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봉화 인문학기행 답사기- 김경식

권운영 2015. 7. 3. 16:17

봉화 인문학기행 답사기

                                                   김경식(시인,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

■ 봉화의 지리와 역사

봉화군은 경북의 최북단에 위치한 지역이다. 동으로는 울진군, 서쪽으로 영주시, 남으로는 안동시와 영양군, 북쪽의 강원도 영월군, 삼척시, 태백시와 이웃하고 있다. 군청소재지가 있는 봉화읍 내성리를 중심으로 산악지형으로 이우러진 청정지역에 9개면의 156개 자연부락들이 평화롭게 마을을 이루며, 34,000여명이 살고 있다. 봉화군은 태백산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으로 태백산과 연화봉, 구룡산 같은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이 장엄하게 솟아나 맑고 신선한 공기를 제공한다.

배바위산과 오미산등은 봉화의 동쪽을 지키고 있고, 각화산과 왕두산은 작은 산들과 더불어 골짜기에 사람이 살만한 터전을 확보하고 있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분수령을 이룬 곳에서 시작한 낙동강의 발원지이기에

석포리천, 광비천 내성천 주변에 작은 평야가 형성되어 논농사가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봉화는 고구려 땅이었다. 당시 지명은 <고사마현>이었지만 통일신라 때에 옥마현으로 지명이 바뀌어 삭주(춘천)의 속현으로 편입된다. 봉화라는 지명을 얻은 것은 고려가 개국되고 난 후다. 1018년(현종9년) 안동부의 속현으로 편입되어 고려 말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1390년(공양왕2년) 관청이 설치되어 중앙집권의 통제를 받게 되었으며, 조선이 개국 된 이후 1413년(태종13년) 8도의 지방제도 개편할 때부터 현감이 파견되었다. 1895년 봉화군은 안동부에 속군이 되었으며, 1896년에 경상북도에 편입된다.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군과 면의 통폐합에 따라 9개면으로 분류되어 현재 행정구역의 골격이 유지된다.

 

봉화군에서는 아직도 동제를 지내는 곳이 많다. 약 190개의 자연부락에서 동제를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동제로 모시는 대상은 서낭신과 늙은 나무들이지만 공민왕을 신으로 받드는 곳도 있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피난처였던 청량산 주변이 그곳이다.

 

■ 닭실마을과 청암정

 

□ 닭실마을

 

봉화군의 답사 1번지는 <닭실마을>이다.

한자로 유곡(酉谷)은 ‘닭의 골짜기’라는 뜻을 지니지만 우리말로 표현하면 ‘닭실“이다. ‘실’은 사람 사는 장소와 골짜기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봉화의 진산(鎭山)은 문수산이다. 닭실마을은 문수산의 남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내성천이 휘돌아가고 동네 앞으로는 신탄(新灘)이 흘러간다.

 

해발 200m의 동서로 기와집들이 앉아 있는 모습은 평화로우며, 동쪽으로 해를 토한다는 토일(吐日) 부르기도 했다. 12지간의 묘(卯) 방향에서 해가 뜨므로 ‘묘곡(卯谷)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서쪽은 지간으로 유(酉) 방향으로 해가 지는 방향에 무게를 두었던지 현재 행정 지명은 유곡(酉谷)리다.

‘닭실마을’은 문수산 자락이 병풍으로 가리며, 남서로 흘러내린 백설령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는 풍수를 믿어 왔다. 금계포란(金鷄抱卵)은 ‘금닭이 달걀을 품고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준비하는 곳’이란 풍수적인 의미를 지닌다.

 

충재 권벌(1478~1548)이 이곳에 자리 잡기 시작한지 500여 년간 후손들의 주로 안동권씨들의 삶터다. 이곳에는 충재가 손수 건립하였던, 청암정과 청암 권동보가 권벌 선생의 삶의 철학과 역사성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석천정사가 자리잡고 있다.

