풍, 철쭉, 나리꽃이 어우러져 자연의 세계를 만끽
*이중환-“정자는 못 복판 큰 돌 위에 있어 섬과 같으며, 사방은 냇물이 고리처럼 둘러 제법 아늑한 경치가 있다”고 평함
중종 때 충신인 충재 선생이 지은 정자로 특이한 모양
퇴계 이황 글씨 등 보물도 보관
인공적이고 계획적으로 만든 연못이다.연못가운데 커다랗고 넓적한 바위위에 올려 지은 건물로 누마루로 개방되어 있다. 충재앞 돌다리를 건너야 정자로 들어 갈수 있다.
청암정의 옆 모습
청암정 후면

충재 |

책 읽기 좋아하고 성격이 강직하였던 충재 선생의 옛집이 경북 봉화군 유곡리 닭실마을에 있다. 고택에는 충재 선생이 아끼던 근사록이 보물 제262호로, 충재일기 7책이 보물 제261호로, 중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책들이 보물 제896호로, 교서 분재기(分財記) 호적단자 등 고문서가 보물 제901호로, 충재와 퇴계 등의 서첩과 글씨가 보물 제902호로 보관되어 있다. 한 집에 보물이 5점이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충재 선생의 책에 대한 애정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6·25전쟁 때 많은 책과 문서를 독에 담아 땅속에 묻어 분실을 막은 후손의 지극한 정성이 있었기에 빛을 본 것.
정자 주위에 둑을 쌓고 연못을 만들었는데 마치 거북이가 정자를 지고 물속에서 노니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
‘丁’자 모양으로 멋ㆍ실용 겸비
충재고택에 청암정(靑巖亭)이란 빼어난 정자가 있습니다. 충재 선생이 1526년에 지은 정자. 거북 모양의 큰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주위의 땅을 파서 둑을 쌓아 연못을 만들었다. 거북이가 정자를 지고 물속에서 노는 모양. 둑에는 느티나무 향나무 단풍나무 등을 돌려 심어 독립된 공간을 만들었다. 뛰어난 조원계획이다. 충재 선생의 미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집터를 잡을 때 거북바위를 보고 잡지 않았을까?
▲ 청암정 다리
6칸 넓이의 누대에 2칸 넓이의 긴 마루방 건물을 붙여서 ‘丁’자 모양의 특이한 정자가 되었다. 마루방은 양측에 퇴를 내고 3면에 계자난간을 둘러 멋과 실용을 겸하였다. 누대는 팔작지붕 건물로 3면이 터졌고 마루방 건물은 맞배지붕 건물로, 사방에 10짝의 문을 달았다. 누대와 마루방 사이에는 두꺼운 종이를 양면에 바른 맹장지문을 들어올리게 하여 넓게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외벽에는 나무판을 댄 골판문을 달아 추위를 막게 하였고.
이런 구조의 마루방은 온돌이 제격인데 왜 마루방으로 만들었을까? 처음에는 온돌을 들였다. 그런데 어느 날 고승이 지나가다가 정자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여기는 연기가 날 자리가 아니다. 거북이 등에 불을 때면 되겠느냐”고 충고하여 마루방으로 바꾸었다한다. 온돌이 없으니 추운 날에는 청암정 앞에 지은 3칸짜리 서재인 충재에서 지냈을 것이다.
청암정으로 오르는 돌다리도 독특하고 멋진 다리이다. 연못 속에 작은 교각을 세우고 그 위에 긴 장대석을 놓아 만든 튼튼한 돌다리는 후손을 위한 배려였을 것. 정자 앞의 계단도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것. 충재 선생이 얼마나 공을 들여 청암정을 지었는지 계단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청암정 연못 바닥이 주변의 논보다 높아서 물이 쉽게 빠지기 때문에 항상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물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논에 물을 대고 나서야 차례가 오기 때문에 연못에 물이 제대로 찬 것을 보기가 어렵다. 안타까운 일이다. 물이 없으니 연꽃도 보이지 않는다.
