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종택

[스크랩] 봉화 닭실마을 청암정

권운영 2016. 9. 7. 09:42
 

  봉화 닭실마을 청암정

 

 

닭실마을 전경(좌측 끝집이 충재고택)

 

충재와 청암정

   ㉠충재-충재의 공부방

   ㉡청암정

     ⓐ충재의 휴식공간

     ⓑ커다랗고 넓적한 거북바위 위에 올려 지은 丁자형 건물

     ⓒ건물을 빙 둘러서 척촉천(擲蠋泉)을 두르고 돌다리를 건너야 정자에 이를 수 있도록 만들어 운치가 있다.

     ⓓ주위에는 향나무, 느티나무, 단풍, 철쭉, 나리꽃이 어우러져 자연의 세계를 만끽

*이중환-“정자는 못 복판 큰 돌 위에 있어 섬과 같으며, 사방은 냇물이 고리처럼 둘러 제법 아늑한 경치가 있다”고 평함

 

중종 때 충신인 충재 선생이 지은 정자로 특이한 모양

퇴계 이황 글씨 등 보물도 보관

 

 인공적이고 계획적으로 만든 연못이다.연못가운데 커다랗고 넓적한 바위위에 올려 지은 건물로  누마루로 개방되어 있다. 충재앞 돌다리를 건너야 정자로 들어 갈수 있다.

 

 

 청암정의 옆 모습

 

청암정 후면
 

청암정 내부(정면의 편액이 미수 허목의 글씨)
 

 

 

 ▲ 청암정

 

 

충재

 

책 읽기 좋아하고 성격이 강직하였던 충재 선생의 옛집이 경북 봉화군 유곡리 닭실마을에 있다. 고택에는 충재 선생이 아끼던 근사록이 보물 제262호로, 충재일기 7책이 보물 제261호로, 중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책들이 보물 제896호로, 교서 분재기(分財記) 호적단자 등 고문서가 보물 제901호로, 충재와 퇴계 등의 서첩과 글씨가 보물 제902호로 보관되어 있다. 한 집에 보물이 5점이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충재 선생의 책에 대한 애정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6·25전쟁 때 많은 책과 문서를 독에 담아 땅속에 묻어 분실을 막은 후손의 지극한 정성이 있었기에 빛을 본 것.

 

 정자 주위에 둑을 쌓고 연못을 만들었는데 마치 거북이가 정자를 지고 물속에서 노니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

 

‘丁’자 모양으로 멋ㆍ실용 겸비

 

충재고택에 청암정(靑巖亭)이란 빼어난 정자가 있습니다. 충재 선생이 1526년에 지은 정자. 거북 모양의 큰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주위의 땅을 파서 둑을 쌓아 연못을 만들었다. 거북이가 정자를 지고 물속에서 노는 모양. 둑에는 느티나무 향나무 단풍나무 등을 돌려 심어 독립된 공간을 만들었다. 뛰어난 조원계획이다. 충재 선생의 미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집터를 잡을 때 거북바위를 보고 잡지 않았을까?

 

▲ 청암정 다리

 

6칸 넓이의 누대에 2칸 넓이의 긴 마루방 건물을 붙여서 ‘丁’자 모양의 특이한 정자가 되었다. 마루방은 양측에 퇴를 내고 3면에 계자난간을 둘러 멋과 실용을 겸하였다. 누대는 팔작지붕 건물로 3면이 터졌고 마루방 건물은 맞배지붕 건물로, 사방에 10짝의 문을 달았다. 누대와 마루방 사이에는 두꺼운 종이를 양면에 바른 맹장지문을 들어올리게 하여 넓게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외벽에는 나무판을 댄 골판문을 달아 추위를 막게 하였고.

 

이런 구조의 마루방은 온돌이 제격인데 왜 마루방으로 만들었을까?  처음에는 온돌을 들였다. 그런데 어느 날 고승이 지나가다가 정자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여기는 연기가 날 자리가 아니다. 거북이 등에 불을 때면 되겠느냐”고 충고하여 마루방으로 바꾸었다한다. 온돌이 없으니 추운 날에는 청암정 앞에 지은 3칸짜리 서재인 충재에서 지냈을 것이다.