권벌 선생은 대과에 급제해 벼슬을 하기도 하였지만 1519년의 기묘사화 후에 닭실마을에 터를 잡고 살다가 우찬성을 지내며, 조선 조정 업무에 헌신하다가 1545년 을사사회에 연루돼 파직당한다. 1547년 벽서사건에 휘말려 삭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충재 권벌이 삭주 유배지에서 쓴 <삭주영회>라는 시는 가슴을 아리게 하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 

 

머나먼 국경의 산하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새해에는 변방의 사막에서

눈 쌓인 산을 보며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

형 생각과 동생 생각에 흘린 눈물이 수건에 가득하네  

 

-충재 권벌의 시 <삭주영회> 석천정사 가는 길에 있는 시비에서 옮김

 

충재 권벌 선생의 묘소는 부모님과 함께 닭실마을 뒷산에 자리잡고 있다.

이중환은 자신의 저서 택리지에서 살기 좋은 집터는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가 좋아야 한다고 기록했다. ‘닭실마을’은 풍산 류씨가 삶의 토대를 구추하였던 안동 하회마을, 의성 김씨의 안동 내앞마을,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공존하며 살아 왔던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영남지방의 4대 길지다.

닭이 알을 품고 있는 지형, 일명 금계포란형에서 따온 지명은 이를 대변한다.

 

충재는 본래 안동에서 살았다. 1519년의 기묘사화로 정암 조광조가 세상을 떠난 후에 봉화군 닭실로 삶터를 옮긴다. 이곳은 그가 삼척부사 시절에 보아 두었던 곳이었다. 1526년 이곳에 청암정을 건립하고 경학을 공부하며 약 10년 동안 학문 연구와 제자들을 양성한다.

솟을대문을 통과하면 앞에 사랑채가 있고 내삼문을 지나면 안채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형태는 영남지방의 전형적인 ㅁ자 형태의 전형이다.

충재 종택은 ㅁ자형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내삼문, 별채, 사당채, 솟을 대문 등을 갖춘 전형적인 양반 가옥 구조이다.

 

충재 권벌은 4대 사화를 모두 경험 했을 정도로 선비들이 고난을 당하던 시대의 인물이었다. 봉화 산골을 찾아 들어 택지를 선정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가 평소 ‘근사록(近思錄)’을 정독했던 것도 이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근사록은 주희(朱熹1130~1200)와 여조겸(呂祖謙1137~1181)이 송학의 토대를 확보한 북송의 주돈이(周敦頤: 1017년 ~ 1073년) 저서에서 학문의 진수를 간직했던 글 중에서 622조를 선택하여 14권으로 압축한 책이다.

 

근사(近思)는 논어의 자장편(子張篇)에 있는 “절박하게 질문하면서 가까운 것부터 생각한다면, 인은 그 가운데에 존재한다(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 따온 말이다.

조선 시대에 초학자를 위한 입문서로 삼았던 근사록을 읽으면, 유교의 진리 뿐 아니라 삶의 철학을 터득할 수 있는 철학과 지조를 몸에 지니게 만들었으니 이 책의 진가를 알만하다. 청암정에 근사재(近思齋) 현판이 걸린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충재선생은 닭실마을 삶터를 잡기전에 저 하회마을을 답사했다. 닭실마을을 더 살기 좋은 터로 생각하였던 충재 선생은 이곳을 안동권씨들의 삶터로 만들었다.

이 지역에서 약 70여명의 과거 합격자를 배출한 것과 일제강점기 11명의 독립운동가로 인해 그 정기를 단절시키려고 했던 것이 영주와 강릉으로 이어지던 영동선 열차였다.

일제 강점기 때 놓은 철길은 이런 독립지사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닭실마을과 나란히 놓여 있다. 닭실마을이 금계포란평의 닭과 연관지어 천적인 지네처럼 보이는 철길로 이를 막으려고 했다. 일제의 집요한 야욕에 소름이 돋는다.

 

■청암정(靑巖亭)

 

권동보(1518~1592)는 권벌의 아들이며, 청암정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당호다.

