梅軒 윤봉길

뿌리

권운영 2013. 6. 21. 21:17

출신과 교육

아버지는 황(璜)이고, 어머니는 김원상(金元祥)이다. 집안은 몰락양반가로 전형적인 농가였다. 1913년부터 큰아버지 경(坰)에게 천자문을 배우다가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3월 3일부터 4월 초순에 걸쳐 이 지방에서 일어난 3·1운동의 민족적 분노를 목격했다. 이 충격으로 일제의 '제국신민'(帝國臣民)으로서의 자질과 품성을 교육하는 식민지 노예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했다. 1920년경 〈동아일보〉·〈개벽〉 등을 통하여 새로운 문화에 접하면서, 동생 성의(聖儀)와 함께 최병대(崔秉大)에게 한학을 배웠다. 1921년부터는 성주록(成周錄)이 개설한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을 공부했으며, 뛰어난 시재를 보여 시문집을 쓰기도 했다. 1922년 배용순(裵用順)과 결혼했다. 1926년 서숙생활을 마친 뒤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고 친구들과 교유하는 등 현실의 산 체험 속에서 농촌개혁에 눈을 떠갔다.

농촌계몽운동

1926년 오치서숙 동학들과 농촌계몽의 첫 시도로 문맹퇴치운동을 생각하고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했다. 이곳에서 한글·역사·산술·과학·농사지식 등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체험과 지식을 총동원해 3편으로 된 〈농민독본〉을 저술했다. 제1편은 현전하지 않고, 〈계몽편〉·〈농민의 앞길〉 2편이 남아 있는데, 〈계몽편〉은 예절 등 개인의 인간수업부터 시작해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을 비유법적으로 일깨워주고 있으며, 〈농민의 앞길〉은 농민과 근로자 중심의 이상국가건설, 농민본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길 등 농민의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1928년에는 증산운동·구매조합조직·토산품애용·부업장려·생활개선을 통해 마을을 부흥시키기 위한 운동단체인 부흥원을 조직했다. 또한 독서회를 조직하고 계몽강연회와 토론회도 개최했으며, 수암체육회(修岩體育會)를 설립해 운영함으로써 청소년들의 심신을 단련시켰다. 1929년 2월에는 부흥원 낙성식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한 야학아동 학예회에서 여우 같은 일본제국주의 당국을 규탄하는 풍자극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여, 공연 다음날 덕산주재소에 호출당했다. 1929년 상부상조를 목표로 한 위친계(爲親契)를 조직했으며, 4월 23일 자작자급으로 힘을 길러 갱생하자는 취지로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발족 당시 회원은 38명이었으며, 매월 10전씩을 회비로 거두어 야학회·강연회 개최, 농가부업 장려, 소비조합 창설, 위생보건사업 추진 및 청소년체육발전 도모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중국 망명과 상하이 의거

윤봉길은 1928년 대한독립군단의 상하이 의거 특수공작원으로 국내에서 활동중이던 이흑룡(李黑龍)으로부터 국외의 독립운동전선의 형세를 전해듣는 한편,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 충격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민족운동에 대한 방향전환을 모색하다가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편지를 남긴 채 가족도 모르게 집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도중 선천에서 체포되어 달포 가량 옥고를 치른 뒤 만주에 도착하여 대한독립군의 김태식(金泰植)·한일진(韓一眞) 등과 함께 남만주·북만주를 돌아다니며 독립군의 근거지를 두루 살펴보고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했다. 이때 만주에 살고 있는 동포들의 참담한 생활을 본 뒤 각지에 농무회(農務會)를 조직하고 계몽강연을 했다. 1930년 12월 칭다오[靑島]로 근거를 옮기고 다음해 여름까지 머물렀다. 낮에는 교포 세탁소의 회계원으로, 밤에는 야간노동강습회에 나가 활동을 하며 상하이로 갈 준비를 하던 중 1931년 7월 만주사변을 촉발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을 맞았다. 그는 이 사건이 민족차별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했으며, 여기서 민족혁명의 의기를 더욱 굳건히 다졌다.

1931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해 프랑스 조계 내에 있는 안중근(安重根)의 동생 안공근(安恭根)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교포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말총모자 공장 미리공사(美利公司)에서 일을 하는 한편, 노동자 친목회와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활발히 활동하면서 영어학교에도 다녔다. 1932년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의 별동대인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일왕 히로히토[裕仁]에게 폭탄을 투척했으나 실패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때 공장을 나와 공동조계 내 일본인 거리에서 야채상으로 적정(敵情)을 파악하며 새로운 활동을 모색했다. 그해 봄 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가 민족의 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1932년 상하이 사변[上海事變]이 일어나는 등 사태가 급격하게 진전되자, 김구는 급격하게 침체에 빠진 항일투쟁의 새로운 활로를 타개하는 한편, 만보산사건으로 악화된 한국·중국 양국민의 민족감정을 완화시킬 목적으로 상하이에 있는 일제의 군기창고 폭파계획을 진행시켰는데, 이때 윤봉길 등 6명이 하역인부로 투입되었다. 그러나 상하이 병공창[上海兵工廠] 주임 김홍일(金弘壹)이 맡은 시한폭탄 제조가 지연되어 거사에 들어가기도 전에 정전(停戰)이 됨에 따라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뒤 김구는 일제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에 전승축하기념식을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탐지하고 폭탄투척거사를 준비했다. 이 거사에 선발된 윤봉길은 4월 26일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된다는 내용의 입단선서를 했다. 4월 29일 김홍일이 준비한 물통과 도시락에 장착한 폭탄을 식장에 던져 상하이 파견군 시리카와[白川義則] 대장,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시켰으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공사 시게마쓰[重光葵], 총영사 무라이[村井]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색인 : 윤봉길 의거). 거사 직후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11월 18일 일본 오사카[大阪] 위수형무소로,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되었다. 상하이 훙커우 공원 거사는 침체에 빠진 항일투쟁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었다. 중국인들에게 한국인들의 독립열망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주었으며, 임시정부가 장제스[蔣介石] 국민당정부의 후원 아래 항일연합전선을 펼쳐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저서로 시문집 〈명추 鳴椎〉·〈옥타 玉唾〉가 있고, 그밖에 〈기사일기 己巳日記〉·〈농민독본〉 등이 있다. 1946년 6월 30일 해방 후 첫 국민장이 엄수되었고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