 

청암정으로 오르는 돌다리도 독특하고 멋진 다리이다. 연못 속에 작은 교각을 세우고 그 위에 긴 장대석을 놓아 만든 튼튼한 돌다리는 후손을 위한 배려였을 것. 정자 앞의 계단도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것. 충재 선생이 얼마나 공을 들여 청암정을 지었는지 계단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청암정 연못 바닥이 주변의 논보다 높아서 물이 쉽게 빠지기 때문에 항상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물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논에 물을 대고 나서야 차례가 오기 때문에 연못에 물이 제대로 찬 것을 보기가 어렵다. 안타까운 일이다. 물이 없으니 연꽃도 보이지 않는다.

 

 

 

 

 ▲ 석천정사

 

 

 팔작지붕의 처마 선(線)이 직선이다 후손에게 물어보니 여러 해 전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공사를 맡은 사람은 물론 감독관청에까지 항의를 했는데도 그냥 통과가 되었단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팔작지붕의 처마선이 곡선인 것은 삼척동자도 알 만한 기초상식인데 어찌 이리 몰상식하게 일을 하다니. 최고의 문화재를 최악의 인간이 흠집을 낸 것이다. 이런 나쁜 인간을 ‘공공의 적’이라고 할까, 아니면 ‘악의 축’이라고 할까. 군청에 물어보니 내년에 지붕을 제대로 고쳐놓을 계획이 잡혀있단다. “공사를 하는 김에 우물을 파고 펌프를 달아 연못에 항상 물이 차게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가능하다”고.  내년부터는 찰랑거리는 물에 연꽃이 핀 제대로 된 청암정을 보실 수 있겠다.

 

 

큰아들 청암이 지은 석천정사

 

 ▲ 석천정사 앞 계곡

 

 

 

 청하동천 (靑霞洞天)

石泉亭’, ‘靑霞洞天’이라는 글씨는 충재의 5세손 권두응의 글씨라고 하나 청하동천은 미수 허목의 글씨이다

 

청암정은 50여명이 올라도 여유가 있을 만큼 넓다. 많은 학자들과 교유하기를 즐긴 충재 선생의 마음 크기가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청암정에는 퇴계 이황, 미수 허목 등의 명필 글씨가 걸려있다.

 

청암정을 보신 뒤 마을 앞의 개울을 건너 소나무 길을 따라 서쪽으로 돌아가면 맑은 물이 흐르는 수려한 계곡에 석천정사(石泉精舍)를 만나게 된다. 충재의 큰아들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가 1535년에 지은 정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에는 2칸짜리 익랑이 달려있다. 정자 뒤 바위틈에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샘이 있어 석천정사가 되었다. 계곡 쪽 골판문을 전부 열면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과 울창한 소나무 숲의 시원한 풍경이 마루로 쏟아져 들어온다.

 

석천정사 앞 계곡물에 발을 식히며 마음의 끈을 놓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보자. 아이들이 딸린 가족이라면 청암정과 석천정사를 본 후 계곡에서 도시락을 먹고 물놀이도 할 수 있어 여름철 답사코스로 안성맞춤.

 

 

 종택 전경

 

충재고택

 

 종택 대문

 

 충재 권벌 종택 사랑채

 

 

안채의 정침은 남향이며 아마도 중간에 사랑채가 있었는데 없어진 것같으며 현재는ㅁ자형의 안채에서 ㄴ자모양을 사랑채로 사용하고 있다.

 

 

 안채의 서쪽에 규모가 큰 사당이 위치하며 사당에서 조금떨어진 앞쪽으로 한서당과 청암정이 위치해 있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방2칸과 마루1칸의 작은 건물이 보이는데 이곳이 충재 선생이 머물던 한서당이다.소박하고 초촐한 선비정신이 엿보이는 건물이다

 

 

충재를 모신 사당

닭실 마을은 안동 권씨 동족촌이다. 80여 가구가 사는데 그중 70여 가구가 안동 권씨다. 나머지 10여가구도 남이 아니다. 처가로 연결되고, 외가로 연결된다. 마을은 온통 기와집이다. 가까이 가면 검은 페인트를 칠한 기와 모형도 있지만, 대체로 번듯한 기와집들이다. 마을은 산자락을 기대고 앉았다. 이곳의 지형을 풍수가들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이라고 말한다. 이 마을 입향조(入鄕祖)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입향조가 터를 잡은 고택은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아마도 금닭이 품고 있는 알이 놓인 자리쯤 될 것이다. 명당을 입증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다. 그 터가 얼마나 화를 입지 않았는가다. 닭실마을의 명당에는 충재고택이 있다. 충재고택에는 1528년에 건축된 청암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그곳에 거북바위가 있어서 상서로운 기운까지 돈다.