청암정은 거북바위에 춘양목을 사용하여 지은 아름다운 정자다. 거북바위에 붙어 있는 듯한 정자는 연못으로 둘러져 있어서 작은 서재인 충재에서 돌다리를 건너면 닿는다. 거북처럼 생긴 넓은 바위에 6칸 대청과 4칸의 마루방 정자를 건립하고, 바위 주변에 작은 연못을 파고 둑을 쌓았다. 자연과 인공이 조화가 얼마나 의미있고, 품격이 있었던지 이곳을 탐방했던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청암정의 풍광과 지정학적인 위치와 자연과 인공미를 두루 극찬했다.

 

1519년 기묘사화에 충격을 받아 낙향한 권벌은 유곡에 은거하며, 아들 권동보와 함께 1526년 이 정자를 완성한다. 건립당시 정자의 이름은 구암정(龜巖亭)이었다.

거북바위에 지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청암수석’이란 현판 글씨는 미수 허목(1595~1682)이 썼고, ‘청암정’ 현판은 매암 조식(曺湜1526~1572)이 썼다. 매암 조식은 함양에서 태어났으며, 남명 조식 25세 때인 1551년, 덕천서원을 찾아 들어 남명 선생께 인사를 드리고 제자가 되었던 분이다. 1552년에는 함양 남계서원 건립에 관한 중지를 모았던 당시로는 선각자였다.

 

청암정에는 온돌방이 없다. 이곳에 구들을 놓아 아궁이를 만들어 불을 지피면 거북이 형상의 바위가 뜨거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철거했다고 전한다. 바위가 뜨거워서 운다고 하여 방을 철거하고 마루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무생물을 생물로 보았던 우리 선조들의 자연관이 담겨 있다.

청암수석(靑巖水石)은 청암정(靑巖亭)에 미수 허목이 쓴 현판에 새긴 글씨로 이곳에 한 번 가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다가 1682년(숙종8) 88세 되던 해 5월에 청암수석 이란 4글자를 써놓고 글씨를 전달하기 전에 노환으로 눕는다. 이 글씨가 충재 종택으로 보내지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결국 이 글씨는 미수 허목의 마지막 글씨가 되고 말았다.

 

靑岩亭者(청암정자)

春陽權忠定公山水舊墻(춘양권충정공산수구장)

洞壑水石最佳稱絶景(동학수석최가칭절경)

僕年老路遠(복년노로원)

不得一遊其間(부득일유기간)

懷想常在高壁淸溪(회상상재고벽청계)

特書靑岩水石四大字(특서청암수석사대자)

亦慕賢之心也(역모현지심야)

識之(식지)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팔년맹하상완태령노인서)

청암정(靑巖亭)은

춘양 권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산수 좋은 곳에 지은 고택이라 했던가.

골짜기에는 수석이 최고로 아름답고

절경이라 들었네,

늙은 머슴 같아진 몸은 길이 멀어

그곳에서 놀 수 없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절벽과 푸른 물결을 그리워하네

특별하여 청암수석(靑巖水石)이란 4글자를 써 놓은 것은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라네.

이런 사실을 기록하네

1682년(숙종8) 초여름 상순에

태령노인(台嶺老人) 허목(許穆)이 쓰네

 

-김경식 번역

 

청암정의 현판글씨는 충재종택 집안에서 허목에게 사람을 보내 부탁한 것이었다. 허목은 청암정의 정자 현판 글씨를 쓰지 않고 청암수석(靑巖水石)이라는 그림같은 전서체로 써주며 청암정에 걸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이 글씨를 쓰고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글씨였다.

329년이 지난 2011년 어느 가을날 미수 허목의 13세 종손이 청암수석이란 이 글씨를 찾아 나섰다. 청암정에 걸린 마치 그림 같은 <靑巖水石>글씨를 오랫동안 침묵으로 바라보던 종손은 돗자리를 부탁했다.

돗자리를 편 후에 청암수석(靑巖水石) 편액에 절을 하면서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종손은 적어도 이 정도의 인물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건널 수 있는 청암정 석교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들창을 열어젖힌 넓은 누마루가 ‘청암정’ 현판 아래로 놓여있다.

