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장군묘(權慄將軍墓)
-종목 시도기념물 2 -지정일 1972.05.04 -주소 경기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산168-1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명장 권율장군(1537~1599)의 묘소이다. 장군의 묘를 중심으로 좌우에 전 부인 창녕 조씨와 후 부인 죽산 박씨의 묘가 함께 있고, 묘비와 상석, 향로석, 동자석이 묘 앞에 세워져 있다. 묘역 입구에 세워진 신도비(왕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묘 근처에 세운 비)는 철종 12년(1861)에 다시 세운 것이다.
권율장군은 선조 15년(1582)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맡았고, 의주목사로 부임하여 북방 여진족을 방어하였다.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에서 군인, 지역민들과 힘을 합쳐 왜군 3만여명을 물리치는 큰 쾌거를 이뤄냈다.
<상세설명>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명장인 만취당(晩翠堂) 권율(1537∼1599) 장군의 묘소이다. 선조 15년(1582)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55세 때에는 의주목사로 부임하여 북방 여진족을 방어하였다. 임진왜란(1592∼1598) 중에는 전주에서 군사 만 여명을 지휘하여 독산성에 진을 치고 적이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또한 선조 26년(1593)에는 서울을 회복하고자 행주산성으로 진을 옮겨 군·관·민이 힘을 합하여 3만의 왜군을 물리쳤다.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진주대첩, 한산도대첩, 행주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장군이 선조 32년(1599)에 62세로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그의 관직을 영의정으로 높였으며, 선조 37년(1604)에는 선무공신 1등에 영가부원군으로 모셔졌다. 현재 묘역에는 장군의 묘를 중심으로 좌우에 전(前)부인 창녕 조씨와 후(後)부인 죽산 박씨가 안장되어 있다. 묘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동자석 1쌍이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을 세웠다. 묘역의 입구에 있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는 기존의 신도비 비문이 마모되어 철종 12년(1861)에 장군의 후손들이 새로 세운 것이다.
●권율 [權慄] 1537(중종 32)~ 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명장.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아버지는 영의정 철(轍)이고,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46세 때인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좌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鏡城判官)·의주목사 등을 두루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서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서울을 회복하기 위해 북진했다. 용인에서 일본군과 마주치자 권율은 우선 임진나루를 확보할 것을 건의했으나 묵살되었고, 결국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패전했다. 이후 광주에 되돌아갔다가 전라좌도도절제사로 임명되어 금산군 이치(梨峙)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크게 이기고 호남을 지켰다. 이 공으로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했다. 이해 12월 병마절도사 선거이(宣居怡)를 부사령관으로 삼아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다가 수원 독왕산성(禿旺山城)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왜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대군을 보내 성을 공격했으나, 수비를 굳게 하면서 유격전술로 맞서 이를 격퇴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서울에 고립되었다. 1593년(선조 26) 2월에 선거이에게 5,000의 병력을 나눠주어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쳐 도성의 왜적을 견제하게 하고, 자신은 관군 2,300명과 처영(處英)의 승병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했다. 이때 왜장 우키다가 지휘하는 3만의 적군이 7대로 나뉘어 맹렬히 공격했으나, 관민이 일체가 되어 싸워 적을 격퇴하고 크게 이겼다.