충재고택은 닭실마을 가장 안쪽에 있다. 더 안쪽으로는 어떤 집도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정자 누마루에는 앞 들판이 보이고, 산자락을 따라 내려가는 개울물도 보인다. 충재고택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온다. 예전에는 그 마당에 행랑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져 마당만 넓어졌다. 사랑채로 둘러싸인 안채는 따로 안마당이 있는 ㅁ자 구조를 하고 있다. 충재고택 마당 한켠에는 유물기념관이 있다. 충재가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금속활자 주자전서가 보관되어 있고, 그의 문집이 보관된 곳이다. 유물관이 너무 커서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보관할 유물이 많아서 그렇다면 이해해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터를 잡고, 정자까지 넣어둔 충재의 미의식에는 턱없이 못미치는 건물이다. 그 유물관 앞을 지나면 안채 마당과 담장을 분리된 공간이 나온다. 그 안쪽에 청암정이 있다. 청암정은 실로 아름답다. 한 집안의 울타리 안에 있는 정자로서 우리나라 최고 간다고 추켜세울 만하다. 사실 이 청암정 때문에 닭실마을을 오고, 봉화를 들르고, 경상북도 북부지방을 찾는다. 지난 여름 큰물이 질 때도 가고, 가을 송이축제 때도 다녀왔다. 무엇을 보기 위해서도, 사사로이 개인별장을 가질 필요가 없다. 청암정에 잠시 머문 것만으로 영원한 마음을 별장을 얻게 된다. 청암정은 집 밖의 물길을 끌어들여 인공연못을 만들고, 연못 안에 들어있는 웅대한 거북바위 위에 정자를 올려놓았다.

거북바위의 둘레에 물이 있으니, 마치 거북이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형국이다. 정자는 집안에 있는 것 치고는 제법 너르다. 정면 4칸에 측면 2칸짜리 단층누각이다. 정면 한칸에 연결된 측면 2칸에는 난간과 함께 누마루를 달았다. 정자가 올라앉는 바위는 검다. 봄빛이 비추면 이끼가 되살아나 푸른빛을 띨 테지만, 겨울이라 검다.

청암정 연못 위에 얹혀진 기다란 돌다리를 건너본다. 열한 발자국 째에서 연못을 건너 거북바위 등 위로 내 몸이 얹힌다. 거북바위에 실린 것은 정자만이 아니다. 용처럼 꿈틀거리는 나무가 물길 위를 지난 비스듬히 뻗어있다. 연못 주변으로 나무가 우람하다. 정자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되, 집 밖에서는 정자를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보호 장치를 마련했다. 청암정과 석교를 사이를 두고 측면 1칸 정면 4칸짜리 단아한 서실이 있다. 마루 대들보에는 집 주인의 호인 ‘충재(忠齋)’ 두 글자 현판이 걸려있다.

마루 한켠에 방 두칸, 한칸은 아궁이를 위해서 마련해 두었다. 마루에 앉아있으니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휘어진 지팡이를 집고 한 노인이 다가온다. 마루에서 내려와 인사를 건네고, 마치 주인이라도 된양 나는 노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노인은 충재고택의 주인이자, 충재의 17대 종손인 권정우(84) 씨다. 80년이 넘도록 이 집을 지키며 살아왔지만, 그래도 이 집의 나무와 정자와 바위보다는 젊다. 종손에게 고택에 얽힌 얘기를 듣는다.