청암정은 어느 때나 누구에게나 개방하기에 탐방객은 누구든 앉아 머물 수 있다. 이곳을 다녀갔을 선비들을 생각하면 그 의미는 배가 된다.

청암정 앞에 앉아 있는 <충재>는 정갈하고 기품이 있는 선비집의 품격을 지닌 고택이다. 청암정 주변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운치는 나무들이 내고 있다.

늙은 소나무, 향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이 계절마다 이곳을 지키며 풍광을 아름답게 연출하고 있다. 정자와 주변이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역사성이 없거나 다녀간 인물이 없다면 유원지에서 만나는 풍광과 무엇이 다르랴.

퇴계 이황은 청암정을 탐방하고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어 남겼다.

 

酉谷先公卞宅寬(유곡선공변택관) 권벌 선생이 닭실에 집터를 정하였네

雲山回復水灣環(운산회복수만환) 산에는 구름이 머물고 물길은 고리처럼

                                               휘돌아가네

亭開絶嶼橫橋入(정개절서횡교입) 섬에 세운 정자에 닿기 위해 다리를 놓았네

荷映淸池活畵看(하영청지활화착) 연꽃이 푸른 연못에 어른거리듯 살아 있는

                                              그림을 모는 듯하네

稼圃自能非假學(가포자능비가학) 채소와 나무 심기는 배우지 않았어도 잘 했고

軒裳無慕不相關(헌상무모불상관) 벼슬을 탐하지 않았기에 관심이 없었네

更燐巖穴矮松在(경인암혈왜송재) 바위 구멍 앞에 구부러진 작은 소나무가

激勵風霜老勢盤(격려풍상노세반) 험한 세월 격려하며 암반 위에서 늙어가네.

 

이렇듯 퇴계 이황이 청암정을 읊은 시에는 정자의 주인이었던 충재 권벌의 삶과 죽음의 모습이 담겨 있다. 퇴계는 충재를 존경했다. 같은 집안이기도 했다. 권벌의 증조부가 이황의 외조모와 혼인을 하였기 때문이다.

 

 

□ 충재(沖齋)

청암정 입구 동쪽 옆에는 충재(沖齋)라는 당호의 작은 집이 있다. 청암정의 유명세로 이 작은 서재는 탐방객들이 눈길을 주지 않는다.

 

나는 이 작은 서재처럼 작고 소박한 한옥을 지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충재 권벌의 개인서재로 한서당(寒栖堂)이라고 불렀고, 1536년에 지었으니 청암정 보다는 10년 늦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ㅡ자 형 평면의 이 작은 한옥의 대청과 방의 아궁이에 정감이 간다. 추운 겨울날 이곳에 군불을 때고 멀리에서 손님과 담소를 나누던 충재 권벌 선생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좌측의 작은 방과 우측의 대청을 연결하는 쪽마루의 지혜에 건축 당시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대청 우측에 정료대(庭燎臺)가 서 있다.

 

예전에 이곳에 관솔가지를 놓고 태우며 주변을 밝혔던 돌로 제작한 도구다.

외벌대 기단에 민도리 기둥의 서민 주택을 지었던 충재의 검소한 삶을 이 건축물에서 엿볼 수 있다.

기단은 집터를 다지고 수평을 잡은 후에 높인 부분이다. 기단은 빗물과 뱀이나 해충으로 보호를 받으며, 이곳에 주춧돌을 놓아 기둥을 바치고 지붕의 하중을 분산하여 그 힘을 지탱하여 준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기단을 쌓았는지는 알 수 없다.

외벌대 기단은 일반 초가집과 가난한 양반들이 집을 지을 때 흙이나 자연석을 이용했다. 두벌대는 양반집에서 썼고 세벌대 이상은 왕족이나 권위 있는 건물에 사용되었다.

 

■충재박물관

충재박물관에는 보물로 지정된 <충재일기>와 <근사록> 뿐 아니라 고서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청암정 걸려 있던 퇴계 이황이 직접 쓴 ‘청암정제영시’ 편액과 석천정에 있던 권동보가 지은 ‘제석천정사’ 편액 등도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근사록(近思錄)은 중종에게 하사 받았는데 1370년에 간행된 희귀본이다.