▲ 석천정사
팔작지붕의 처마 선(線)이 직선이다 후손에게 물어보니 여러 해 전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공사를 맡은 사람은 물론 감독관청에까지 항의를 했는데도 그냥 통과가 되었단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팔작지붕의 처마선이 곡선인 것은 삼척동자도 알 만한 기초상식인데 어찌 이리 몰상식하게 일을 하다니. 최고의 문화재를 최악의 인간이 흠집을 낸 것이다. 이런 나쁜 인간을 ‘공공의 적’이라고 할까, 아니면 ‘악의 축’이라고 할까. 군청에 물어보니 내년에 지붕을 제대로 고쳐놓을 계획이 잡혀있단다. “공사를 하는 김에 우물을 파고 펌프를 달아 연못에 항상 물이 차게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가능하다”고. 내년부터는 찰랑거리는 물에 연꽃이 핀 제대로 된 청암정을 보실 수 있겠다.
큰아들 청암이 지은 석천정사
▲ 석천정사 앞 계곡
청하동천 (靑霞洞天)
石泉亭’, ‘靑霞洞天’이라는 글씨는 충재의 5세손 권두응의 글씨라고 하나 청하동천은 미수 허목의 글씨이다
청암정은 50여명이 올라도 여유가 있을 만큼 넓다. 많은 학자들과 교유하기를 즐긴 충재 선생의 마음 크기가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청암정에는 퇴계 이황, 미수 허목 등의 명필 글씨가 걸려있다.
청암정을 보신 뒤 마을 앞의 개울을 건너 소나무 길을 따라 서쪽으로 돌아가면 맑은 물이 흐르는 수려한 계곡에 석천정사(石泉精舍)를 만나게 된다. 충재의 큰아들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가 1535년에 지은 정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에는 2칸짜리 익랑이 달려있다. 정자 뒤 바위틈에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샘이 있어 석천정사가 되었다. 계곡 쪽 골판문을 전부 열면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과 울창한 소나무 숲의 시원한 풍경이 마루로 쏟아져 들어온다.
석천정사 앞 계곡물에 발을 식히며 마음의 끈을 놓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보자. 아이들이 딸린 가족이라면 청암정과 석천정사를 본 후 계곡에서 도시락을 먹고 물놀이도 할 수 있어 여름철 답사코스로 안성맞춤.
종택 전경
충재고택
종택 대문
충재 권벌 종택 사랑채
안채의 정침은 남향이며 아마도 중간에 사랑채가 있었는데 없어진 것같으며 현재는ㅁ자형의 안채에서 ㄴ자모양을 사랑채로 사용하고 있다.
안채의 서쪽에 규모가 큰 사당이 위치하며 사당에서 조금떨어진 앞쪽으로 한서당과 청암정이 위치해 있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방2칸과 마루1칸의 작은 건물이 보이는데 이곳이 충재 선생이 머물던 한서당이다.소박하고 초촐한 선비정신이 엿보이는 건물이다
충재를 모신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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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금닭이 품고 있는 알이 놓인 자리쯤 될 것이다. 명당을 입증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다. 그 터가 얼마나 화를 입지 않았는가다. 닭실마을의 명당에는 충재고택이 있다. 충재고택에는 1528년에 건축된 청암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그곳에 거북바위가 있어서 상서로운 기운까지 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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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정사 내부
석천정사 앞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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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재 권벌(1478~1548)은 안동 출신이다. 견훤과의 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기여한 삼태사의 한 사람인 권행의 20대 손이다. 성균생원을 지낸 임사빈의 둘째 아들로 안동 도촌리에서 태어났다. 19살에 진사에 합격하고, 30살에 문과에 급제를 하여 관직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권벌이 닭실마을에 터를 잡은 것은 삼척부사로 부임할 무렵이다. 그가 삼척부사를 자청한 것은 연로한 아버지를 가까이서 모시기 위해서였다. 봉화에 터를 잡은 것은 선대(先代)의 외가 쪽으로부터 분재받은 농토가 있었기 때문이다. 충재는 오랫동안 관직에 머물렀지만, 관직 생활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중종 15년(1520년)에 기묘사화에 연류되어 처음 파직을 당한다. 그때 충재는 봉화 닭실로 낙향하여 유유자적한 생활을 누린다. 그가 1528년에 지은 청암정이, 그가 얼마나 평화로웠는지를 잘 웅변해 준다. 충재는 이곳에서 13년을 머물다가 1533년에 다시 정계로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충재는 또 한번의 사화에 휘말리게 된다. 명종 즉위년에 윤원형이 주도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파직이 된다. 그리고 2년 뒤에 벌어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71살,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행복한 결말은 아니었다. 충재와 가까웠던 인물은 경주 양동마을의 회재 이언적(1491~1553)이다. 충재는 이언적보다 13살이 연상인데, 을사사화로 화를 입었을 때, 충재는 우찬성이었고 회재는 좌찬성이었다. 회재는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재(齋)자 돌림의 호를 쓰고, 정치적인 신념을 같이하고, 그리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는 모습까지 서로 닮았다. 이런 각별한 인연으로 경주 양동마을의 여주 이씨 집안과 봉화 닭실마을의 안동 권씨 집안은 “성부동일실(姓不同一室)-성은 다르지만 한 집안이라”이라며 가깝게 지내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회재 이언적은 동방 5현에 동국 18현으로 모셔져 성균관에서 불천위 제사를 지낸다.