그뒤 파주산성으로 옮겨 주둔했다가,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휴전상태가 되자 전라도로 돌아갔다. 그해 6월 행주에서의 전공으로 도원수(都元帥)에 올랐으나, 도체찰사(都體察使) 및 순찰어사(巡察御使)와의 불화로 말미암아 도망병을 즉결처단한 일이 빌미가 되어 1596년 해직되었다. 그러나 바로 한성부판윤으로 기용되어 비변사당상을 겸직하고, 충청도순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후퇴를 거듭하다가 이순신이 적의 해군을 저지한 틈을 타서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까지 남하하여 적과 맞섰으나, 사령관 양호(楊鎬)의 갑작스러운 퇴각령으로 철수했다. 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했으나, 충돌을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방해로 실패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599년(선조 32) 노환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그해 7월에 죽었다. 1604년 효충장의선무공신일등훈(效忠仗義宣武功臣一等勳)에 책록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1841년 행주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 그해 사액(賜額)되었으며, 그곳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金武鎭 글
●행주 대첩과 권율(權慄) 장군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율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 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영의정 권철(權轍)의 막내 아들이자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임진왜란의 조선군 장수로, 왜란 당시 조선군 총사령관인 도원수로서 왜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데 기여했으며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끈 장군으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사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임진왜란 이전
1537년 후일 영의정을 지내는 권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상당히 유복한 가정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관직에 나아갈 생각은 않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했다. 가족들의 권고에 뒤늦게 그가 46살이 되던 1582년(선조 15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를 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이어 예조정랑·호조정랑·의주목사(義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1592년 그의 나이 56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한양이 함락되고 왕실이 북쪽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국내 사정이 시시각각으로 위태로워져서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光州牧使)로서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병사들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라 패전하고 말았다.
▶이치 전투
그 뒤 권율은 남원에 주둔하여 1천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광주(光州)로 가서 군병을 모집하고 남원으로 이동했다는 설도 있다.권율은 전라도 금산에서 전주로 진격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진산 인근 이치(배고개)에 진을 쳤다. 임시 도절제사 권율(權慄)과 동복현감 황진(黃進)이 이끄는 1천여명의 조선군이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2천여명의 대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전투로 일본의 전라도 진격작전을 궤멸시켰다. 이 승리로 일본군은 그 후 다시는 전라도를 넘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권율은 전라감사로 승진하였다.
▶독왕산성 싸움과 세마대
권율은 때마침 명나라에서 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을 탈환할 목적으로 2,300명의 관군과 500명의 승병을 이끌고 한양으로 향했다. 한양으로 향해 북상하던 도중 오산 독산(禿山)의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주둔하였다. 독왕산성은 물이 귀한 곳이었으며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이끄는 일본군은 그 기미를 알고 한달간 성을 포위했다.
이때 권율은 산성 위에 군마들을 세워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말에게 쌀을 쏟아붓고 씻기게 하였다. 성 아래서 볼 때는 마치 풍부한 물로 말들을 씻기는 것 같이 보였다. 이에 일본군은 의기소침하여 포위를 풀고 서울로 후퇴하였으며, 권율의 병사들은 이를 추격하여 일본군에 3천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게 만들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권율의 병법을 높이 치하하여 독왕산성 정상에 세마대(洗馬臺, 말을 씻긴 곳)를 짓게 하여 오늘에 이른다.
▶행주대첩
이러한 기지로 일본군의 서진(西進)을 막은 권율은 1593년 음력 2월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宣居怡)에게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의병장 김천일(金千鎰)과 승병장 처영(處英)의 병력을 합쳐 3,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였다.
행주산성의 군민들은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 온 우키다 히데이에의 일본군을 맞아 바위, 화살, 불덩이, 끓는 물을 퍼부어 1만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적장 우키다 및 토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의 오른팔이라 불리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킷카와 히로이에에게 모두 부상을 입히고 격퇴하였다.
이때 성내의 아녀자들이 치마 위에 짧은 덧치마를 대어 적군들에게 던질 돌덩이를 운반한 것이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임진왜란 전부터 행주치마라는 단어가 존재했다는 점으로 볼 때 이는 맞지 않다. 또한 이때 조선군의 신무기인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도 맹활약한 바 있다.
행주대첩은 이순신(李舜臣)의 한산대첩, 김시민(金時敏)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빛난다. 권율은 이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탈영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어 어마(御馬)까지 하사받았다.
▶정유재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권율은 일본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와 함께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명나라 군대 사령관 양호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그가 죽은 뒤 전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 이순신, 원균과 함께 임진왜란중 전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내려진 최고의 영예인 선무공신 1등에 봉해졌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고, 충장사에 배향되었다. 충장(忠莊)의 시호가 내려져 충장공(忠莊公)이 되었다.