충재일기는 예문관 검열로 근무할 때 기록한 한원일기(翰苑日記)와, 부승지와 도승지로 있을 때 쓴 승선일기(承宣日記)를 묶은 것이다.

분재기(分財記)와 호적단자도 전시되어 있다. 분재기는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준 것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런 도서와 문서들이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등을 겪으면서도 보관되어 있었다는 것은 후손들의 정성과 하늘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울러 중종 임금이 충재 권벌에게 내린 교서와 고서 미수 허목의 서첩등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 봉화 워낭마을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 산정마을 582-1번지는 워낭소리 촬영지다.

주인공 최원균 할아버지와 이삼순 할머니, 늙은 소였던 누렁이(1967~2008)의 이야기는 실화 영화를 보면서 많은 감동을 주었다. 팔순의 주인과 40살 된 늙은 소의 이야기는 사람살이의 변화무쌍한 현실적인처세의 시대에 사람과 소와의 인연이 얼마나 깊고 넓을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

내성천을 끼고 휘돌아 산과 골짜리로 둘러싸인 하눌리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마치 워낭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누렁이는 죽어 뒷산에 묻혔지만 지금은 최노인과 논 길 을 가는 모습을 재현한 동상이 제작되어 사람들을 반긴다.

누렁이의 희생을 알아주는 최원균 할아버지의 고집과 뚝심은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간의 희생을 강요하고, 버리는 냉혹한 현실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보여주었다.

다정다감한 인간성의 회복, 이것이 워낭소리 주인공이 살았던 곳을 답사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최원균 할아버지의 다음과 같은 다큐멘터리 영화의 대사가 들리는 듯하다.

“아무리 말 못한 짐승이라도, 나 한테는 이 소가 사람 보다 나아요.”

“농약 치면 소 먹고 죽어요” “사료 먹이면 살쪄서 애 못 낳아오”

평생동안 우직하게 하눌리 산골 마을을 지키며 살아온 늙은 농부 최원균 할아버지와, 마흔살 된 소 누렁이의 삶과 인연을 3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높이 평가한 것은 우리네 현실적인 삶이 자본에 노예가 되어 비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워낭소리의 촬영지에서 하늘을 바라본다. 삶은 무엇인가?

진정한 삶은 무엇인가?

■축서사

태백의 정기를 받은 봉화 문주산 중턱에 축서사가 자리잡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다.

축서사의 축(鷲)자는 독수리를 의미한다. 깃들서(棲)를 지니고 있으니 축서사는 ‘독수리가가 사는 절’이란 뜻의 집이다. 독수리는 지혜를 상징하는 날짐승의 우두머리이니 큰 지혜를 지닌 문수보살을 의미한다고 이해 할 수 있다.

절집을 자주 찾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다고 하는 봉화의 축서사는 신라 제30대 문무왕13년(서기 67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신라 문무왕 때에 창건 된 역사가 유구하다.

의상대사는 축서사를 창건하고 3년 후에 이곳에서 50여리 거리에 있는 봉황산 중턱에 부석사를 창건한다. 천년고찰의 역사와 전통은 1907년 이후 의병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에 일본군에 의해 방화되었으니 그들의 죄 값은 그 얼마인가?

 

1705년(숙종31년) 작성되었던 법당의 상량문의 기록에 의하면 축서사에는 법당이 5채, 요사채가 10여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병 소탕을 위해 일본군은 방화를 했고 이로 인해 남아 있는 것은 불에 타지 않는 석불좌상부광배와 3층석탑과 석등 뿐이다.

보물 제995호로 지정된 축서사 석불좌상부광배 대웅전 서벽에 봉안되어 있다.

통일신라 때에 많이 제작되었던 비로자나불이며 온화한 분위기의 얼굴에 큰 귀가 특징이다. 몸체는 단정하고 튼실한 가슴과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무릎을 넓게 벌리고 앉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목부위에는 주름이 선명하게 조각되었으며, 어깨에 걸친 승복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했던 양쪽 팔에 평행 계단형의 옷주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려져 있다.