 

석천정사 내부

 


석천정사 뒷편의 샘

 

석천정사 앞 계곡

 

수백년 풍상에도 고색창연 '영남 최고 정자
충재, 기묘사화 연루돼 이곳서 15년 은거
빼어난 풍광 벗삼아 학문연구·후진양성
조정 복직 이후도 大義 외치다 끝내 유배

충재 권벌이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했던 청암정 전경. 현재는 보수공사 중이다.
충재 권벌이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했던 청암정 전경. 현재는 보수공사 중이다.
"선공이 닭실에 집터를 점지하여(酉谷先公卜宅寬)/구름 걸린 산 둘러 있고 다시 물굽이 고리처럼 둘러있네(雲山回復水灣環)/외딴 섬에 정자 세워 다리 가로질러 건너도록 하였고(亭開絶嶼橫橋入)/연꽃이 맑은 연못에 비치니 살아있는 그림 구경하는 듯하네(荷映淸池活畵看)/채마밭 가꾸고 나무 심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능했고(稼圃自能非假學)/벼슬길 연모하지 않아 마음에 걸림 없었네(軒裳無慕不相關)/바위 구멍에 웅크린 작은 소나무가(更憐巖穴矮松在)/풍상의 세월 격려하며 암반 위에 늙어가는 모습 더욱 사랑스럽구려(激勵風霜老勢盤)'

퇴계(退溪) 이황이 청암정(靑巖亭)을 읊은 시다. 청암정과 정자의 주인공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내용이다. 퇴계는 충재를 존경도 했지만, 충재의 증조부가 퇴계 외조모의 외조부여서 수시로 인사를 다니는 관계이기도 했다.

#충재가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했던 청암정

봉화에서 제일의 반촌(班村)으로 닭실(酉谷)을 꼽는다. 닭실은 안동권씨 충재(沖齋) 권벌(1478~1548)이 자리잡은 이후 후손들이 400여년간 세거한 명소이다.

충재는 소과를 거쳐 30세에 대과에 합격한 후 요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정암(靜菴)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좌절되는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였다. 이 때 충재는 지난날 삼척부사로 부임하던 길에서 둘러본 뒤 마음 속에 점지해 두었던 봉화 닭실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 전에는 출생지인 안동 도촌에서 살았다. 충재는 이후 조정에서 다시 부를 때까지 이곳 닭실에서 은거하며 15년 세월을 보냈다. 그는 49세(1526) 무렵에 청암정을 짓고 경학(經學)에 몰두하며 10년 동안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사적명승 제3호로 지정된 청암정은 거북처럼 생긴 암반 위에 춘양목으로 건축한 정자로, 영남 최고의 정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거북 암반 주위는 연못으로 둘러져 있고, 바로 옆의 종택 뜰에서 정자로 건너가는 돌다리가 더욱 운치를 더해준다. 주위에 심은 노송과 느티나무, 향나무, 단풍나무 등 고목은 수백년 세월을 말해주는 듯 찬란한 풍광을 선사하고 있다.

정자의 마루 위에는 퇴계 이황, 백담(栢潭) 구봉령, 관원(灌園) 박계현, 번암(樊庵) 채제공, 눌은(訥隱) 이광정 등 역대 명현들의 글이 현판으로 늘어서 있다. 남명(南冥) 조식이 쓴 것으로 전하는 청암정 현판과 미수 허목이 쓴 '청암수석(靑巖水石)' 현판이 정자의 품격과 위상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목숨 걸고 공명정대한 국사 집행을 직간한 충재

충재는 15년 동안 닭실에 은거하며 독서하다가 밀양부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 후 한성판윤, 우찬성을 지냈으며, 명종이 어린 나이로 등극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할 시절에는 원상(院相)이 되어 승정원의 정무를 대직(代直)했다. 당시 문정왕후의 아우인 윤원형의 정당과 인종의 외척인 윤임의 정당으로 대치되어 소위 소윤·대윤의 정치적 갈등이 깊어졌다. 이 문제를 문정왕후가 판결하려고 대신들을 충순당(忠順堂)에 소집해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을 때 충재는 목숨을 걸고 공명정대하게 국사를 집행해야 됨을 직간하였다.