권율은 비록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급제한 데다가 그 연령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7년간 조선 육군을 총지휘한 장군으로 바다의 이순신과 더불어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행주대첩 이후 눈에 띄는 큰 전공은 세우지 못하여
〈선조실록〉에서
사관에게 '행주(幸州)에서 한 차례 승첩을 거두자 갑자기 중명(重名)을 얻게 되어 도원수에 제수되고 곤외(?外)를 전제하였다.'는 혹평을 듣기도 했다.
▶이항복과의 관계
오성 이항복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아버지 권철의 집(영역)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철 집의 하인들이 따먹자, 소년 이항복이 이 사실을 알고 꾸짖었으나 하인들은 오히려 감이 자신의 소유라고 우겼다.
어느날 이항복은 권철이 있는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이 주먹이 누구의 주먹입니까?" 하고 물었다. 하인들이 이항복의 감을 훔쳐먹은 사실을 인지한 권철은 하인들을 단속하였고, 이항복의 영특함을 깨달아 아들인 권율에게 장차 이항복을 사위로 삼으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장난기 많은 오성대감 이항복은 종종 고지식한 장인인 권율을 놀린 일이 있다고 한다. 청렴결백한 권율은 조복과 의관을 갖춰입으면서도 제대로 된 내의를 입지 못하고 늘 베잠방이 차림이었다고 한다.
왜란이 끝난 후 병조판서인 이항복과 도원수 권율이 선조 임금 앞에 대궐조회에 참석한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이항복은 선조에게 날씨가 너무 무더우니 모두들 관복을 벗고 조회를 하자고 제의하였다. 선조는 쾌히 승락하고 신하들이 모두 관복을 벗었으나 관복 아래 베잠방이 차림인 권율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임금의 명령을 받고 마지못해 관복을 벗고 베잠방이 차림을 드러내어 망신을 당한 권율에게 선조는 파안대소하며 비단과 무명을 하사했다고 한다.
▶원균과의 관계
이순신과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원균이 수시로 수군통제사인 이순신과 마찰을 일으키곤 하였다. 이에 원균은 수군이 아닌 육군으로 전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냉철하게 전황을 읽고있던 이순신과는 다르게 수군 단독으로 왜를 격파할 수 있다고 수차례 조정에 장계를 하였고, 이순신을 견제하려는 선조의 심중과 맞아 떨어져 이순신의 후임으로 통제사직에 임명된다.
하지만 원균은 부임 이후 이순신의 수군 단독출병 불가의 판단이 옳았음을 알고 말을 바꿔 수륙 병진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균은 조선의 군사동원력이 17만명을 모은 임진년보다 크게 떨어진 상황인데도 30만은 동원할 수 있다고 하고, 섬인 가덕도까지 육군이 몰아치면 된다는 현실을 무시한 주장을 했다.
이에 권율은 비밀 장계를 올려 원균의 주장대로 육군을 움직이긴 어려움을 전하였다. 한편 조정에서 수군에게 원하는 것은 수군의 전면적인 부산포 진격이 아닌, 무력시위를 전개하여 일본이 보급선 유지에 불안감을 가지게 하는 것이었으나 원균은 이조차도 하지 못하다가 원균이 부임전과는 달리 이런저런 핑계로 칠천량으로 출동하지 않자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렸다.
사실 권율이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칠천량으로 출동하지 않았다는 사유는 표면적인 사유일 뿐이며 권율은 그 정도로 생각없는 위인이 아니였다.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내린 실제 사유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시절에는 윤근수, 윤두수 형제의 의견을 옹호하며 이순신의 주장을 반박하더니
막상 그렇게 해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몰아내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원균은 돌변하여 이순신이 주장했던 의견을 그대로 주장하게 된 것이다. 권율은 삼도수군통제사라는 관직에 욕심이 난 나머지 조정을 기망하고 임금을 갖고 논 원균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 후 원균은 전 병력을 끌고 출전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를 당하고 그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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