축서사 석등의 정확한 설립연대는 밝혀지고 있지 않다. 다만 고려시대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토대석을 바치는 석등 윗쪽 부분에는 동일한 돌에 연꽃을 포개어 새기고 팔각의 모서리에도 연꽃을 새겨 넣었다. 석등의 등불을 보호하는 화사석(火舍石)에는 장방형 구멍을 사방으로 뚫어 놓았다. 그러나 이 화사석은 팔작지붕 밑 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없다. 축서사를 서정적으로 표현한 시가 있어 소개한다.

 

그리움으로 서있구나

옛 석등이여

 

그대 배후에 깔린 어둠속에서

다시 하루가 저물어 가고

 

마음속의 길들이 황무지처럼 헝클어진 날

가랑잎 휘날리는 길모퉁이에 서성이노니

 

나는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지혜도 얻지 못하였고

불밝혀 기다릴 사랑하나 간직하지 못하였구나.

 

어둠속에 산그늘처럼 희미해져 가는 것들

그것이 삶이었던가

 

그대와 불밝히고 살았던 짧은 청춘의 시간이

밤의 적막 속으로 사라져 갈 때

 

헝클어진 너의 머리칼 만지고

야윈뺨을 만지고 차가운 입술을 만져보지만

 

그리움으로 서 있구나

옛 석등이여

 

이제 누가 있어

저 쓸쓸한 처마밑에 등불을 올릴 것인가.

  - 이형권님 시 <축서사>에서 인용

 

 ■ 전우익 선생의 삶과 봉화

 

경북 봉화군 상운면 귀내(龜川) 마을은 전우익 선생이 감옥살이 기간을 제외하고 평생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마을이다. 이 마을은 500년간 옥천 전씨 집성촌을 이루면서 살아왔던 역사 깊은 곳이다.

봉화는 유림들이 은거하기 좋은 산과 골짜기에 정자가 많은 곳이다. 충과 효의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사림들은 이런 곳에 살 곳을 정하며 살아왔다.

2000년 어느 봄날, 나는 봉화 땅을 지나가면서 전우익 선생댁을 어렵게 탐방하였다. 이후 선생은 현암사에 펴낸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지만 당시에 이미 주름 많던 할아버지였다.

 

전우익 선생은 1925년 경북 봉화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국이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고도 15년이 지난 후고, 3,1운동의 실패로 해방운동이 소강국면에 접어들었던 때다. 1945년 해방이 될 때는 피가 끊던 20세의 청년기다.

그런 시기에 그는 사회운동을 하다가 1년 이상 감옥생활을 했다. 사전 구금 명목으로 <예비검속>으로 6년 동안 구금되기도 했다.

아내는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자결한다. 구금에서 풀려났지만 1988년까지 보호관찰 대상자가 되어 봉화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엄혹한 시절에 수배 대상자를 숨겨 주다가 봉화경찰서 유치장에 자주 드나들었다.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몸을 피했던 문부식과 김현장 신부도 전우익 선생의 봉화집에 숨어 지냈을 정도다.

사회주의 사상의 그늘은 언제나 위험천만한 상황을 만들었다. 그러나 생각은 항상 자유로웠다.

 

 

 

 

서울 왔다고 전화해서 나가보면

손에 두어 손 간고등어가 들렸다

왕골자리 매어 바꾼 돈으로

안동장에 가서 산 간고등어

의자보다 땅바닥이 편하다고

아무데서나 쭈그리고 앉길 좋아하는 그는

때로는 어울리지 않게

허리춤에 단소를 꺼내 들고는

수자리 살다가 도망온 신라병정 같은

꺼벙한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안동에서도 외진 골 촌사람 권정생과

박달재의 젊은 판화쟁이 이철수 얘기를 한다

얄궂은 세상은 그를

착한 농민으로 살게 두지를 않아

옥살이로 옥바라지로

몇 뙈기 안되는 땅 다 날리고

이제 남은 것은 텃밭뿐이지만

그는 소금에 절은 간고등어 들고

험한 세상 곳곳을 누비면서 사람도 만나고

진짜 농군이 되는 법도 가르친다.