그러나 충재의 직간은 관철되지 못했고, 윤임 일당이 유배되는 을사사화가 발생해 또다시 충재는 파면되었다. 2년 후 부제학 정언곽이 양재역 벽에 이름 없는 조정비방문이 붙었다고 보고한 '양재역벽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을사년 사화의 인물들에게 죄가 씌워져 충재는 또다시 구례로 유배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나라를 위해 공명정대한 대의를 외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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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 허목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씨인 '청암수석'3
미수 허목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씨인 '청암수석'
좌절됨을 안타까워할 뿐, 자신의 불우함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퇴계가 지은 충재의 행장(行狀)을 보면 "압송관이 이르자 공은 기꺼이 길을 나섰다. 진사 금원정(琴元貞)이 충재공의 손을 잡으며 자신도 모르게 실성할 정도로 목놓아 울자 충재공은 웃으며 '나는 그대가 대장부라고 생각했더니 어찌 이러한가. 생사 화복은 하늘의 뜻이네. 하늘의 뜻을 어찌하겠는가(吾以子爲大丈夫矣, 何至是耶. 死生禍福, 天也. 其如天何)'라고 말했다. 충재가 아들 청암(靑巖) 권동보에게 부치는 글에는 '옛날 중국의 범충선공은 나이가 70인데도 만릿길 유배를 갔다. 너 아비의 죄로는 오히려 관대한 처분이다. 또한 내가 국은을 저버려 이에 이르렀으니 내가 죽거든 검소하게 장례지냄이 옳을 것이다(昔范忠宣年七十, 有萬里之行, 汝父之罪甚寬典也. 且吾負思至此, 死卽薄葬可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평안도 삭주(朔州)로 유배된 충재는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이듬해 명종 3년(1548) 3월에 북녘 땅 삭주에서 71세로 운명했다. 충재는 명종 21년(1567)에 신원돼 모든 관직이 복권되었고, 선조 4년에는 '충정공(忠定公)' 시호가 하사되었다.

#충재와 근사록

충재는 일생 동안 독서를 쉬지 않았다. 특히 '근사록'을 탐독하였으며, 늘 소매 속에 근사록을 넣고 다녔다.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중종이 대신들과 후원에서 상화연(賞花宴)을 열어 취하도록 마시고 파한 뒤 자리를 정리하던 신하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주워 임금에게 바치니 중종은 "아마 권벌의 옷소매에서 빠졌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돌려주도록 명했다 한다.

충재가 지니고 다니던 근사록은 고려 공민왕 9년(1370)에 간행된 목판본 4책으로, 보물 262호로 지정됐다. 충재 수택본(手澤本)으로 충재유물관에 보관돼 있다. 또한 중종은 초주(初鑄) 갑인자본 근사록 9권3책을 충재가 도승지로 근무할 때 하사했고, 영조는 무인자본 근사록 14권4책을 충재 6세손 권만을 통해 충재 고택에 하사했다. 모두 보물 896호로 지정됐고, 충재유물관에 보관돼 있다.

충재는 장성한 후 하루도 빠짐 없이 일기를 썼다. 지금 전하는 일기로는 한원일기(翰苑日記) 2책, 신창영유단일기(新昌令惟斷日記) 1책, 당후일기(堂後日記) 1책 등 6책이 있다. 이 모두 450년 전 사회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보물 제261호로 지정된 이 일기들도 유물관에 보관돼 있다.