충재 권벌의 본관은 안동,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 또는 훤정(萱亭)이다. 그는 성종9년 11월 6일 진외가陳外家(아버지의 外家)안동 북후면 도촌리(속명, 도계촌)에서 태어나 19세 때인1496년(연산군2)에 진사, 1507년(중종2)에는 문과에 급제했고, 42세 때인 1519년 (중종14) 2월에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사화가 일어날 조짐을 보고 외직을 자청해 삼척부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해 11월 그가 그토록 우려했던 기묘사화의 피바람에 끝내 휘말려 파직되어 외가인 파평윤씨 선산이 있었던 닭실로 낙향했다. 중종 초년(1516년)에 조광조와 김정국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정치에 영남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적극 가담했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파직을 당했던 것이다. 이후 1545년(71세)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그 화를 온몸으로 맞아 결국 평안도 삭주 지방으로 유배되어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연도에 백성들이 눈물을 흘린 천리길 운구가 있었고 지금도 상여가 지나갔던 마을 앞 고개 이름을 부여현(扶輿峴)이라고 부른다. 그는 살아있을 때 병조판서, 한성판윤, 예조판서 등 요직을 거쳐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렀고, 사후에 관작이 회복됨은 물론 영의정에 추증되어 1588년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고 문집 9권 5책을 남겼다. 그의 일생을 정리한 대표적인 글로 퇴계 이황이 행장(行狀)을, 사암 박순과 우복 정경세가 각각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남겼다. 행장은 한 인물을 평가할 때 가장 중심이 되는 중요한 글로, 집안 사람이나 제자들에 의해 정리되는 유사(遺事)와는 달리 사회적으로 공인이 되는 객관적인 글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문중 인사보다는 이를 감당할 만한 명망있는 외부 인사에게 맡겨 짓게 한다. 당시 퇴계 선생이 행장을 지었다면 이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외 충재 선생의 삶을 정리한 글로는 묘갈명과 묘표, 묘지명, 시장(諡狀) 등이 있다. 퇴계는 제자들이 작은 학문공간을 마련하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손수 현판이나 시를 써서 격려했다. 그런 일에는 자신의 글을 애써 아끼지 않았다. 그러니 제자들이 자신의 선대(先代)에 대한 행장을 봉청했을 테고 퇴계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을 것이다. 퇴계 선생이 남긴 문집의 분량이 방대한 것을 보더라도 그가 글쓰기를 얼마나 즐겼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행장과 관련해서 퇴계는 매우 엄선된 몇몇 인물에 한해서만 글을 남겼다. 퇴계집 중에 행장 부문은 두 권 분량이다. 48, 49권에는 명종, 농암 이 선생, 성주목사 황 공, 정암 조 선생, 회재 이 선생, 의정부우찬성 권 공, 선부군 행장초 등 8명에 대해서 쓴 행장만이 남아 있다. 그 면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명종은 당시의 국왕이고, 농암 이 선생은 주변에서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조선 중기의 명신 이현보이며, 성주목사 황공은 자신의 애제자로 먼저 세상을 버린 금계 황준량, 정암 조 선생은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자신이 존경했던 선배인 조광조다. 다음 권에는 회재 이언적과 충재 권벌,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부친에 대한 행장을 임시로 적어두었다. 이를 정리하면 ‘선생(先生)’이라는 표현을 쓴 이는 농암 이현보,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이고 ‘공(公)’이라는 표현을 쓴 이로는 금계 황준량과 충재 권벌을 들 수 있다. 표현에 있어서 ‘선생’이냐 ‘공’이냐 하는 문제는 이후 논란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정암 조광조의 경우는 예외지만, 농암 이현보와 회재 이언적 양 가문에 있어서는 공히 퇴계 선생과의 관계와 관련해 논란이 있었다. 