 

- 신경림 시인의 시 <간고등어> (봉화의 전우익 선생에게) 인용

녹색평론 99호를 읽다가 보니

희망에 대해 쓴 어떤 이의 글에

노신, 서경식, 케테콜비츠의 글이 인용돼 있다

그 힘들던 80년대에

봉화 상운리 소나무 그늘에서

전 선생님께 듣고 읽던 사람들

이제 누구에게서

그 이름을 듣고 책 읽을 수 있나?

이 어두운 밤

다시 희망을 생각해볼 수 있나?

매화꽃 피는 이른 봄 아침

쌉쌀한 냉기 속에서

텅 빈 벌판의 고적한 마음

새삼 그리워 눈물 나네

 - 김용락 시 <전우익> 전

 

 

  ■ 춘향전의 주인공 이도령(성이성)의 고향  

 

 

춘향전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고전이다.

작품의 무대는 전북 남원이고, 주인공은 이도령과 성춘향이다.

그러나 이도령의 고향이 봉화라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는 고색 창연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다.당호는 계서당(溪西堂)이다.이곳은 성이성이 살았던 고택이다. 그의 아버지 부용당 성안의(芙蓉堂 成安儀)는 남원부사를 역임했던 인물이다.

 

소설을 가지고 현실적인 고향을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는 않지만 문학 또한 경험적인 소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기에 실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춘향전에서 악역의 대명사로 등장하는 인물은 변학도(卞學道)다. 탐욕과 착취의 탐관오리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남원부사로 근무하며 춘향을 강간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춘향은 목숨을 걸고 이를 막아내다가 감옥살이를 한다.

남원 광한루에서 변학도의 생일잔치가 성대하게 진행 될 때에 한 거지가 등장한다. 거지로 병장한 이몽룡이다. 춘향전은 이 대목에서 부터 흥미진진하여진다.

 

잔치에 참여한 남원 인근의 수령들과 토호 양반들은 그에게 붓과 먹을 주면 글을 지어보라고 한다. 제대로 쓰지 못하면 몽둥이로 때리고 망신을 주려고 하였을 터다. 붓을 잡아든 이몽룡은 거칠것이 없이 한시를 쓰기 시작한다.

 

金樽美酒千人血 (금준미주천인혈) 금잔의 맛좋은 술은 천백성의 피요,  

玉盤佳肴萬性膏 (옥반가효만성고) 옥쟁반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니.  

燭淚落時民淚落 (촉루락시민루락)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들이 눈물 쏟고  

歌聲高處怨聲高 (가성고처원성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도 높아라.

 

연세대학교 설성경 교수는 이 시가 봉화 출신의 성이성(成以性)이라는 실존 인물이라고 연구논문에서 주장했다.

성이성(1595∼1664)은 본관이 창녕이며, 16세에 진사가 되었지만 임진왜란 직후의 광해군 집권기에는 벼슬길로 나서지 않았다. 호가 계서(溪西)이므로 그가 살았던 집의 당호인 계서(溪西堂)이고, 33세 때인 1627년 식년시로 급제한다.

 

식년시(式年試)는 3년마다 실시했던 조선시대 정식적인 과거시험 종류였다.

자(子), 묘(卯), 오(午), 유(酉)의 해를 식년과거시험으로 하여 1월에서 5월중에서 시험을 시행하였다. 3년 마다 과거 급제자는 33명이 나왔다.

한 번 낙방하면 3년을 기다려야 식년시에 응시 할 수 있었으니 과거시험의 낙방은 엄청난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1634년 40세 이후에 사간원과 홍문관에 근무하면서 탐관오리를 척결하는데 일조를 하기도 했다. 진주와 강계의 수령이 되어 백성들의 신임을 받았으며, 몇 번이나 어사로 임명되기고 했다. 1695년(숙종21년) 부제학으로 추증받으며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부제학은 품계로는 정3품의 당상관이지만 홍문관의 장관이라는 명예를 지닌 직계다. 당상관은 조선시대 조정의 중요한 회의 때에 당상(堂上), 즉 대청마루에 앉아 정무를 논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직급이었다.

