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신세훈 '역학'

권운영 2015. 5. 24. 12:31

 

 

 

 

[시가 있는 마을] 신세훈 '역학'

 

 

 

 

역학
                               신세훈



깊은 잠속에서
영혼의 아이는 깨어 울고
추운 울음은
여름꽃나뭇가지에 매달려 핀다
봄철로 돌아가는
나뭇잎의 예감,
여름내내 숨어 살던
눈송이가 떨어진다

 

 

 

<이선의 시 읽기>

 

신세훈의「역학」은 짧지만 넓고 긴 학문서 같은 광활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중국의 고전인 「주역」과 한국의 ‘성리학’, ‘음양이론’이 공존하며,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다루고 있다. 또한 율곡과 원효사상이 들어있다. 무위자연론과 서경덕이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인본주의’까지 내포하고 있다.
 

세상은 ‘음양’이 만나 반대적인 기운으로 버티고, 밀고 당기며 화합한다. 사랑도 그렇고 하늘과 땅의 이치도 그렇다. 모든 사물과 사물의 현상들은 유기체적인 관계성을 맺고 있다. ‘관계성’은 실존이며 사실이다. 불이 활활 타다 식으면서 그 열기가 공기 속으로 퍼져 공기를 따뜻하게 하고, 인간의 몸을 덥혀준다. 몸의 온기는 활동에너지가 된다. 다시 나무를 패고 아내와 아이들을 따뜻하게 한다. ‘나무가 불에 탄다’는 사실은 인간가족과 사회에 이로움을 주며 영향력을 갖는 이치다.
 

한국 사람들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그런지 모르지만, 우주를 정복한 지금도 ‘역학’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역학적 관계는 삶의 원동력이다. 짧은 단어와 시어들을 살펴보고 그 원동력의 중심을 들여다보자.
 

1-2행의 ‘깊은 잠’과 ‘깨어’남은 음양이론으로 인간생명의 반대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잠’과 ‘깨어남’은 철학과 종교의 기본 틀이다. 지혜자가 되거나 순교자가 되거나 ‘깨달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2행의 ‘영혼의 아이’라는 말을 주목하여 보자. ‘영혼’이 깨어나면 통찰력과 성찰력을 갖게 되며 ‘도’를 득도하거나 ‘성불’하거나 ‘신’이 된다. 영혼의 파장은 크다. 그런데 ‘영혼의 아이’는 깨달음의 ‘어린 알갱이’다. 순수한 ‘진리’의 ‘결정체’다. 다른 말로 하면 우주의 ‘근본’이며 ‘근원’이다. 가난한 영혼이 수천만 번 울어야 득도를 할 것이다. 득도의 완성을 ‘꽃을 피운다’로 해석과 상징을 하고 있다.
 

3-4행에서처럼, ‘추운 울음’의 강을 수만 번 건너야 ‘여름꽃나뭇가지’에 꽃이 필 터. 진리가 완성될 터.
 

5행, ‘봄철로 돌아가는 나뭇잎의 예감’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봄철은 절기의 시작이다. 시인은 웅변하지 않고 ‘순환의 원리’를 ‘나뭇잎의 예감’이라고 명징하게 표현하고 있다. ‘봄철로 돌아가는 나뭇잎의 예감’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독교적 ‘부활’이다. 또한 불교의 ‘윤회’다. ‘인연’이다. 또한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생성’과 ‘소멸론’이다.
 

7행의 ‘여름내내 숨어 살던’ 부분을 눈여겨 보자. 7행은 위의 시에서 가장 인간적인 부분이다. 그래서 가장 시적인 부분이다. 왜냐하면 ‘행위’를 넣었기 때문이다. ‘숨어살던’ 주체적 자아가 존재한다. 바로 ‘눈송이’다. 그런데 그 주체는 약하디 약한 존재다. 햇빛이 비치면 곧 사라질, ‘눈송이’다. 눈송이는 덧없고 허무한 존재로 주체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지도 못하고 곧 며칠 뒤 사라진다. 첩살이하는 시앗과 같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도둑과 같이.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주인이 아니다. 자연과 우주 앞에서 무상한 존재인 인간의 모습이다. 노장사상이 녹아있다.
 

8행의 ‘눈송이가 떨어진다’는 표현이 압권이다. 만약 ‘물이나 낙엽이 떨어진다’라고 하면 어떨까? 꿈이 없다.  이 시가 형이상학적 수준을 끝까지 유지하는 이유다.
눈은 희고 깨끗하고, 세상 더러운 것을 모두 덮는다. 또한 별빛처럼 자체발광을 하며 빛을 낸다. ‘눈송이’는 봄, 여름, 가을 동안 숨어있다가 ‘겨울’에 다시 ‘살아났다’가 다시 떨어진다.
 

만물생성의 원리를 짧게 압축하여 이보다 더 절실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음양이론과 철학, 종교론을 시의 배경으로 깔아놓고, 시에 행위를 집어넣었다. 형이상학인 ‘이’를 배경으로 깔고, 형이하학인 ‘기’를 넣어줌으로써 화룡점정으로 그림이 살아난다.
 

의성이 고향인 신세훈은 안동 유학파의 피를 직간접적으로 수혈하였을 것이다. 그의 시에서 보여주는 ‘역학’적 깊이와 넓이가, 만물의 기운 속에서 꽃으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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