현재 종택 옆에 충재기념관을 신축하는 공사가 진행중이고, 청암정 역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이고 있다.
미수 허목은 청암정에 한 번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다가, 88세 되는 해 4월에 '청암수석(靑巖水石)' 네 글자를 써놓고 글씨를 보내기도 전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달 하순에 운명하니 이 글씨가 미수의 절필(絶筆)로 알려진 것이다. 미수가 후미에 써놓은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청암정은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자를 큰 글자로 써 보내노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은 쓴다(靑岩亭者, 權忠定公山水舊庄.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충재 권벌(1478~1548)은 안동 출신이다. 견훤과의 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기여한 삼태사의 한 사람인 권행의 20대 손이다. 성균생원을 지낸 임사빈의 둘째 아들로 안동 도촌리에서 태어났다. 19살에 진사에 합격하고, 30살에 문과에 급제를 하여 관직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권벌이 닭실마을에 터를 잡은 것은 삼척부사로 부임할 무렵이다. 그가 삼척부사를 자청한 것은 연로한 아버지를 가까이서 모시기 위해서였다. 봉화에 터를 잡은 것은 선대(先代)의 외가 쪽으로부터 분재받은 농토가 있었기 때문이다. 충재는 오랫동안 관직에 머물렀지만, 관직 생활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중종 15년(1520년)에 기묘사화에 연류되어 처음 파직을 당한다. 그때 충재는 봉화 닭실로 낙향하여 유유자적한 생활을 누린다. 그가 1528년에 지은 청암정이, 그가 얼마나 평화로웠는지를 잘 웅변해 준다. 충재는 이곳에서 13년을 머물다가 1533년에 다시 정계로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충재는 또 한번의 사화에 휘말리게 된다. 명종 즉위년에 윤원형이 주도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파직이 된다. 그리고 2년 뒤에 벌어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71살,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행복한 결말은 아니었다. 충재와 가까웠던 인물은 경주 양동마을의 회재 이언적(1491~1553)이다. 충재는 이언적보다 13살이 연상인데, 을사사화로 화를 입었을 때, 충재는 우찬성이었고 회재는 좌찬성이었다. 회재는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재(齋)자 돌림의 호를 쓰고, 정치적인 신념을 같이하고, 그리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는 모습까지 서로 닮았다. 이런 각별한 인연으로 경주 양동마을의 여주 이씨 집안과 봉화 닭실마을의 안동 권씨 집안은 “성부동일실(姓不同一室)-성은 다르지만 한 집안이라”이라며 가깝게 지내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회재 이언적은 동방 5현에 동국 18현으로 모셔져 성균관에서 불천위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충재는 성리학의 계보 속에서 그 이름이 희미하다. 권정우 씨에게 조심스럽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동국 18현의 많은 이들이 그렇지만, 제자를 잘 길러야 한다. 정치사업보다는 교육사업을 얼마나 잘했느냐가, 평가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충재는 관직생활을 오래했기에 후진 양성에 힘쓸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영남 사림이면서도 기호학파 쪽에서 호평받는 인물이었다. 율곡은 충재를 두고 충절이 맑은 하늘의 해와 달과 같다고 평했다.
청암정에서 나와 닭실마을 앞 들판을 가로질러 개울을 따라 산자락을 감아돌아가면, 다시 한번 탄복할 만한 광경과 마주치게 된다. 수태극 산태극으로 감아돌아가는 은밀하고 아름답고 청정한 계류변에 배처럼 정박한 정자가 있다. 석천정사(石泉亭舍)다. 청암정이 정적(靜的)이라면, 석천정은 동적(動的)이다. 굽이치는 물살과 하얀 암반 그리고 키 큰 노송과 계곡 바람소리 속에 정자가 둥실 떠가는 것 같다. 처음 이곳을 발견한 이는 얼마나 좋아했을까? 정자를 세운 사람은 충재의 아들인 권동보다. 그 세월도 450년이 흘렀다. 세월은 흘렀고 사람은 갔지만 정자는 여전하다. 계곡물도 바위들도 물소리도 여전하다.

권벌과 권동보, 두 부자가 알아본 자연, 그들은 자연 속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듯 인간의 집을 세워놓았다. 그들의 삶터였고, 휴식공간이었던 자연 속에, 일년에 한번만이라도 들어와 볼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이다. 그런 자연을 발견하고, 오늘까지 지켜준 닭실마을과 권씨 집안에 감사할 따름이다.

  

충재 권벌의 본관은 안동,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 또는 훤정(萱亭)이다.

그는 성종9년 11월 6일 진외가陳外家(아버지의 外家)안동 북후면 도촌리(속명, 도계촌)에서 태어나 19세 때인1496년(연산군2)에 진사, 1507년(중종2)에는 문과에 급제했고, 42세 때인 1519년 (중종14) 2월에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사화가 일어날 조짐을 보고 외직을 자청해 삼척부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해 11월 그가 그토록 우려했던 기묘사화의 피바람에 끝내 휘말려 파직되어 외가인 파평윤씨 선산이 있었던 닭실로 낙향했다.

중종 초년(1516년)에 조광조와 김정국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정치에 영남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적극 가담했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파직을 당했던 것이다. 이후 1545년(71세)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그 화를 온몸으로 맞아 결국 평안도 삭주 지방으로 유배되어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연도에 백성들이 눈물을 흘린 천리길 운구가 있었고 지금도 상여가 지나갔던 마을 앞 고개 이름을 부여현(扶輿峴)이라고 부른다.

그는 살아있을 때 병조판서, 한성판윤, 예조판서 등 요직을 거쳐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렀고, 사후에 관작이 회복됨은 물론 영의정에 추증되어 1588년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고 문집 9권 5책을 남겼다.

그의 일생을 정리한 대표적인 글로 퇴계 이황이 행장(行狀)을, 사암 박순과 우복 정경세가 각각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남겼다.