 

계서당(溪西堂)은 1613)에 성이성(成以性)이 건립하였다. 이 건립연대가 맞다면 그가 벼슬에 나가기 전이다. 결국 당시 부친 성안의(成安義1561~1629)의 재력으로 건축하였을 것이다. 그의 호는 부용당이며, 정구(鄭逑)의 제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24) 식년시에 급제하였던 엘리트였다.

정구(鄭逑, 1543년~ 1620년)의 제자답게 임진왜란이 터지자 창녕으로 돌아가서 의병을 모집하고 곽재우 장군의 지시를 받는 의병장이 되었던 사람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예조좌랑과 영해부사를 역임하고 1607년 남원군수와 1612년에 광주목사를 지내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 때에는 왕을 호위하여 공주로 내려갔으며, 1624년에는 제주목사를 역임했다. 창녕에 있는 연암서원과 물계서원이 그를 선양하고 있으며, 저서로는〈부용당선생일고〉가 있다.

 

 

 

■ 만산고택

춘양목의 고장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288번지에는 만산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1878년(고종15년)에 만산 강용(晩山 姜鎔, 1846~1934)이 건립한 137년 된 고택이다.

강용은 중추원 의관과 도산서원장을 역임한 선비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는 의양리 뒷산에 망미대(望美臺)를 쌓고 조국을 위한 헌시를 지었다.

강용의 호 ‘만산’이 당호가 된 이 집은 규모가 매우 크다.

 

만산(晩山) 현판 글씨는 대원군이 썼다. 그러나 진품은 현재 연세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만산고택의 구조는 정면 11칸의 긴 행랑채 중앙에 솟을대문이 내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서쪽에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서당(書堂)이 있는 것이 특징이며 담장을 돌아 뒤란으로 나서면 별당(別堂)이 서 있다.

서당에는 한묵청연(翰墨淸緣)’이란 글씨가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는데 영친왕(英親王)이 8세 때 썼다고 전한다. <한묵청연>이란 뜻은 ‘글로 인연이 된 맑고 청결한 사람’이란 뜻으로 한(翰)은 붓, 묵(墨)은 먹이므로 한묵(翰墨)은 붓과 먹으로 이루어지는 일체의 학문, 청연(淸緣)은 맑고 청결하며 소중한 인연(因緣)을 의미한다.

 

만산고택에는 현판이 많이 걸려 있고 다양한 야생화들이 심어져 있다.

칠류헌(七柳軒)은 만산고택의 별당(別堂)으로 칠류헌(七柳軒)은 춘양목으로 지어진 아름답고 격조 있는 고택이다. 칠류헌(七柳軒)의 七이 의미하는 것은 월(月),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 일(日)의 별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하늘과 땅의 변화가 우주의 질서처럼 순환하듯 조선의 국운(國運)을 기원하는 편액이다. 칠류헌의 둥근 기둥의 주련은 유명한 서예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다. 

 

만산(晩山)편액 왼쪽 편에 정와(靖窩)라고 쓰여진 현판이 걸려 있다. 이 현판은

소우(小愚) 강벽원(姜壁元)선생의 글씨로 ‘편안한 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존양재(存養齋) 현판은 서예가 오세창(吳世昌)의 글씨다. 맹자에 나오는 ‘存心養生’이란 글에서 빌려왔다. ‘본래 심성을 전심으로 준수하여 훌륭한 마음을 가져라‘ 뜻을 지니고 있다.

차군헌(此君軒) 편액 글씨는 ‘대나무가 있는 집’ 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서실(書室)은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러시아황제에게 전달할 밀서를 가지고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했던 권동수(1842~ ?)의 글씨이다.

만산고택의 주인이었던 만산 강용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에 치욕을 느껴 이곳으로 이후 낙향하여 망국의 한을 달래며 만산고택 뒷산에 망미대(望美臺)세우고 조국의 광복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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