농암 문중과 야기된 사승(師承) 논쟁(論爭)이 그것이다. 그런데 회재 이언적과 충재 권벌을 두고 한 사람은 선생을, 또 다른 한 사람은 공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나름대로 의미를 둔 것으로, 학자와 정치인으로서의 비중을 고려해 잣대를 달리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나 이도 간단치는 않다. 금계 황준량의 경우는 자신의 제자이기에 공이라는 표현이 합당하지만, 충재의 경우는 안동 지역의 23년 선배며, 국왕도 인정했을 정도로 학문을 즐겼던 실천 유학자였던 점을 감안하면 선생이라 표현해도 큰 문제는 없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나 퇴계가 그렇게 결정한 것이라면 그에 따른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회재 이언적과 충재 권벌은 을사사화라는 혼란기를 수습하기 위해 함께 고민했던 주역이었다. 두 사람은 인종이 세상을 떠난 뒤 이복동생이던 명종이 왕위를 계승했을 때 원상(院相:국왕 사후 졸곡까지 26일까지 정무를 총괄하던 임시벼슬)에 함께 임명되었다. 그러나 후일 회재 이언적은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최고의 평가를 받았으나 충재 권벌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리고 회재의 고향인 경주 양동과 배향 서원인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비중에 비해 충재 권벌의 고향인 봉화 유곡(닭실)과 배향 서원인 삼계서원은 일반의 관심권밖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충재 권벌은 이 시대에 재조명되어야 할, 잊어서는 안 될 큰 인물이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굽히지 않았던 절개를 지녔다. 이는 영의정을 지냈던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표현에 잘 나타나 있으며(公有死難不可奪之節), 이를 행장의 글에서 인용한 퇴계는 ‘그 말씀이 참으로 인정된다(其言不信然也哉)’고 평가했다. 그러나 충재의 절개는 강성 일변도로 흐른 것은 아니었다. 을사사화를 평한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글에 “대신의 풍도를 가진 한 사람이 있었으니 곧 찬성 권벌이다(得大臣風度者一人 曰權贊成). 오호라, 참으로 위대하도다”라는 문장이 보인다. 권벌은 을사사화 당시 병조판서로 있었다. 그때 좌의정 유관과 이조판서 유인숙 등이 억울하게 귀양가게 되었다. 이때 그는 죄 없는 대신을 귀양 보내는 것에 반발해 강개하게 항의했다. 이때 원상으로 있던 회재 이언적은 권벌이 항의해 올린 글을 보고 놀라며 “이렇게 하면 화변(禍變)을 더욱 일으키게 할 뿐”이라며 지나치게 직설적인 문구를 지웠다. 이에 권벌은 탄식하며 “이런 말을 지워버리면 차라리 아뢰지 않는 것이 옳소”라며 반박했다. 결국 문제의 원고를 고쳐 상소했으나 문정왕후의 노여움을 사 귀양을 면치 못했다. 이런 사실을 전한 율곡 이이는 자신의 석담일기에서 “행실에 있어서는 권 공이 이 공을 따르지 못했으나 화난(禍難)에 임해 항절(抗節)한 데 있어서는 이 공이 권 공에게 양보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는 이 공이 권 공보다 우월하다고 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다. 흥미로운 평이 아닐 수 없다. 충재에게 후한 점수를 준 점은 기질적으로 율곡과 통하는 점이 충재에게 있었던 때문은 아니었을까. 충재의 묘소는 봉화 유곡리 중마을(내유곡) 큰재궁골에 있다. 단분(單墳)으로 정경부인 화순 최씨와 합장이다. 묘갈에는 ‘충정공충재권선생지묘(忠定公충齋權先生之墓)’라고 쓰여 있다. 부친인 의정공 권사빈(權士彬)과 모친인 파평 윤씨, 숙부인 교수공 권사수와 부인 봉화 금씨, 아들 권동보와 권동미 등 후손들의 묘소가 함께 자리잡고 있다. 선생의 신도비명은 특이하게도 두 기가 서 있다. 원래는 사후 20년이 되던 1568년(선조1)에 좌의정에 추증되었을 때 사암 박순이 지었으나, 1591년(선조24)에 재차 광국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어 영의정으로 증직되자 우복 정경세가 다시 지은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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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ㆍ글ㆍ사진=김영택 펜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