행장은 한 인물을 평가할 때 가장 중심이 되는 중요한 글로, 집안 사람이나 제자들에 의해 정리되는 유사(遺事)와는 달리 사회적으로 공인이 되는 객관적인 글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문중 인사보다는 이를 감당할 만한 명망있는 외부 인사에게 맡겨 짓게 한다. 당시 퇴계 선생이 행장을 지었다면 이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외 충재 선생의 삶을 정리한 글로는 묘갈명과 묘표, 묘지명, 시장(諡狀) 등이 있다.

퇴계는 제자들이 작은 학문공간을 마련하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손수 현판이나 시를 써서 격려했다. 그런 일에는 자신의 글을 애써 아끼지 않았다. 그러니 제자들이 자신의 선대(先代)에 대한 행장을 봉청했을 테고 퇴계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을 것이다.

퇴계 선생이 남긴 문집의 분량이 방대한 것을 보더라도 그가 글쓰기를 얼마나 즐겼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행장과 관련해서 퇴계는 매우 엄선된 몇몇 인물에 한해서만 글을 남겼다.

퇴계집 중에 행장 부문은 두 권 분량이다. 48, 49권에는 명종, 농암 이 선생, 성주목사 황 공, 정암 조 선생, 회재 이 선생, 의정부우찬성 권 공, 선부군 행장초 등 8명에 대해서 쓴 행장만이 남아 있다.

그 면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명종은 당시의 국왕이고, 농암 이 선생은 주변에서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조선 중기의 명신 이현보이며, 성주목사 황공은 자신의 애제자로 먼저 세상을 버린 금계 황준량, 정암 조 선생은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자신이 존경했던 선배인 조광조다.

다음 권에는 회재 이언적과 충재 권벌,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부친에 대한 행장을 임시로 적어두었다.

이를 정리하면 ‘선생(先生)’이라는 표현을 쓴 이는 농암 이현보,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이고 ‘공(公)’이라는 표현을 쓴 이로는 금계 황준량과 충재 권벌을 들 수 있다.

표현에 있어서 ‘선생’이냐 ‘공’이냐 하는 문제는 이후 논란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정암 조광조의 경우는 예외지만, 농암 이현보와 회재 이언적 양 가문에 있어서는 공히 퇴계 선생과의 관계와 관련해 논란이 있었다. 농암 문중과 야기된 사승(師承) 논쟁(論爭)이 그것이다.

그런데 회재 이언적과 충재 권벌을 두고 한 사람은 선생을, 또 다른 한 사람은 공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나름대로 의미를 둔 것으로, 학자와 정치인으로서의 비중을 고려해 잣대를 달리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나 이도 간단치는 않다. 금계 황준량의 경우는 자신의 제자이기에 공이라는 표현이 합당하지만, 충재의 경우는 안동 지역의 23년 선배며, 국왕도 인정했을 정도로 학문을 즐겼던 실천 유학자였던 점을 감안하면 선생이라 표현해도 큰 문제는 없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나 퇴계가 그렇게 결정한 것이라면 그에 따른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회재 이언적과 충재 권벌은 을사사화라는 혼란기를 수습하기 위해 함께 고민했던 주역이었다. 두 사람은 인종이 세상을 떠난 뒤 이복동생이던 명종이 왕위를 계승했을 때 원상(院相:국왕 사후 졸곡까지 26일까지 정무를 총괄하던 임시벼슬)에 함께 임명되었다.

그러나 후일 회재 이언적은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최고의 평가를 받았으나 충재 권벌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리고 회재의 고향인 경주 양동과 배향 서원인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비중에 비해 충재 권벌의 고향인 봉화 유곡(닭실)과 배향 서원인 삼계서원은 일반의 관심권밖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충재 권벌은 이 시대에 재조명되어야 할, 잊어서는 안 될 큰 인물이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굽히지 않았던 절개를 지녔다. 이는 영의정을 지냈던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표현에 잘 나타나 있으며(公有死難不可奪之節), 이를 행장의 글에서 인용한 퇴계는 ‘그 말씀이 참으로 인정된다(其言不信然也哉)’고 평가했다.

그러나 충재의 절개는 강성 일변도로 흐른 것은 아니었다. 을사사화를 평한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글에 “대신의 풍도를 가진 한 사람이 있었으니 곧 찬성 권벌이다(得大臣風度者一人 曰權贊成). 오호라, 참으로 위대하도다”라는 문장이 보인다.

