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안동권씨

[스크랩] 안동 權씨 세차항렬

권운영 2016. 5. 21. 23:17

안동 權씨 世系圖

 

 

                                                                                 <안동權씨 世系圖>

 

안동 權씨의 항렬(行列)


항렬(行列 / 行 다닐 행, 항렬 항)이란 친족집단 내에서의 계보상 종적(縱的)인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일가친족제도에서 각 세대마다 일정한 순서에 따라 이름 글자 가운데 항렬자를 넣음으로써

계보상 거리에 의한 친족관계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종적인 세대에서,

형제관계에서의 같은 항렬은 동항(同行),

아버지와 같은 세대는 숙항(叔行),

조부와 같은 세대는 조항 (祖行),

아들과 같은 세대는 질항(姪行),

손자와 같은 세대는 손항(孫行)이라고 한다.


항렬자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글자는 오행(五行)·십간(十干)·수(數) 등이며,

이것의 순서에 따라 각 세대마다 차례로 사용하고 순서가 다 되면 다시 반복된다.

그러므로 성명 3자만 보면 어느 성씨(姓氏) 몇 세손인가를 알 수 있는 독특한 작명제도로 쓰였다.

 

원래, 안권 (安權)의 항렬 (行列)은 중세에 수화목금 오행(五行)을 넣어서 썼다.

그랬더니 각 문중마다 항렬이 틀리고 통일이 되지않아 세수 (世數)를 잘 알 수가 없어,

1903(고종 계묘년)에, 대종회에서 아래와 같이 일(一), 이(二), 삼(三), 사(四).. 등 숫자로 항렬자를 쓰기로 결정하였다. 

 

안동 權씨 세차배정항렬(安東權氏 世次排定行列)

31世32世33世34世35世36世37世38世39世40世

항렬

丙 O

重 O

泰 O

寧 O

五 O

赫 O

純 O

容 O

九 O

升 O

예비항렬

大萬友
대만우

宗仁武
종인무

春龍正
춘용정

憲鐸爵
헌탁작

肅悟炳
숙오병

奇景英
기경영

宅處虞
택처우

俊說益
준설익

塾軌藝
숙궤예

斗協士
두협사

 

41世42世43世44世45世46世47世48世49世50世

항렬

O 一

O 元

O 全

O 澤

O 書

O 溟

O 七

O 駿

O 旭

O 甲

예비항렬

 

51世52世53世54世55世56世57世58世59世60世

항렬

懿O

恒O

玉O

德O

肇O

京O

世O

八O

執O

求O

예비항렬


※ 丁未 1907년 大宗會에서 각대별 수자가 포함된 문자를 정하였다. 

 

- 항렬표 출처 : 안동권씨대종원(http://www.andongkwon.org) -

 

 

< 世와 代 호칭 구분/정리 > :

   1) ○世=○代 : 혈통의 차례이고 祖孫을 헤아리는 단위이다.(기준을 포함한다) 

   2) ○世孫=○代孫 : 혈통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이며, 기준인 上代를 제외하고 後孫만 헤아린다.

   3) ○世祖=○代祖 : 혈통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이며, 기준인 下代를 제외하고 先祖만 헤아린다.

 

 

<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 >

휘諱는 고려사의 「행幸」 자로 되었다.
본래는 김씨이며 신라의 종성이었다.

 

경순왕 3년 기축(929)년 10월에 견훤이 고창군를 포위하였을 적에 공께서 김선평,장정필과 함께 의를 주창하여 고려 태조를 도와 경인(930)년 정월에 견훤을 병산에서 물리치니 고려 태조과 기뻐하여 이르기를 「幸」은 능히 기미에 밝고 도에 능통하다 하고 權자로 姓을 하사하고 공신으로 봉하였으며 작위를 주어 대상이 되시고 삼한벽상 삼중대광 아보공신 태사에 오르셨으며, 군을 승격하여 안동부라 하고 식읍토록 하였다. 안동부민들이 공의 위덕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드리고 김공과 장공을 배향하였다.

 

묘소는 안동군 서후면 천등산 남쪽 조화곡 자좌이며 도선이 점친 곳이다. 그러나 중간에 실전되었는데 이조 성종때 17세손인 평창군사 "옹"이 묘소를 찾은 뒤 실전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그 밑에 장사지내도록 하였으며 24세손인 "시"가 신도비명을 저술하고 고종 신축(1901)년에 32세손인 "중현"이 신도비를 개수하였으며 정조 병오(1786)년에 추원사를 경주 운곡에 세웠으나 고종 무진(1868)년에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폐된 뒤 병진년 중건을 도모하였으나 사람들의 공논으로 운곡서원에 현판으로 달았다.

 

서애 "류성룡"이 묘갈명을 저술하고 참의 벼슬을 역임한 "이경휘"가 글을 썼으며 미수 "허목"이 전서하고 판서인 "조복양"이 비음기를 저술하고 퇴계 이문순공 "황"이 증수기를 저술하고 후손인 참판 "응정"이 묘정비문을 찬술하고 후손 군수인 "성원"이 행장을 저술하였다.

 

경인(1950)년의 사변때 묘우가 소실되었고 무술년에 중건.. 능동의 묘사일을 매년 한식일과 10월 중정(음력 10월중 "丁"자가 두번째 드는 날).. 태사묘의 향례일은 2월 8월 중정일.. 경주 운곡서원의 향례일은 3월 초정일이다.

< 태사묘太師廟 >

태사묘는 성종2년(983년) 안동부사(安東府司)에서 3공신에게 제향을 올리면서 비롯되었다. 문헌비고(문헌비고)에는 “안동부에 삼공신묘가가 있는데 고려초에 세웠으며 태사 권행(權幸), 태사 김선평(金宣平), 태사 장정필(張貞弼)이 봉안되었다”고 하였으며, 모재 김안국(金安國)은 “권태사의 장손 휘 책(冊)이 스스로 구하여 안동부의 호장이 되고 대대로 3공신의 사당일을 주관하게 되었다. 신라와 고려의 즈음에 사묘(祠廟)의 제도가 미비하니 3공신의 위판은 부사(府司)에 있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안동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는 “3공신의 사당이 부사(府司)에 있고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 권행(權幸) 김선평(金宣平) 장정필(張貞弼)의 사당이다”라고 하였다.

 

 

< 始祖 太師公을 配享한 운곡서원雲谷書院 >
경주시 강동면 완신리 310번지에 산세가 수려한 곳에 운곡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운곡서원은 225년전인 정조8년(1784년)에 경주문중에서 태사공을 숭봉하는 원사를 경주에 건립코자 발의하여 전국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추원사(追遠祠)로 창건하고 시조 태사공을 주벽으로 죽림공과 귀봉공을 배향하였다. 그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고종 무신년에 훼철되었다.

 

추원사는 불교에서 절터라 하여 차지하였으나, 권중현(重顯)대신 등의 힘으로 다시 찾아 광무7년(1903년) 다시 사우(祠宇)자리에 설단하고 재사와 전사청을 지었으며 동재와 서재, 부속건물을 완전히 복원하여 경주유림의 향례를 받들어오다가 1976년 재일거류민들의 성금으로 묘우(廟宇)와 신문(神門)을 중건하고 강당은 배향위 양가가 부담하고 외삼문 담장, 동서재는 전국 자손들의 성금으로 완전 복원하였다. 그해 축문을 개정하여 사림숭봉(士林崇奉)의 운곡서원(雲谷書院)으로 승원하고 묘호는 경덕사(景德祠)로 하고 歲一享 三月初丁日로 하였다.

 

 

출처 : 가야해인 선강禪剛
글쓴이 : 禪剛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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