권벌은 을사사화 당시 병조판서로 있었다. 그때 좌의정 유관과 이조판서 유인숙 등이 억울하게 귀양가게 되었다. 이때 그는 죄 없는 대신을 귀양 보내는 것에 반발해 강개하게 항의했다.

이때 원상으로 있던 회재 이언적은 권벌이 항의해 올린 글을 보고 놀라며 “이렇게 하면 화변(禍變)을 더욱 일으키게 할 뿐”이라며 지나치게 직설적인 문구를 지웠다. 이에 권벌은 탄식하며 “이런 말을 지워버리면 차라리 아뢰지 않는 것이 옳소”라며 반박했다. 결국 문제의 원고를 고쳐 상소했으나 문정왕후의 노여움을 사 귀양을 면치 못했다.

이런 사실을 전한 율곡 이이는 자신의 석담일기에서 “행실에 있어서는 권 공이 이 공을 따르지 못했으나 화난(禍難)에 임해 항절(抗節)한 데 있어서는 이 공이 권 공에게 양보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는 이 공이 권 공보다 우월하다고 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다. 흥미로운 평이 아닐 수 없다. 충재에게 후한 점수를 준 점은 기질적으로 율곡과 통하는 점이 충재에게 있었던 때문은 아니었을까.

충재의 묘소는 봉화 유곡리 중마을(내유곡) 큰재궁골에 있다. 단분(單墳)으로 정경부인 화순 최씨와 합장이다.

묘갈에는 ‘충정공충재권선생지묘(忠定公충齋權先生之墓)’라고 쓰여 있다. 부친인 의정공 권사빈(權士彬)과 모친인 파평 윤씨, 숙부인 교수공 권사수와 부인 봉화 금씨, 아들 권동보와 권동미 등 후손들의 묘소가 함께 자리잡고 있다.

선생의 신도비명은 특이하게도 두 기가 서 있다. 원래는 사후 20년이 되던 1568년(선조1)에 좌의정에 추증되었을 때 사암 박순이 지었으나, 1591년(선조24)에 재차 광국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어 영의정으로 증직되자 우복 정경세가 다시 지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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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록(近思錄) - 영조가 하사한 서책, 종택에 보관

조선시대에 있어 학자의 필독서였던 근사록은 원래 중국에서 주자(朱子)와 여조겸(呂祖謙)이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등 네 학자의 글에서 일상 생활에 절실한 것을 뽑아 편집한 책자다. 제목은 논어(論語)의 '절문근사(切問近思)'에서 나온 말로 ‘절실하게 묻고 그것을 가까운 데서 생각하면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전체 14권 622조목으로 된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에 우리나라로 들어온 이래 수차에 걸쳐 간행됐고 몇 종은 현재 보물로까지 지정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책들 중의 두 종류는 충재 종택에 보관되어 있다.

중종 초년에 충재 선생은 국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하루는 경복궁 경회루에서 여러 신하와 함께 상화연(賞花宴)을 벌였는데 행사를 마친 뒤 내시가 수진본 근사록을 주웠다고 왕에게 아뢰었다.

책을 본 중종은 즉시 “이것은 권벌의 수중물(袖中物)일 것이다”하고 즉시 돌려줄 것을 명했다. 이는 국왕도 알아줄 정도로 충재가 근사록에 심취해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 뒤 영조 때에 이르러 이러한 전조(前朝)의 고사(故事)를 들어 국왕이 영남 감영을 통해 후손으로 하여금 당시의 책자를 받들고 오게 하라고 명했다.

이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하고 있는 충재의 후손 강좌(江左) 권만(權萬)이 책을 받들고 조정에 들자 영조는 의관을 정제하고 맞아들여 보고는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대학연의(大學衍義) 등 서책을 하사해 최대의 경의를 표했다. 영조가 내사(內賜)한 이들 서책들은 모두 종택에 잘 보관되어 있다.

청암정에 올라보면 ‘근사재(近思齋)’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충재의 서책이요 가문의 자랑인 근사록을 보관하고 있는 유서깊은 공간이다.

 

그림ㆍ글ㆍ사진=김영택 펜화가

 

출처 : 황세옥의 전통건축이야기
글쓴이 : 황세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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